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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여성개발원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중인 뗀진 빨모 스님은 7월 18일 서울 능인선원에서 ‘작은 나눔 큰 깨달음’주제로 강연했다. 스님은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에게는 큰 자비심이 이미 존재해 있다”며 “이제 자비의 샘물을 파 타인의 목을 축여주는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주대부분의 불자는 명상의 마음을 일상생활로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까를 고심합니다. 즉 수행을 통한 고요한 마음을 사회생활에서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려는 불자로서 사회에서 어떤 실천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고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재가불자들의 최대 관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혜와 자비는 새의 양날개명상과 경전 공부를 통해 지혜와 이해심을 키워야 일상생활에서 다가오는 문제들에 대해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를 닦는 수행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이 세상에는 수 십억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불교는 지혜와 함께 자비를 닦아야 하는데 바로 그 자비를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인데 현실은 한 날개를 잃고 있습니다. 불교를 비롯해 어느 종교든 마음을 닦는 진정한 의미는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어떻게 극복해서 광대한 마음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꽉 닫힌 마음, 나와 가족 등의 소수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어떻게 열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길로 가는 첫 번째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은 친절한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친절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어머니는 한 번쯤 나의 어머니였다. 지금 생의 어머니에게 잘해 주듯이 모든 어머니들에게 잘해야 한다.”
불자라면 이 세상의 모든 뭇 생명을 어머니 대하듯 해야 하고,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듯이 다른 생명도 행복하고 고통 받지 않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최근 한 서양인이 달라이라마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지름길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한참 생각하더니 한참을 우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영겁의 세월이 걸려도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다 끝날 때가지 나는 이 세상에 보살로 다시오고 또 오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불자의 소망이요 원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보살의 길에 들어선 보살 초심자라 할 수 있으므로 항상 주변을 살펴 어느 곳에 도움이 필요한지를 보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의 작은 문제를 한번쯤 벗어나 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이고, 출근한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모시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소 문제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이런 작은 일을 잠시 벗고 자기를 초월해서 진정 아파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찾아 그곳에 가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수백 수천만 명이 넘게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을 일일이 구제하려 한다면 관세음보살의 천수도 모자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주변의 누군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면 세상은 그만큼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보살의 실천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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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능인선원에서 열린 뗀진빨모 스님의 강연에는 5000여명의 대중이 운집했다.
사진=채한기 기자자신에만 몰두하면 타인 잊어자신에게 몰두해 있는 성향은 우리 내면의 깊은 속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뽑으려면 반대급부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50년을 참선해서 갈애의 뿌리가 공한 것임을 깨달아서 뽑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아상이 없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실천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자비심을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땅에서 솟아나오는 샘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른 샘물을 보면 처음엔 자갈과 흙으로 덮여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우리 마음속도 들여다보면 말라버린 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짝 마른 샘 바닥을 조금씩 파가며 돌과 흙을 치워보십시오. 처음보다는 습한 땅이 나타나고 조금씩 더 흙과 돌을 거두다 보면 마침내 어느 순간 물줄기가 올라옵니다. 그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샘물은 예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일단 샘물이 솟으면 그 물로 목을 축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샘물이 처음부터 거기 그대로 존재했듯이 우리 내면에도 자비심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19살 때 어머니께 인도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그래라 얘야. 언제 가겠니?” 어머니는 ‘이렇게 불쌍하고 힘든 나를 두고 가면 어떻게 하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머니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보다는 저의 행복을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인도로 간 이후 10년마다 어머니는 항공 왕복권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오셨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달만 나와 함께 보내지 않겠니?” 어머니는 영국의 제 친구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다음 생에도 내 딸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싶다. 내 딸은 다시 태어나도 특별한 수행의 길을 가려 할 텐데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에게 태어난다면 딸의 삶이 얼마나 힘겹겠는가!” 이것이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자비란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고 완화되고 덜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제 옷에 불이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결석으로 고생 하시던 때입니다. 나일론 원피스에 불이 붙자 저는 위층에 계신 어머니를 부르며 달려갔습니다. 어머니가 황급히 불을 끄시는 동안 저는 기절했습니다. 이 때 저는 천장위로 떠올랐습니다. 그 때 어떤 빛의 존재가 와서는 같이 가자고했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이제 죽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빛의 존재가 가자는 대로 가보고 싶었습니다. 호기심도 있었지만 흉터가 난무한 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고 있을 때 이웃 사람들이 저에게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순간 저는 원래의 제 몸으로 돌아왔고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습니다. 그 때 원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감한 꼬마구나. 많이 아팠을 텐데...” 저는 곧바로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요.” 사실 저는 등이 타고 얼굴 한쪽에 화상을 입었음에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마음은 무한한 힘 있어물론 지금은 상처 하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지난 수년 후 어머니는 제게 당시의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옷에 불이 붙어 윗층으로 달려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졌을 때 어머니는 제가 죽는 줄 알았다 합니다. 그 때 어머니는 기도했습니다. “이 애가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아이의 고통을 모두 제게 주십시오.” 저는 지금도 그 때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바로 어머니의 순수한 마음과 기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힘이란 이렇게 크고 넓은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과 진실된 일심의 기도의 힘은 참으로 무한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말과 마음으로 타인에게 진정한 도움과 혜택을 주는 사람이 진정한 불자입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