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허 스님은 6월13일 해인사에서 1029일 천도법회 12번째 49일을 맞아 ‘천도재의 의미와 공덕’의 주제로 법문했다. 사부대중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법석에서 묘허 스님은 “천도재는 망자만을 위한 의식이 아니다”라며 “선망부모는 물론 자신의 업장도 소멸시켜 가려는 원력을 세워 수행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법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주
행위업 천겁 지나도 소멸 안돼지금의 우리 이 몸은 ‘참나’가 아니기에 본래 내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얻어 쓰고 생활하는 이 몸은 지수화풍으로 구성된 유형색신일 뿐입니다. 현상계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물질은 존재하지 않기에 생자는 필멸합니다. 만날 적에 이미 벌써 헤어짐이 약속돼 있고, 태어나는 순간 죽음은 정해진 것입니다. 본래 자성은 청정하고 여여하다 했는데 왜 우리 목전에 생사가 현존합니까? 우리 중생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도 본래 자성은 망각한 채 이 몸뚱아리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생동안 자성은 뒤로한 채 참나 아닌 이 몸뚱아리의 앞잡이가 되어 이 몸을 행복하게 해주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바로 이 육체를 따라 지은 업으로 인해 육도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업이 윤회의 근본 원인입니다.
이 업은 작위업과 행위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선악은 중생들이 한 생각 일으키는 찰나에 나타납니다. 그 한 생각이 좋은 것이면 복되는 순간이고 못된 생각을 일으키면 악덕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 생각을 마음속으로 결정하면 작위업이고, 마음으로 결정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면 행위업이 되는 것입니다. 작위업과 행위업을 알고 보면 이 세상에서 하는 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다 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생동안 지은 업은 한량없습니다. 그 셀 수 없는 업을 나누어 보면 선업과 악업 그리고 무기업 세 가지입니다. 자신과 상대가 함께 도움이 되는 행위가 선업이고, 자신과 상대에 해를 미치는 것이 악업이고, 자신과 남에게 해도 득도 안 되는 업은 무기업입니다. 이 세 가지 업은 작위업과 행위업에 따라 다시 나눠지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행위업은 그대로 놔두면 천겁 만겁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돌려받는데 선업은 선과로, 악업은 악과로 받습니다. 선업은 악과로 돌아오지 않고, 악업은 선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못된 사람인데 지금 잘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너무 착한 사람인데 저토록 가난하고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 과연 인과가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지금 이 생에서 어떤 업을 통해 먼저 과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지난 업의 과가 먼저 오고, 지금의 업에 대한 과는 후에 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현재 선업을 짓지 않으면 다음 생에서의 복덕은 그만큼 없습니다. 단순히 지금의 재물과 명예 성취에 따른 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헛된 재물에 집착해 선업을 짓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복락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업은 생유와 본유, 그리고 사유와 중유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연 깊은 사람-국토에 윤회어머니 뱃속에 자리할 때인 입태,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뱃속에 있는 동안의 처태, 태어남을 이르는 출태 세 가지를 한마디로 말해 생유라 하고, 태어나서 일생을 사는 동안을 본유라 합니다. 한 평생 살다가 죽으면 사유라 하는데 사유는 왜 존재하는가. 생유가 있었으므로 사유가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죽었으니 다시 살아 돌아옵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다시 이생으로 돌아올 때까지를 바로 중유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유에서 본유로, 그리고 사유에서 중유를 통해 다시 생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에서 사로 가면 돌아가신 것이지만 사에서 다시 생으로 오니 돌아오신 것입니다.
사람에 있어서는 극선자도 극악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죄 안 지은 사람 없고, 아무리 못된 사람도 선업 한 번 안 지은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선업도 악업도 함께 짓습니다. 한 사람의 업은 명부10대왕이 판결합니다.
안이비설신의가 각각 지은 업은 각각의 명부왕으로부터 7일간의 시일을 거쳐 판결을 받습니다. 마지막 49일째는 총체적인 판결을 내립니다. 판결을 받으면 인간으로 태어날 영은 다시 인연 있는 부모를 통해 새 몸을 받는 데 이것이 중유에서 생유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초재를 시작으로 49재를 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부모가 모두 이 생에서 선업만 쌓았다고 자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을 떠난 영이 당장 선업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행업은 천만겁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후손이 천도재를 통해 조상의 악업을 소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럼 천도재는 한 번만 하지 왜 여러 번 합니까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조상이 49일만에 판결이 나 중유를 마치고 생유로 전환할 수 있지만 명부8대왕부터 10대왕의 판결까지도 기다려야 할 영이 있습니다. 또한 삼악도에 떨어진 조상의 영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영들은 업이 너무 두터워서 그러한 것이니 후손인 입장에서 정성을 더 들인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중유에서 생유로 탈바꿈할 때 사람은 인연있는 국토와 인연있는 부모의 몸에 의지해 태어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영위한 땅과 자신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과의 인연을 통해 생유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조상은 자신의 후손이며, 자신의 후손은 곧 우리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결국 조상을 위한 천도재가 아니라 우리가 조상으로 있을 때 지은 업을 지금 우리 자신이 푸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육체도 없는 영가를 위해 왜 시식을 올리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일단 중음신께 올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중유에서 생유로 전환하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을 위한 의미도 있습니다. 무주고혼의 천도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명을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명횡사한 사람은 남은 수명만큼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간혹 그러한 영은 몸과 정신이 허약한 사람에게 붙어 지내기도 합니다. 해인사와 같은 유서 깊은 산사에서 이렇게 영가 천도를 할 때 그러한 영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천도재를 할 때 영가 법문을 하지 않습니까? 영가는 귀가 없기 때문에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소리는 듣지 못하나 그 뜻은 새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가 법문을 하는 당사자는 염불을 하되 그 뜻을 깊이 새겨가며 해야 합니다. 혹 영가법문 하시는 분이 염불 곡조에 너무 신경을 써 미쳐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수도 있으므로 증명법사가 필요합니다. 증명법사는 영가법문의 뜻을 관해 전해야 합니다. 이 때 영가가 그 뜻을 새겨 생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 영가도 천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도재를 올린 불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영가에게도 큰 복덕을 지은 것이고 그 선업은 후에 선과로 돌아옵니다.
수행정진 하며 선업 쌓아야이제 천도재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도재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천도재는 망자만을 위한 의식이 아닙니다. 자신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천도재만 해 놓고 내 인생 잘 될 터이니 아무 노력도 않으면 소용 없습니다. 천도재 의미를 아신 여러분들은 업과 윤회가 어떤 연관이 있는 지 잘 아실 것입니다. 천도재는 조상과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과 다음 생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선업을 짓지 아니하면 다음에 복덕이 없는 줄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착하게 살겠다는 의식만으로는 모자랍니다. 선업행을 지어야 합니다. 부처님 법에 의지해 수행 하며 이 한평생을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선업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지 않고 어떻게 선업행을 지어갈 수 있겠습니까?
천도재를 올리면서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해인사=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묘허 스님은1957년 상주 남장사에서 한산당 화엄 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1963년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성암 강백화상 밑에서 대교이력 및 전등록을 이수하고 이후 제방에서 정진했다. 1975년 은해사 말사 법주사 주지, 1979년 대전 신탄진 신흥사 주지를 역임하고 현재 대전 신흥사, 김해 원명사, 단양 방곡사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