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세종대왕릉

淸潭 2007. 4. 23. 21:43
 

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합장릉으로 원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에 있던 것을 1469년(예종 원년)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영릉(寧陵)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쌍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 서쪽에 있던 것을 1673년(현종14)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관리면적은 65만 2000평이며, 해마다 양력 5월 15일에는 세종대왕 탄신 숭모제전을 봉행하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번지에 위치한다.

 

 

 

 

 
위    치 :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홈페이지 :  http://www.yeoju.gyeonggi.kr/ 
관 리 처 :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전화 031-885-3123)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1970. 5. 26)
시    대 : 조선시대
개    요 :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英陵)>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태종12년(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고 스물두살 되던 태종18년(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해 음력 8월10일
           (양력 9월18일) 22세의 나이에 조선조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이 맏형인 양녕대군을 두고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러 왕자중에서
           가장 총민하고 현명하였기 때문이었으며, 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원형을 이루었던 우리
           민족은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업적>
           - 한글창제
             대왕은 궁중에 정음청을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지도하여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연후인 
             1446년 9월(음력) 에 이를 반포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통한 우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그 원리나 형태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익히기 쉽고 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되고 
             있다. 한글 창제의 더 큰 의의는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던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학문창달
             대왕은 특히 학문을 사랑하여 집현전을 부활하여 우수한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강론하고 옛 제도를 연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토록 하였
             다. 우선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 개량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농사직설·고려사·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석보상절·의방
             유취 등 귀중한 책을 간행하고, 경제육전을 반포하여 농업을 크게 장려하
             여 전제(田(전)제)와 세제를 정비하는 등 문물제도를 크게 개건하였다.  
           - 과학의 진흥             
             대왕은 국민을 위하여 농업을 진흥하려는 데 뜻을 두고 한 평생을 천문, 
             지리 등 과학기술을 연구 보급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장영실, 이천 등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여 천문관측기구인 대·소간의, 
             일성정시의, 혼천의, 시간을 재는 앙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등 
             을 만들었다. 또한 측우기를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강우량을 측정토
             록 했으며 수표를 만들어 하천의 수위를 재게하고 외국의 역법(曆法)을 
             참작하여 역서와 천문도를 제작했다. 이리하여 천문·지리 등 과학기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 외치와 국방
             대왕은 역대로 신사상과 신기술의 통로였던 중국의 명나라와의 교류정책을 
             적극 펼치는 한편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왜구를 응징하여 이종무
             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는 한편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선진관계를 
             도모하였다. 북방으로는 최윤덕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야인을 평정케하여 4
             군을 설치하고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에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국력을 강하하였다.  
           - 음악의 정리
             조선 초기 까지의  음악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오던 음악과 중국음악이 서로
             혼합되어 무질서한 상태였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정리하였는 데, 이는 아악의 
             부흥과 향악의 창작이었다. 대왕은 박연 등으로 하여금 각종 악기를 만들게 
             하고 특히 편경과 편종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악곡·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여 
             바로잡아 아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영릉의 특징 :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의 하나인 영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하
              며, 그 좌우 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
              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게 된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바치고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두 쌍
              씩 여덟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
              서·북 3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앞 한층 낮은 단에 문인석 2쌍과 무인
              석 2쌍을 세우고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전시유물 :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립한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세종전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발
           명하여 사용한 과학기구, 악기류와 세종대에 간행된 책들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세종전 앞 야외유물전시장에는 해시계, 천상열차분야지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 간의 등 15점의 각종 복원유물들이 전시되어있어 세종시대
           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행사안내 : 문화재청은 대왕의 탄신일을 맞아 매년 양력 5월 15일(오전 10시 30분)
           세종대왕의 유덕과 위업을 기리는 숭모제전 행사를 국가행사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 세종대왕위업 선양단체, 일
           반 관람객이 참석하여 세종대왕릉 정자각에서 봉행하는 데 2002년에는 탄
           신 605돌이 된다. 탄신 다례행제 에는 대왕이 친히 지으신 봉래의를 국립
           국악원 연주단 및 무용단데 의해 공연되며, 해마다 세종시대의 과학유물을
           복원하는 제막식을 거행한다. 

           또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영릉봉향회 주관으로 세종대왕 승하일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8일 정오 12시에 종친관계자 300여명의 참석으로, 소헌왕후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28일 정오 12시에 각각 개최된다.

 

 작성기준일   2007년 03월 22일
 

 

 

 

 

신륵사에서 10여킬로미터 떨어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세종대왕릉(英陵)이 있다.

세종대왕릉은 원래 광주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에 있었는데 예종원년(1469)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영릉 입구>

 

<세종전 : 왕의 어진(영정)과 왕의 위업을 그린 그림, 그 시대 발명된 과학기구와 악기, 서적 등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세종전 주변에는 해시계, 물시계, 간의, 혼상 등 세종때 발명된 천문관측기구의 실물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재실 齋室 : 제관이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던 집. 원래는 영릉 매표소 바깥쪽의 위치에 지어져 있었던 것을 1970년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현재 원래의 재실터에 대하여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다. 단아한 멋이 풍기는 건물이다.>

 

<홍살문 :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 색의 나무문이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돌길을 참도(參道, 참배길)라고 하고 가운데 조금 더 높게 만든 길은 신도(神道)라고 하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이 통행할 수 있는 길이라 한다.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다니고 있다.>


 

<정자각 : 제사를 드리던 집. 위에서 보면 건물의 형태가 한자 '丁'자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丁字閣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자각 좌측으로 보이는 낮은 건물은 수라간으로 다른 능역에서는 볼수 없는 건물이라고 한다. 제사나 임금의 친행(親行)이 있을때 음식을 마련하던 집이다.>

 

<건물의 정면에는 오르는 계단이 없고 동쪽과 서쪽에 오르내리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제례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정자각 뒷편 문을 개방하면 곧바로 세종대왕 릉이 보이는데 제례때 정자각 내부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릉 전경 >

 

<왕릉 주변에 서 있는 문인석 >

 

<영릉비와 비각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이곳으로 이장한 시기와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영조 21년(1745)에 세워진 비석과 비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