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스님들의 수행, 누구를 위한 수행입니까?

淸潭 2015. 12. 4. 20:21

스님들의 수행, 누구를 위한 수행입니까?
[기고]안거에 들며/현진 스님

 

 

부처님께서 어느 안거가 끝나고 전법의 비구들이 떠나기 직전 강당에 모인 비구들을 향하여 비구들이여 여러분에게 묻겠소. 기탄없이 나를 위하여 말하시오.
“안거 중에 나의 허물이 있으면 숨김없이 말하시오.” 붓다께서는 어떤 허물도 없나이다.
“안거 중에 나의 허물이 있다면 숨김없이 말하시오.” 여래께서는 어떤 허물도 볼 수가 없나이다.
“안거 중에 나의 허물이 있다면 숨김없이 말하시오.” 세존께서는 어떤 허물도 들을 수가 없나이다.
스스로의 허물을 대중에게 묻는 붓다?
최상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허물을 세 번이나 물으며 스스로 허물을 드러내려는 여래의 참모습에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수행자의 진면목을 그대로 깨닫는다. 수행이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면 나는 항상 이 붓다의 말씀을 말한다. 훗날 이 붓다의 가르침은 ‘니까야’의 기록이 되고 상가는 불교의 핵심이 된다. 모든 규칙의 생활 파티목카는 닙바나라는 내적 상태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anguttaru nikaya)

“비구들이여 닙바나의 최고의 가치를 선포하여라. 사람들에게 모든 훼손의 일을 삼가며 자제로서 능숙한 것을 얻으며 자신의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비구는 비구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비구는 수행자가 아니다. 흠을 잡지 말고 해를 주지 말며 낮추어라. 먹을 것과 침상과 의자에 관한 규칙을 지키며 더 높은 자각에 몰두하여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니라.” (dhammapada)

그러나 작금 동국대학에서의 승가의 상황은 미래 승가의 파티목카(波羅提木叉戒)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려고 한다. 총학생회와 교수들 수천의 교육학도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비도덕적 승가인에게 교육법인의 이사장과 총장의 자리에 앉힐 수 없다는 신념이요. 학생부회장은 목숨을 담보하며 48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 위험 수위에 놓여 있다며 의사들도 적극 만류하고 있다. 그러나 건중 학생은 단호히 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단식) 뿐”이라고.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라는 붓다 가르침의 승가로서는 듣기조차 참괴하다. 그 중심에 생명 나눔 실천의 일면스님과 총장 보광스님이 있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존귀한 생명 나눔의 본질적 불꽃이다. 어떤 분노가 있더라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격언을 새기고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입맛을 녹인다면 지금은 억울함에 가슴이 아려도 한 생각 내려놓는 뒷날의 자리는 스님을 크게 살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 108년의 동국상아탑 수많은 학생에 붓다의 정법안장을 심는 것은 우리 승가의 어떤 불사보다 지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스님들이 아닌가!

“수행자는 자신의 자아로부터도 떠나야 한다. 비구와 비구니들 걸식을 하는 것으로 갈망을 버리라. 오로지 주는 것의 최소한으로 닙바나의 법을 배우라. 명상으로 생활의 평정을 얻으며 괴로음의 수레바퀴 무지, 탐욕, 증오의 불을 멀리 하라.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라. 이것이 공동체의 동정심이요 사랑이다. 이것을 거룩한 생활의 닙바나, 나의 담마이니라.”(nikaya)

