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마음의 도장[心印]

淸潭 2015. 12. 28. 10:04

마음의 도장[心印]  


              무비스님 해설


    


問君心印作何顏   心印誰人敢授傳


歷劫坦然無異色   呼為心印早虛言


須知本自靈空性   將喻紅爐火裏蓮


勿謂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


                                         <십현담(十玄談)>


 




그대에게 묻노니, 마음의 도장이 어떻게 생겼는가.


마음의 도장을 누가 감히 주고 받을 수 있으랴.


한량없는 세월동안 평탄하여 다른 모습 없는데


마음의 도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벌써 헛소리일세.


본래 저절로 신령스럽고 텅 빈 그 성품을 반드시 알라.


시뻘건 화로 불속의 연꽃에다 비유하노라.


무심을 가지고 도의 경지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혀있도다.


 




해설 ; 이 글은 선문(禪門)에서 매우 유명한 십현담(十玄談)의 첫 절이다. 십현담은 혹 십현시(詩)라고도 한다. 열 가지의 선문에서의 중요시 하는 명제들을 골라 그 깊고 그윽하고 고원한 이치를 칠언율시(七言律詩)의 형식으로 나타내었다. 당나라 말기와 송나라 초기에 계셨던 청원행사(靑原行思)의 6세손이며 구봉도건(九峰道虔)스님의 제자인 동안상찰(同安常察,?~961)선사의 글이다. 선사는 홍주 봉서산 동안원에서 주석하였는데 이 십현담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불교가 대승불교를 지나서 다시 선불교로 발전하면서 일심의 문제에 대해서 그 견해와 표현들이 대단히 극명(極明)하여졌다. 불교의 대의가 선(禪)의 대의로 다시 곧 마음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도장이라는 이 글을 잘 이해하면 불교의 대의가 무엇이며 선의 종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충분히 깨달으리라 생각된다. 마음에 대한 이름도 다양해져서 마음의 구슬[心珠], 마음의 거울[心鏡], 마음의 등불[心燈], 마음의 달[心月], 마음의 근원[心源], 마음의 법칙[心法] 등 대단히 많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가지로 이름을 붙혀서 그 실체를 드러내려고 하지만 “그 마음의 도장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얼굴인지 내 그대에게 묻노라.”라고 시작하여 마음은 그 실체가 없다는데 이르지만 그 없는 경지도 또한 궁극이 아니라 아직 한 겹의 관문이 막혀있다 라고 결론을 짓는다. 


 


불교에서는 일찍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하여 마음을 전해주고 전해 받는다는 말이 파다하다. 달마스님도 서쪽 인도에서 와서 문자나 이론을 들추지 않고 단순하게 사람의 마음만을 전했다고도 한다. 세상 사람들의 도장은 온갖 재질과 온갖 모양과 온갖 글씨로 만들어 졌지만 그러나 이 마음의 도장이란 알고 보면 그 어떤 모습도 아니다. 푸르거나 누르거나 희거나 검지도 않다. 모나거나 둥글지도 않다. 글자도 전혀 없다. 그런데 이 마음의 도장을 누가 감히 전해주고 전해 받는다고 하는가. 모두가 거짓말이며 틀린 말이다. 금강경에서도 이르지 않았던가. “과거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다.”라고.


 


무어라 알맞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굳이 편의상 말하자면 마음은 텅 비어 공적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고 그려낼 수 없다. 그래서 “무수한 세월동안 평탄하여 아무런 다른 형색을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의 도장”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는 것은 모두가 헛소리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는 없으나 그것이 본래 저절로 신령스럽고 공적한 사실을 비유하자면 마치 활활 타는 화로 불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난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마음의 신묘한 도리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비유가 대단히 절실하고 근사하다는 것을 느낀다. 찾으면 없는데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그렇게라도 표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실은 어떤 말도 꼭 맞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결국은 온갖 잡다한 마음 작용이 없는 무심의 경지가 마음의 본질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무심이란 것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혀있다. 무심이란 유심(有心)이 문제가 된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 위한 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가 곧 불교의 대의다. 그리고 이 이치가 곧 선의 대의다. 동안상찰선사는 그렇게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