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은 중국 남악 회양 ·마조도일· 서당지장의 법을
이어 받은 홍척국사(洪陟國師)가 신라 흥덕왕 3년(828)에 구산 선문
(九山禪門)의 최초 가람인 실상사(實相寺)를 개창한 이래
원효(元曉)) · 보조(普照) · 서산(西山) · 사명(泗溟)대사를 거쳐
근대에 이르러서는 경허(鏡虛 · 1849∼1912) 스님으로 이어진다.
근대 선(禪)의 중흥조 경허 스님을 정점으로 그의 뒤를 이어
만공(滿空)·한암(漢岩)·용성(龍城)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이
오늘날 우리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각 산문(山門)의 선맥을 일군
거봉들이며 경허문하는 아니지만 동시대의 선지식으로
만암(曼庵)·구하(九河) 스님 등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근대 禪宗의 중흥조 鏡虛 대선사
그 뒤를 이어 효봉(曉峰) · 동산(東山) · 금오(金烏) · 청담(靑潭) ·
경산(慶山) 스님 등은 지난 54년 비구─대처 간의 ‘정화운동’의
선봉이자 한국불교 중흥의 밑거름이 됐던 선사들이다.
그러나 경허 스님을 한국 근대 선맥의 중흥조로 일컫는 데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계율을 무시한 그의 파격적인 기행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근대 선의 중흥조로 추앙되는 것은
그의 ‘파격’의 의미를 범속한 지식이나 계율의 잣대로는 잴 수 없다는
이유 말고도 그 문하(門下)에서 걸출한 선승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불맥은 오늘까지 한국불교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되고 있다.
만공 스님(1871∼1946)은 경허의 가풍을 토대로 독창적인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깨달음의 과정을 ‘나’(我)를 찾는 일로 여긴 그는 ‘나에 대한 깨달음은
어떤 개인의 지혜로 끝나서는 안되고 반드시 다른 사람을 구하는
자비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공의 법력에서 나오는 대담하고 직선적인 성품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조선총독의 주재 하에 31개 본사주지회의가 열린 석상에서 그는
조선 승려를 대처로 만든 당신은 그 업장이 너무 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향해 일갈을 퍼부은 일화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만공 스님은 현재 한국불교의 가장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덕숭(德崇)문중의 비조(鼻祖)다.
법제자로는 전강(田岡) 스님이 유명하며 특히 수제자
보월(寶月) 스님 문하에서 다시 금오 스님이 배출됐다.
금오 스님은 54년 정화운동이 일자 하산해 동산·청담 스님과 함께
불교 정화를 이끌었다.
금오 스님의 법은 지난해 10월에 입적한 월산(月山) 스님을 비롯해
월주(月珠·조계종 총무원장)·월태(月太·전 불국사 주지)·월탄(月誕·
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월서(月棲)·혜정(慧淨·전 총무원장) 등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잇고 있다.
한암 스님(1876∼1951)은 같은 경허 문하생이면서도 만공과는 또다른
가풍을 보였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이론과 수행체계를 그대로 이어 받아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선 수행을 강조했다.
한암은 선사이면서 교학(敎學)에도 많은 열의를 쏟았다.
따라서 그의 문하에서 유불선(儒佛仙)의 경전을 관통,
선이라는 그릇에 용해시킨 탄허(呑虛) 스님과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관응(觀應·직지사 조실) 스님이 배출됐다.
청담(靑潭·조계종 2대 종정) 스님도 한암 스님의 법제자다.
3·1운동 당시 33인 중 한명으로 잘 알려진 용성 스님(1864∼1940)
은 만공 스님과 더불어 선종(禪宗)을 부흥시키는데 심혈을 쏟았다.
깨달음을 바탕으로 불교의 대중화라는 미명으로 이뤄지는 세속화 내지
왜색화를 배격하는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 용성 스님 문하에서는 조계종 종정이 3명이나 배출됐다.
문하생인 동산스님이 통합종단 이전의 조선불교 3·5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후 통합종단 3대 종정으로 추대된 고암(古庵) 스님은 종정을 세번
(4대·직무대행) 역임했고 성철 스님도 두번 역임했다.
宗正들의 면면과 일화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이 총독부에 등록되고 첫 종정으로 추대된
스님은 한암 스님이었다.
당시 종명(宗名)은 일제가 ‘조선 불교’라고 명명한데 대해 만해 스님을
비롯한 항일 스님들이 조계종이란 종명을 주장해 양쪽 주장을 합쳐
붙여진 이름이다.
그로부터 4년 뒤 해방을 맞았다.
한국불교는 해방을 맞아 같은해 9월 서울 태고사(太古寺)에서
전국 승려대표회의를 열고 한암 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했다.
한암 스님이 입적한 후 한영(漢永) 스님이 뒤를 이었고
한영 스님마저 48년 4월 입적하자 만암(曼庵) 스님이 그 뒤를 이었다.