모든 자아로부터 자신을 내려놓고 떠남이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이라고 외치는 붓다-지상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민주제도요 2500년 비구들의 생활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과 명예, 탐욕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찾아서 다니시는 붓다-그의 낮춤과 겸손의 인격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매료케하였고 왕과 귀족, 상인, 사업가, 공무원, 농부, 천민 심지어 윤락녀까지도 감동하게 하며 담마의 품속으로 모여들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 승가, 어떤 수행으로 살림살이 주장자를 당기고 있는지 묻고 싶다. 나의 51년 출가생활을 비추노라면 지금 우리 조계종의 살림살이는 가히 황금시대라고 할만하다. 50, 60년대 정화 말미에 나는 숫가락 젓가락 하나 변변치 못한 정화중의 사찰에서 수행자의 첫 발을 내딛었다. 어쩌다 쌀밥 한 술은 주지스님의 몫이고 행자와 사미는 쑥과 산채를 뜯어 보리쌀과 섞어 죽을 쑤어 먹기 일쑤였다. 당시 대부분의 스님들이 겪은 사찰수행의 면목일 것이다. 그런 사찰들이 70, 80년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불심과 함께 사찰들은 급작스런 부의 황금화를 거두기 시작한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있어서 황금알은 결코 닙바나가 아니었다. 황금의 고인 물-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격언과 같이 조계종의 황금 물동이는 부패의 그릇으로 변해갔다. 그것의 정점이 94년의 개혁정화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탐욕의 끈을 놓치 못하고 CNN까지도 세계를 향하여 한국불교의 탐욕상을 실어낸 98년의 종단사태이다. 98년의 사태를 거울삼아 얼마간 정신을 차린 듯 교육과 포교, 사회복지, 약자를 위한 사회활동, 구호활동, 환경 등의 살림살이가 어느 때보다 약진한 것을 자랑해 온 터다. 불자들의 신행도 생활 속으로 젖어들며 불교를 애호하는 사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오늘 승가는 잊어 버렸는가. 아직도 탐욕의 그릇은 넘치고 있다. 일부일지라도 개인의 탐욕과 명예, 보이지 않는 범계의 행위들은 오늘의 조계종을 다시 한 번 몸살나게 하고 있다. 작은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탐욕과 범계들이 승가를 무섭게 위협하고 있다. 황금물이라도 고여 있으면 벌레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 벌레가 한 마리일지라도 얼마의 시간이 흘러보라. 그 물을 부패시킬 수밖에 없다. 사실적인 이야기다. 한 사과 농장을 하는 농부가 사과를 팔려고 박스에 넣던 과정에 실낱같은 작은 구멍의 사과를 보고도 다른 곳이 너무도 싱싱하고 빛이 좋아 설마하고 상자에 담았는데 아뿔싸, 며칠이 지나 내다팔려고 보니 상자 속의 사과가 몽땅 썩어 있더라는 얘기는 오늘 우리 승가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함을 느낀다. 출가 장부의 염불이 범계를 막는데 작동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 버려야 할 것이요, 수행자의 목탁이 비리를 막는 도구라면 비리 승가를 척결한 붓다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 승가의 수행적 살림살이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중생 속에서 몸과 마음을 불사르는 식견의 깨어 있음으로 욕망과 소유의 사슬을 푸는 것이 수행이라고 육조혜능은 말한다. 허공을 가르는 주장자의 지견을 가진 선지식이 언제쯤 오실까 기다려진다. 단 한분의 선지식만 오셔도 나는 붓다의 북춤을 알몸으로 추리라.

어느 날 나무아래의 명상에 잠겨 있는 붓다를 한 브라만이 보았다. 붓다의 기관들은 욕망에서 쉬고 있었고 마음은 고요의 세계에 젖어 들었다. 브라만은 붓다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대는 신이요?”
붓다는 대답했다. “아니오.”
“그럼 그대는 천사가 되어 가는 중이오?”
“아니오.”
“그럼 그대는 인간이십니까?”
“아니오.”
이런 인간을 처음 보는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진 브라만에게 붓다는 조용히 이른다.
“나는 전생에 신도 인간도 축생도 새도 되어본 적이 있지만 그러한 낡은 것으로부터 얽어 매인 일체를 소멸했고 나의 자아는 뿌리에서 잘려 나갔으며 야자나무 줄기처럼 베어져 넘어 갔소이다. 이제 아무것도 없소이다. 오직 죽음의 자아를 넘어 가없는 마음, 동정과 공감과 평정으로 어둠을 물리치며 자비를 방사하는 완전한 깨달음의 사람이 되었소. 나를 깨어 있는 깨어난 사람으로 기억해 주시오. 나의 다함없는 길은 중생에게 있을 뿐이오.”

제방에서 수행정진에 살불살조 하시는 눈 푸른 스님들, 대중 애호와 사찰 장엄에 진력하시며 수고를 다하는 스님들이여, 지금 우리 종단 산하의 동국대학에서는 한 젊은 생도가 단식으로 죽음 직전에 매몰되고 있습니다. 학생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생명을 담보하는 일은 보살행의 일상을 담임하는 스님들의 몫이 아니라면 누구의 몫입니까?
동국대와 불교를 위한 22살의 어린 학생이 몸을 불사르며 스님들이 못하는 보살행의 심신을 태우고 있는 처연함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승가청규를 보여 달라며 학교의 비승가적 적패를 해소하고 존경받는 승가의 대학을 이루라며 목숨 걸고 목 놓아 고백하는 가녀린 불자를 이교도일지도 모른다는 비아냥거리는 승가의 소리가 일부일지라도 수행자를 자처하는 말이며 전법의 면목입니까. 말문을 열면 차마 폭력의 말이 될까, 아니 폭력이라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 승가는 건중 학생에게 엄청난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폭력자의 다름 아닙니다.
제방의 지존하신 스님들이여, 진정 우리의 붓다혜명과 수행 전법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습니다. 붓다께서는 죽음의 자아를 버린 중생에 대한 가없는 마음이요, 동정과 공감, 평정의 보살의 길이라며 다함없는 중생이 있을 뿐이라고 하시는데 오늘 스님들의 수행은 정녕 누구를 위한 회향의 수행입니까.

/ 현진 스님 월드머시코리아 대표, 여의도포교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