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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談]양사언의 모(楊士彦母)

淸潭 2016. 1. 11. 10:49

양사언의 모(楊士彦母)

**1) 양사언(楊士彦)과 양사기(楊士奇)형제는 양사준의 동생인데, 모두 양희수의 아들이다. 양희수가 사냥을 갔다가 비바람을 만나 한 시골집에 들어갔다. 그 집에는 노인과 어린 딸이 있어서, 노인이 양희수를 맞아 술을 대접하는데, 어린 딸이 돕고 있었다.

이때 양희수는 마침 상처한 뒤라, 노인에게 딸을 계실로 맞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은 신분이 미천함을 들어 반대하다가, 마침내 허락했다. 그래서 맞아 데리고 왔는데 현철한 부인 소리를 들었고, 이 여인에게서 사언, 사기 두 아들을 낳았다. 특히 양사언은 시와 초서에 능했다.

**2) 양희수가 사망하면서 큰아들 양사준에게,

“내 죽고 나면 이 아이 어미가 밖에 나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네가 이 아이를 특별히 잘 돌봐 주어야 한다.”하고 부탁했다.

이에 양사언 모친이 전처 아들 양사준에게,

“이미 유언을 들었지만, 미망인 모자가 각기 떨어져 상복을 입게 되는 것은 내 차마 볼 수 없다.(어미의 미천한 신분이 노출됨.) 내 차라리 지금 바로 자결하면, 저의 부친 삼년상과 함께 나의 상을 지내게 되고, 그러면 내가 낳은 아들이 부친의 친아들처럼 취급되어 구별이 없어지니 그것이 훨씬 낫다. 뒷일을 부탁한다.”하고는 바로 자결했다.

**3) 양사준은 부친 상례와 함께 계모의 상례도 겸해서 삼년상을 내니, 양사언은 미천한 모친의 자식임이 감추어지고, 그리고 과거에도 급제했다. 뒤에 양사언은 화양 부사가 되어 금강산을 드나들면서 호를 '봉래주인(蓬萊主人)'이라 했고, 금강산 만폭동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 써서 바위에 새겼다. 또 경포정 벽에 '飛'자를 크게 썼더니, 바람이 불어 그 글씨를 말아 바다로 들어갔다. 이를 가지고 택당 이식이 '飛字入海歌'라는 부(賦)를 지었다.(중종)

이 얘기는 기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출전을 밝혔다. 표현으로 보아 사실 기록처럼 보여, 아마도 양사언 설화의 기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김현룡, 한국문헌설화4, 건대출판부, 1998. 88-89쪽.)

飛字入海歌 비자입해가

 

靑鯨鬣束彤玉管 푸른 고래 수염을 붉은 붓대에 묶어 놓고,

星泓晴日流銀漢 맑은 날 성홍에다 은하수를 쏟아 부어.

亭飛筆飛字自飛 비래정에 써 놓은 비 자 절로 날아가 버렸나니,

謫仙已矯凌雲翰 적선께서 능운필(凌雲筆)을 휘둘러 남긴 글씨였네.

霓旌羽蓋碧海東 신선의 수레 타고 바다 동쪽 향하실 때,

蕭君肯顧蕭齋空 소군이 텅 빈 소재 다시 돌보려 했겠는가.

眞官錦誥詔風伯 진관이 명을 받들고서 풍백을 불러들였거늘,

不待點睛催龍公 눈동자에 점 찍어서 용공을 깨울 게 있었겠나.

人間長物唯此取 세상의 많은 물건 중에 오직 이것을 취하다니,

物外奇蹤定無偶 방외인(方外人)의 기이한 자취 정녕 짝이 없어라.

書蟲剝紙蝸畫涎 달팽이 기어다닌 좀먹은 책이나 뒤적이며,

天祿靑藜欺白首 나는 백발로 언제까지 천록의 청려에 속으려나.

 

양공 사언(楊公士彦)이 일찍이 감호(鑑湖) 호숫가에다 비래정(飛來亭)을 세우고는 큰 글씨로 비(飛) 자를 벽에다 붙였는데, 양공이 유배지(流配地)에서 세상을 떠나던 날에 바람과 우레가 치면서 정자의 벽에 붙어 있던 비(飛)자의 글씨를 휘감아 바다 속으로 집어넣었다는 기이한 전설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양공의 적자(嫡子)인 이일(理一)이 이를 소재로 해서 제공(諸公)에게 시를 청했기 때문에, 나도 부득이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澤堂先生續集 6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