철저한 계율을 중시하는 고불회라는 승려 단체를 이끌고 있던 만암
스님은 계행(戒行)이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엄격한 스님이었다.
만암 스님은 종정으로 취임한 후 종명을 조계종으로 바꾸고
교정(敎正)을 종정으로 바꾸었다. 만암 스님은 재직 중 수행승과 교화승을
구분하고 수도와 교리연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일제하에서 흐트러졌던
불교 정화의 기틀을 다졌으나 종조(宗祖)논쟁이 일자 비구승 일반이
주장하는 보조국사(普照國師) 대신 보우(普愚)를 주장하다
종정직을 그만두고 대처승쪽에 가담했다.
그후 동산 스님이 종정에 추대되고 잠시 석우(石愚) 스님에 넘어 갔다가
58년 다시 동산 스님이 종정자리에 재추대되었다.
이 무렵 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은 절에서 물러가라”는
유시를 시발로 전국에서 비구승과 대처승의 교권분쟁이 일어났다.
조계종에서는 이를 정화불사(淨化佛事)라고 한다.
그 결과 61년 대한불교조계종이 탄생했다.
조계종은 초대 종정에 효봉 스님을 추대했다.
효봉 스님은 1888년 평양 태생으로 일찍이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에서 법학을 전공, 36세까지 10년 동안 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판사 재직시 어느 죄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순간
그 사형수의 절망적인 눈빛과 마주친 후 법관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엿목판을 지고 전국을 떠돌다
금강산 보운암에 들어가 석두화상(石頭和尙)을 만나 득도했다.
그는 늦깎이 출가라는 자각 때문에 뼈를 깎는 수행 끝에 45세 되던 해
오도(悟道)의 경지에 들었음을 스승으로부터 인가받았다.
66년 10월 밀양 표충사에서 입적했다.
효봉의 뒤를 이어 2세 종정으로 오른 청담 스님은 진주농고를 졸업하고
부모의 강권으로 결혼했으나 곧바로 출가했다.
청담 스님은 71년 11월15일 입적했다.
청담 스님에 이어 종정에 오른 고암 스님은 1899년 경기도 파주 생.
17세 때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다 2년 뒤 합천 해인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 역시 부모의 간청으로 조혼한 아내를 두고 출가했는데
그 아내가 수소문 끝에 남편이 승려가 되었음을 알고 뒤따라
머리를 깎았다.
그후 고암은 아내를 종종 찾아 “중노릇 잘하라”며 다독거려 주곤 했고
말년에는 큰 불사 때 서울 조계사에서 마주치면 “할망구 많이 늙었구나”
“영감태기 당신 늙은 건 모르나 보지”하며 정담을 주고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서옹(西翁) 스님은 74년 제5대 종정에 취임했다.
충남 논산 출신인 서옹 스님은 만 20세가 되던 해인 32년 만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으면서 불문(佛門)에 귀의했다.
81년 7대 종정으로 추대된 성철 스님은 바로 동산 스님의 법제자다.
성철 스님도 속가에 딸을 남겼는데 청담 스님 부녀처럼
딸도 아버지를 따라 출가, 선맥을 이었다.
성철 스님은 대구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쳐놓고 7년 동안 두문불출
하면서 정진했는데
그 딸도 아버지를 따라 출가했다. 바로 불필(不必) 스님이다.
5대 총림의 가르침과 가풍
성철 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문은 80년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스님은 또 누구든지 부처님 앞에 3천배를 먼저 해야 만나 주는
‘기행’으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오기도 했다.
91년 성철 스님에 이어 서암(西庵) 스님이 취임했고 94년부터
현 월하(月下) 종정이 그 뒤를 이었다.
역사를 육안(肉眼)으로만 보면 이 나라가 세종대왕·이순신 장군·
김구 선생 같은 분들에 의해서만 지켜지고 오늘에 이른 것 같지만
어느 시대고간에 생사를 걸고 국태민안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게 마련이다. 억겁의 무명(無明)을 헤치고 진리를 체득하려는
도인이 있어 그 원력(願力)과 법력(法力)을 통해 나라가 유지되어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도 중생이 잠들어 있을 때 용맹정진으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법력이 전국 심산도처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해
그 빛이 민족의 명운을 인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발광체들이 바로 일생을 화두(話頭) 하나를 붙들고 진리를 참구한
원로 선사들일 것이다.
선종인 조계종은 통도사·해인사·송광사·백양사·수덕사에 총림(叢林)
을 두고 그 산하에 선원을 유지하고 있다.
그 선원의 방장, 혹은 조실로 선객들을 지도하고 있는원로 스님은
혜암(慧庵 · 원로회의 의장) · 원담(圓潭· 부의장)· 벽암(碧巖· 부의장)·
법전(法傳· 해인사 방장) · 보성(普成·송광사 방장) · 운경(雲鏡 ·
봉선사 조실) · 고송(古松 · 파계사 조실) · 비룡(飛龍·월정사 조실) ·
응담(應潭 · 수덕사 조실) · 석주(昔珠 · 칠보사 조실) · 청하(淸霞 ·
통도사 조실)· 일타(日陀 · 해인사 조실) ·성수(性壽 · 전 총무원장) ·
탄성(呑星 · 공림사 조실) · 정영(瀞暎 · 갑사 조실)· 숭산(崇山 ·
화계사 조실) · 녹원(綠園 · 직지사 주지) 스님 등이다.
