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깨달을 수 없다’
남성 위주 사고관일 뿐
다음 생에도 여성으로 태어나
깨달음을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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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서울 불광사에서 ‘여성과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뗀진 빨모 스님은 “여성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며 “남성으로 태어나 깨달음을 얻겠다는 기도 대신 다음 생에도 멋진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정진하겠다는 원력을 세워보라”고 당부했다. 편집자 주부처님 생존 당시에도 여성 아라한은 존재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여성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명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완전한 깨달음, 완전한 성불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금까지 수없이 존재했던 모든 부처님들은 모두 다 남자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전에 보면 보살까지는 갈 수 있으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계의 여성들은 지금도 다음 생에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불성은 남여 초월한 것한번은 제가 티베트 불교 법맥의 종정이라 할 수 있는 고승에게 ‘여성도 불성의 깨달음 이룰 수 있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라마는 “99.9% 가능하지만 0.1%는 남자의 몸이어야 한다”고 답해 다시 제가 “왜 그런가?”라고 물었지만 그 라마는 “경전에 써있을 뿐 나도 한마디로 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남여 관계없이 누구든 성불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를 비롯해 태국이나 미얀마의 스승들은 제게 ‘명상하기에는 여성이 더 적합하다’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외는 있겠지만 여성은 남성에 비해 평화롭고 직감적인데 반해 남성의 경우는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믿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은 명상하라 하면 스승을 믿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지만 남성은 명상하라 해도‘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부터 묻습니다. 다시 말해 지성이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암자나 토굴에서 수행하며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여성 수행자는 역사적으로 많았지만 그들은 글을 쓸 수 없었기에 자신의 깨달음을 전수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모든 역사는 남성들이 기록했고 남성들은 여성의 깨달음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뿐 아니라 여성들의 깨달음에 대한 기록의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한 라마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그 라마가 어렸을 때 어떤 재가여성 수행자를 본적이 있는데 그의 나이가 110세라 했답니다. 이에 라마는 그 여성 수행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해 달라 했고 라마는 그녀의 생생한 수행이야기를 들으며 기록했습니다. 티베트에 공산정권이 들어설 때 그 라마는 티베트를 탈출하면서 그 때 썼던 그 기록을 갖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 재가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3,4명의 여성 수행자와 함께 평생 동안 티베트 일대를 만행하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들은 입적 할 때 육체는 사라져 무지개빛으로 변했고 남은 것은 머리카락과 발톱뿐이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열반 현상을 통해 그들의 수행력이 얼마큼 대단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라마가 그 기록을 하지 않았거나 또는 그 책을 티베트에서 갖고 나오지 않았다면 그 여성 수행자들의 수행 이야기는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불성이란 남성과 여성을 초월한 것이므로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은 같은 심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점이라고는 생식기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생식기관의 구조가 얼마나 다르고 특별해서 남성은 완전한 열반에 이를 수 있고 여성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남성 위주의 기록이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 비구들에게 나무 밑에 앉아 자신의 몸을 관찰해 보라는 수행법을 제시했습니다. 자신의 피부를 벗기고 자신의 배 속에 들어있는 오장을 보며 그 속에 담긴 불순물까지 보아 자신의 육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수행법입니다. 그런데 이 수행법을 제시한 부처님의 의중은 남여 상관없이 자신의 몸을 보아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불교학자들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비구 수행자들은 나무 밑에 가서 여성이 죽어서 썩을 때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불순한 대상이 자신의 몸이 아니라 여성으로 바뀐 것입니다.
미래의 다르마 여성 손에 달려경전에 따르면 여성의 섹스 욕망은 남성보다 8배로 높다고 합니다. 여성은 열정의 온상이라는 겁니다. 여성이 정말 남성보다 그 욕망이 8배로 높을까요? 그렇다면 왜 세계의 강간범은 대부분 남성입니까? 여성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남성의 섹스는 그저 섹스일 뿐입니다. 여성은 섹스 자체보다 사랑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사실 아닙니까? 그럼에도 경전에는 왜 이런 내용이 명시돼 있을까요? 부처님이 정말 여성을 불순한 대상자로 보고 열정의 온상이라고 하셨을까요? 경전은 부처님 말씀이기에 믿고 따라야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에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끔 저는 경전을 여성 비구니 승단이 썼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쨌든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가, 왜 이런 기록을 했는가를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남성이 기록했다는 데 실마리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비구 입장에서 보면 수승한 비구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하는데 있어 여성은 하나의 장애로 인식됐을 것입니다. 남성의 무의식속에 잠재된 여성에 대한 갈망과 함께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존재로 인식된 상황에서 여성은 남성의 수행을 망치는 존재로 부각된 것입니다.
또한 경전이 쓰인 환경을 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성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태어나서는 아버지, 출가해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에 속한 존재였기에 여성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규범에서 벗어나고 싶어 출가를 해 보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성향은 잔재해 있습니다. 제가 있는 동규가찰링에 많은 학인 사미니가 옵니다. 그런데 라다크, 부탄, 네팔 사미니는 출가를 해서도 비구승을 위해 밥을 해주고 빨래해주는 하인 노릇을 합니다. 이 사미니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당연히 그들도 다음 생에는 남성으로 태어나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성으로 태어나야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수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설명>불광사에는 4000여명의 대중이 운집해 뗀진 빨모 스님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사진= 채한기 기자남여공조 한국승가 너무 멋져그러나 현대사회는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고 자율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변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거사님 보다는 보살님들이 훨씬 많습니다만 세계 도처의 불교센터를 가 보아도 헌신적이고 신심 깊은 사람은 대부분 여성입니다. 절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분 대다수도 여성 아닙니까? 한번은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가끔 미래의 다르마는 여성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멋진 세상이 왔습니다. 남성이 앞에 서 있고 여성이 뒤 따라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남여를 불문하고 서로 손잡고 불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비구니들과 재가여성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진실한 수행을 할 때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은 비구·비구니 스님이 잘 공조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좋은 파트너가 되어 승가와 사회를 이루는 한국은 너무도 멋진 나라입니다.
여러분, 여성도 성불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신 여성 불자님들은 이번 생에 행복한 삶을 보내시고 다음 생에도 이생과 같은 멋진 여성의 몸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