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있지도 않은데 ‘있다’하고 좋지 않은데 ‘좋다’하는가

淸潭 2013. 12. 12. 17:03

 

동사섭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
있지도 않은데 ‘있다’하고 좋지 않은데 ‘좋다’하는가
2013.12.10 16:20 입력 발행호수 : 1224 호 / 발행일 : 2013-12-11

경전보다 삶이 중요
고통 없는 삶 위해
탐진치서 벗어나야

 

 

▲용타 스님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도량의 주역 중에 주역이십니다. 오늘은 ‘금강경의 세계’를 주제로 법문을 합니다. 법문은 셋으로 요약하여 진행될 것입니다.


그 하나는 ‘금강경과 삶’입니다. 삶과 금강경, 금강경과 삶. 이 두 키워드가 쌍벽을 이룹니다. 이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금강경이 더 중요한가요, 삶이 더 중요한가요? 헷갈리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금강경 몰라도 잘 살아 오셨잖아요. 그래서 삶이 경전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저는 이 세상 70억 인구가 금강경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99.99%로 삶이 더 중요합니다.


경전은 없더라도 살 수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경전 이전에 자신의 삶을 1순위로 생각하셔야합니다. 경전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 소중한 삶 위에다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삶이 중요하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삶이 중요하기 때문에 금강경이 중요하구나 하고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사람들 삶을 관찰해 보세요. 여러분들 자신의 삶을 관찰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그나마 이 도량에 나들이 하면서 잘 사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삶의 질은 많이 높아져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경전을 모르고 그냥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습관적으로 삽니다. 습관적으로 살면 어때요? 습관적으로 살면 거의가 지옥 쪽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전, 지혜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수준 낮은 삶을 중생 놀음이라 부릅니다. ‘고통이 있는 사람’을 중생이라 합니다.


금강경과 삶이라는 두 키워드를 놓고 볼 때 ‘삶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내 삶이 제대로 되려면 경전말씀, 성자들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야 되는 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것이 1박자입니다.


이제 그 둘은 중생의 삶이란 무엇이냐를 이해해야 합니다. 중생의 삶은 불안정하고 고통이 많습니다. 이러한 삶이 있기 때문에 경전이 생겨 난 것이지요. 70억 인구 전부가 중생심을 넘어선 성자라면 세상의 모든 경전들은 필요가 없게 되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불안정하게 살기 때문에 성자들의 가르침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 불안정한 삶이 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여기다가 그림을 하나 그려볼게요. 이것은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라는 말은 고통이 완전히 사라져서 완전한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니르바나의 마음상태로만 존재하지 못하고 타락을 하게 됩니다. 나락 이전의 니르바나를 무심, 무위, 극락, 천국, 태극, 태허, 도, 무심, 청정, 깨달음 등등등 다양하게으로 표현합니다. 완전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기에 다 들어갑니다.


이를 국어사전 말로 바꿔놓으면 ‘개념 이전’ 입니다. ‘개념 이전’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개념 이전의 의식 상태가 니르바나요, 극락이요, 천국이요, 태극이요, 깨달음 등등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돌아보세요. 한결같이 다 개념 놀음을 하고 있는 삶입니다. 나요, 너요, 내 가족이요, 내 집이요, 내 회사요, 등등 개념을 쓰지 않으면 못살 정도로 무수한 개념의 삶을 삽니다. 곧 개념이 전제된 삶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럼 개념 이전의 세상은 어떠할까요? 우리들의 삶에서 궁극에는 돌아가야 할 삶은 개념이전의 삶이요, 그냥 있음의 삶입니다. ‘그냥 있음’자리는 무심한 자리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일체의 개념이 사라져 무심한 의식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리하여 일체의 걸림이 없이 깨끗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허공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개념 이전으로 돌아 갈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무심으로 있지 못합니다. 개념으로 ‘내가 있다, 네가 있다, 이것이 있다, 저것이 있다.’ 하면서 줄기차게 개념에 떨어지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서 개념살이를 당연히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있다’고 여기는 것도 허물인데 더 깊은 늪으로 추락하면서 ‘좋다·싶다-썅’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 그러고 있을 것입니다. 개념 이전의 무심한 상태로 있지를 못하고 ‘있다’ ‘좋다’, ‘싶다’, ‘썅’하는 삶을 수없이 살고 잇지 않습니까!


