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禪이야기

<반야의 지혜>

淸潭 2010. 6. 20. 10:18
<반야의 지혜>

 

<반야의 지혜>라 함은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보아서 아는 지혜(如實智)'를 뜻한다.

이와 같은 경지의 마음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는데, '한없이 크고 맑은 거울과 같은 마음'을 뜻한다.(해인삼매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본래 이 같은 마음을 가졌으나, 태어 난 이래로 탐욕과 감정과 어리석은 생각에 끊임없이 물들어 있어서 한시라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진리를 볼 수 없고 실현 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반야의 지혜>라 함은  우리의 마음에 물들어 있는 끊임없는 탐욕과 감정과 어리석은 생각을 말끔하게 걷어낸 본래의 깨끗하고 온전한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서(自覺) 회복한 것을 뜻한다.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불의 일생에서 볼 수 있었던 것 처럼, 부처라 하더라도 인과응보는 벗어 날 수 없다하였다.

그러면 <반야의 지혜>나 또는 해탈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그 인과응보에 대하여 어둡지 않다(不昧. 明. 通)라고 하고, 그 인과응보가 "연못 바닥을 쓰는 대나무 그림자와 같게 된다." 하였다.

이 처럼 <반야의 지혜>는 인과응보에 대해서 밝게 통하게 되고, 인과응보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뜻한다 할 것이다.

 <반야의 지혜>는 우리 마음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있는 영원불변의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열반4덕을 가진다고 한다.

<반야의 지혜>는 마음의 영원붊변하는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얻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를 견자본성(見自本性) 또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

 

탐욕과 감정과 어리석은 생각이 왜? 밝은 마음(明)이 되지 못하고 무명(無明)인가 하면, 이번 성 폭행범인 김수철이 < 내 안에 탐욕의 괴물이있다.>라고 한 것 처럼 ... 대부분의 인간파괴적 범죄는 무명의 탐(貪)진(嗔)치(痴)의 물든 마음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과 같다.

 

첨단과학과 핵폭탄과 같은 가공할 파괴력의 무기는 작은 국가에서 작은 집단으로 그리고 필경은 개인의 소유에 이르기까지 확산 될 것을 방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볼 때에, 실정법과 같은 외제적(外制的) 규제일변도를 넘어설 수 있는 형평성(반야의 지혜) 자각과 같은 내발적(內發的) 자각풍토를 일반화 하는 것이 시급하다 할 것이다.)  

 ' 민주(民主)' 사회에 있어서는, 시민 한 사람 한사람 마다 바로 이 <반야의 지혜>를 형평성으로 자각하지 않는다면, 탐욕과 감정과 생각을 지배하는독제자의 조직적 지배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에 그 독제자 또한 형평성의 안목이 없다면, 그 사회는 약육강식과 전쟁과 같은 인류상잔과 환경오염과 같은 환경파괴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사회적 자연적 파괴가 크면 다른 독제자의 혁명의 구실이 될 것이다.)

 

<반야의 지혜>는 보편타당성의 근원이다.

이 지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인과응보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의 친환경적 인과응보까지 통하는 안목이 되는 것이다.(우주만물이 그러한 것과 같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며 조화할 수 있는 원리는 <반야의 지혜>인 즉, 영(0)과 등호(=)의 형평성 뿐이라 할 것이다.)

탐진치에 물든 마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까지도 파괴하게 된다 하는 것과같다.(신체적 제한성의 먹이사슬 속에서는 당연히 허용된다.)

반대로  탐(貪)진(嗔)치(痴)를 벗어 난 <반야의 지혜>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생각하게 하고, 인류와 자연환경을 동등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처럼 <반야의 지혜>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곳에 근본적이고 필수적이며, 바람직한 친환경적문명을 만드는 곳에서도 꼭 같다 할 것이다.

 행복한 미래를 향해 지혜를 얻을수 없다면 빌려서라도 우리의 미래를 가꾸어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행복과 행운이 함께하는 평화속에 논쟁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수있도록 우리는 살아가고 살고 싶어 합니다.

 

 

 

 어디로 갈꺼나

꼭 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