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24호 명 칭 : 덕수궁(德壽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63,190㎡ 지 정 일 : 1963.01.18 소 재 지 : 서울 중구 정동 5-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덕수궁
지금의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였다가 1년 반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병란에 소실된 까닭에 머물 궁이 없었기에 왜군들이 주둔하여 파괴를 면한 당시 황화방(皇華坊:정릉동 일대)의 종친과 양반가 등의 민가들을 수용하여 임시 궁궐로 개조, 정릉동 행궁으로 삼고 시어소로 머물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생전에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국 이곳 행궁에서 승하하신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에 창덕궁 복구 공사가 마무리되자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 4월 창덕궁으로이어(移御)하였다.
한편 1623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경운궁 별당(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 석어당과 왕비의 궁방인 명례궁 건물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떠나게 된 후로 경운궁은 어려운 시절의 쓰라림을 회상하는 뜻 깊은 공간인 궁으로 남게 되었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친일적인 관료들과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건양 2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가지면서 경운궁은 고종에 의해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런데,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이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특사자격으로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킨다. 1907년 8월 경운궁 돈덕전에서 황제즉위식을 가진 순종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함으로써 경운궁은 마침내 궁궐로서의 임무를 다하게 되었다.
한편,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가 붙여지게 되면서 오늘날의 덕수궁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데, 덕수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조선 초 정종에게 양위(讓位)하고 물러난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 이기도 했다. 이처럼 덕수궁이란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인 것이다.
1919년 고종이 침전인 함녕전에서 승하하면서 주인 없는 궁궐 덕수궁은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고, 전각들이 파괴, 왜곡되었다. 1922년 일제는 선원전의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뚫었는데 이 길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며, 이때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엄비의 혼전은 헐려 경기여고가, 또 도로의 동편에 있던 제사준비소 터에는 지금의 덕수초등학교가, 1927년에는 경성방송국이 건립되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궁내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게 되어 훼철된 덕수궁은 1933년 10월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현재 남아 있는 경운궁의 영역은 대한제국 당시의 1/3정도일 뿐이다.
대한문(大漢門).
대한문은 원래의 경운궁의 정문이 아니었으며 본래 이름 또한 대안 문(大安門)이었다. 정문인 인화문이 있었으나 주위에 민가가 교통이 불편한 반면, 동쪽에 있는 대안문은 1900년대 고종의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의 일환으로 방사상 도로가 나 자연스레 자주 이용되면서 사실상의 정문이 되었다. 1904년 경운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대부분의 건물이 중건되는데 이때 대안문도 수리를 했다. 1914년 태평로가 뚫리면서,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두 번 뒤로 밀려났다.
현판 대한문(大漢門)은 1906년 한성판윤(현 서울시장) 남정철(南廷哲)글씨.
교대식 행사의 정통악기를 연주하는 행렬등 그 옛날을 회상케한다.
마침 오늘(2008.12.12) 시내 볼일이 있어 시청에 갔다가 왕궁 수문교대식이 있어 이 전통적인 의식을 촬영했다 외국인들도 Movie camera에 이 색다른 광경을 찍기에 여념이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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