성자의 삶은 ‘있다’, ‘좋다’, ‘싶다’, ‘썅’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석가모니와 같은 성자들은 ‘나’, ‘너’, ‘이것’, ‘저것’과 개념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금강경이 날카로운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즉비시명(卽非是名)’이라는 구조의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에 97회 정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즉 컵즉비컵시명컵, ‘컵이란 컵이 아니며, 편의상 컵이라고 할 뿐이라’는 구조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아난아!”하고 시자를 부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마음속에서는 ‘아난’을 실체시하지 않기 때문에 ‘아난’에 걸리는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아난즉비아난(아난이 아난이 아님)’을 깨닫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아난아!”라고 부르시지만 이것은 ‘시명(是名)아난’이라, 삶의 편리를 위해서 편의상 “아난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곧 성자들은 억만 가지 개념을 쓰되 그 어떤 것도 실체성(實體性)이 없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편의상 개념을 쓰지만 걸리지 않고 쓰는 것입니다.


‘있다’는 ‘실체사고(무언가가 다른 것과 구별되면서 있다고 생각함)’요, ‘좋다’는 ‘가치사고’이며, ‘싶다’는 ‘욕구’요, ‘썅’은 싶은 대로 되지 않음으로 해서 일어나는 ‘분노’입니다. 있지도 않은데 ‘있다!’하고, 좋다고 할 만한 것도 아닌데 ‘좋다!’하니 어리석음[치(癡)]이요, ‘있다-좋다’ 다음에 ‘싶다’하니 욕구[탐(貪)]이며, 욕하는 대로 되지 않아 분노[진(瞋)]가 일어납니다. 이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라 합니다. 이 탐진치 삼독을 바탕으로 하여 생각하고 말 하고 행동 하는 것을 중생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 셋은 중생이 중생심을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냐입니다. 바로 그 대안이 금강경삼요(金剛經三要)입니다. 금강경을 잘 살펴보면 셋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고 서원하는 대원(大願), 둘째는 육바라밀의 삶을 사는 대행(大行), 셋째는 구유중생을 다 제도하겠다고 발원하고 육바라밀을 닦되 상(相: 개념)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닦는 즉비(卽非)의 길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입니다. 대승의 시대에는 지극히 당연한 길이지만, 대원과 대행에 상응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 즉비(卽非)요, 파상(破相)요, 무유정법(無有定法)이요, 무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無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입니다. 모든 개념을 필요에 따라 쓰되 모든 개념 앞에 그 개념을 바로 부정해버리는 즉비(卽非)를 붙여야 합니다. ‘나’라 했으면 바로 ‘즉비나(바로 나가 아님)’에 깨어있어야 하며, ‘컵’이라 했으면 바로 ‘즉비컵’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실로 여겼던 컵은 지금 여기 없어요. 그럼 ‘컵 자체’를 본다고 생각하고 집중해 보세요. 무엇인가가 실체사고로 머릿속에 들어왔을 때는 그 존재 자체(自體)가 들어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주관적인 인식의 틀에 의해 비쳐진 현상이, 표상물이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이 자각이 드는 사람은 벌써 깨달음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컵이라 하면서 컵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컵 자체[物自體]는 무엇일까요? 이때 그 자체는 영원히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하는 순간 일체의 주객으로부터 자유로워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금강경은 영원 절대의 해방을 일으켜주는 가르침이므로 금강경을 수지하는 공덕이 이 몸을 항하사 모래알 수 만큼 헌신해버리는 공덕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연민지정으로 끌어안으면서 ‘무한 우주에 있는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를 간절한 마음으로 서원하면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자아(自我)에 떨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을 닦고 닦으시기 바랍니다.


정리=대전·충남 이장권 지사장


이 법문은 12월4일 대전 보현문화회관에서 열린 ‘한밭벌 야단법석I’에서 ‘금강경의 세계’를 주제로 진행된 동사섭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용타 스님
1964년 청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1980년 동사섭 수련프로그램을 개발,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현재 동사섭 행복마을 회주로 저서로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해탈 10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