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여인네들의 저항심리를 대변하는 시
이옥(李鈺)
謂君似羅海(위군사라해)- 당신을 사나이라 이르길레,
女子是托身(여자시탁신)- 여자 이 한 몸 평생을 맡겼는데.
縱不可憐我(종불가린아)- 비록 날 어여삐 여기진 못할망정,
如何虐我頻(여하학아빈)- 어찌 번번이 날 구박만 해오는가.
<悱調>6
▶ 悱 -표현 못할 비.
郎歸月落時(낭귀월낙시)- 낭군은 달이 질 때야 돌아오는데,
先睡必生怒(선수필생노)- 먼저 잠들면 반드시 화내고.
巡邏今散未(순라금산미)- 순라군들 지금쯤 흩어졌을까,
不寐亦有疑(불매역유의)- 안 자고 있어도 또한 의심한다네.
<悱調>10
早恨無子久(조한무자구)- 일찍이 자식 없다 한탄한 지 오래지만,
無子返喜事(무자반희사)- 무자식이 도리어 다행스런 일이라네.
子若渠父肖(자약거부초)- 자식이 만약에 지아비를 닮는다면,
殘年又此淚(잔년우차루)- 남은 여생 또 이처럼 눈물 흘릴 테니.
<悱調>12
이옥(李鈺)의 시 비조(悱調)는 주로 난봉꾼 남편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원망과 저항의식 등을 표출하고 있다.
이 난봉꾼은 번번이 이유없이 구박하고, 부인의 옥비녀 훔쳐다 기녀에게 주고, 반찬 투정하며 살림살이 치고, 괜히 부인 의심하고, 구타하고, 마주칠 때마다 화내 등갖은 행패를 부렸다.
시적 화자는 이런 남편의 부당한 처사와 횡포에 대해 원망하고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다홍치마를 남편의 투전빚을 갚기 위해 팔고 온 심정을 하소연하는 가운데 심각한 저항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花石子)·청화외사(靑華外史)·매화외사(梅花外史)·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등 여러 가지를 사용하였다. 진사 이상오(李常五)의 4남 6녀 중 3남으로 태어나 20세에 해주 정씨(海州 鄭氏)와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1790년(정조 14) 증광(增廣)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792년(정조 16) 국왕에게 올린 응제문(應製文)의 문체가 패관소설체(稗官小說體)로 지목되어 견책(譴責)을 받았고, 5년후인 1795년(정조 19) 경과(慶科)에 응시하였으나 다시 문체가 문제가 되어 과거 응시를 금지하는 정거(停擧)에 처해지고 충군(充軍)을 명 받았다. 1796년(정조 20) 별시 초시(初試)에서 방수(榜首)를 차지하였으나 역시 문체를 지적 받아 방말(榜末)에 붙여졌다. 그 뒤 1799년에 삼가현에 소환당하여 그곳에서 넉달 동안 머무른 후 본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으로 내려가 저작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대표적인 저술은 김려(金鑢)가 교정하여 『담정총서(潭庭叢書)』 안에 수록한 11권의 산문과 『예림잡패』에 시 창작론과 함께 남긴 이언(俚諺) 65수가 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서는 「동상기(東廂記)」를 그가 지었다고 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 격식을 거부하고 소품이라는 새로운 문체를 창안하여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물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산문과 시는 조선 후기 문학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을 대변한다는 면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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