따라서 이들의 출가시절 이야기, 그리고 수행담은 지적 호기심 차원을 넘어
‘나’와 ‘내 가족’밖에 모르고 살아온 속세의 사람들에겐 신선한 자극이다.
고봉(古峯) 선사의 맥을 이은 숭산 스님은 일찍이 미국·캐나다를 비롯해
구 소련에까지 한국불교의 선풍(禪風)을 일으켜 동토를 녹였다.
현재 숭산 스님이 설립한 해외선원은 30개국에 1백60개소,
이곳을 통해 수백명의 눈푸른 납자들이 배출돼 한치 앞이 안보이는
경제전쟁시대에도 해외 포교를 통해 정신적 등불이 되고 있다.
백양사 고불총림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서옹 스님은 책 한권이 인연이 되어 수도승이 되었다.
스님이 양정고보에 다닐 무렵 모친과 조부를 차례로 여의었다.
마침 그때 간디 자서전이 많은 위안을 주었는데 그 책 속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인으로 부처님을 소개한 것을 읽고 그렇게 훌륭한
간디가 성인으로 꼽는 부처님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불교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인생의 진리가 여기에 다
들어 있구나’ 생각하고의사가 되고자 했던 생각을 바꾸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의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1학년 여름방학 때 기어코 백양사로 만암 스님을 찾아가
머리를 깎았다. 만암 스님은 불교가 발생한 인도 서천에서 불교적
생활을 하는 늙은이라는 의미의 상징으로
서옹(西翁)이라는 법명을 붙여 주었다.
이 일을 두고 스님은 “제 때에 발심(發心)해서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
인생의 큰 복을 받은 셈”이라고 일생을 두고 다행으로 여긴다.
스님은 백양사에서 2년여 동안 공부하다 오대산에 가서 방한암 스님
밑에서 다시 참선을 했다.
그후 스님은 만암 스님을 졸라 일본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임제대학에서 만난 스승이 구송 스님. 구송 스님은 선철학(禪哲學)의
세계적 권위자로 거기서 스님은 구송 스님의 ‘참사람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여기서 잠시 스님의 ‘참사람론’을 들어보자.
“인간은 감각이 있고 감각을 지배하는 이성이 있고 이성보다 더 깊은
영성이 있어요. 요즈음 강조되는 휴머니즘 즉 이성을 지배하는
영성자리에 살자는 것이 참사람 사상입니다.
영성의 자리에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되어
너와 나, 나와 그가 남이 아니고 한 생명으로 연기(緣起)되어 있어요.
그 참사람으로 살 때 참자유, 참평화가 옵니다.”
1912년 충남 논산 출생. 74∼79년 조계종 종정,
96년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에 올랐다.
통도사 영축총림
방장 월하 종정은 충남 부여 태생이다.
스님이 스스로 동진출가(童眞出家)한 걸로 보아 부처님과 보통 인연이
아닌 듯, 불가에서는 이런 경우를 두고 전생에 승려로 살다가 환생한
것으로 해석한다.
출가 후 부모들은 세번이나 스님을 붙들어 갔으나 그때마다 하룻밤
자고는 도망치듯 나와 버리자 그후로는 데리러 오지 않았고 그 길로
속가와는 영영 인연이 끊겼다고 한다.
그후 차례로 부모님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데리러 올
사람도 없구나’하면서 한편으로는 허전하고 한편으론 ‘한가지 근심은
덜었다’는 안도감이 들더라는 스님의 술회를 들어보면 확실히 태어날
때부터 선승으로 점지되었다는 감이 든다.
스님의 은사는 구하 스님이다. 은사스님 말씀이라면 곧 부처님
말씀으로 믿던 시절, 구하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고 대중에
지탄받지 않게 수행하라”는지극히 평범한 가르침을 주셨고 그 가르침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점에 있어서 스님은 승속간에 요즈음의 세태에 대해서 염려가 크다.
수행력이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수행의 근본이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자아를 닦은 끝에 대자유를
얻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스님은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상대방, 특히 아랫사람에게
까다롭지는 않다.
스님은 또 “생일의 공덕은 부모님 몫인데, 자기 생일을 스스로 거창하게
챙기는 것은 꼴불견”이라며 승속간에 예사가 돼버린 생일잔치를 질책한다.
그래서 스님 스스로는 상좌들이 생일상 차리는 것을 피해 다니다가
요즈음은 그것이 도리어 번거로워 그럭저럭 받고 있다고 한다.
40년 통도사에서 득도. 93년 조계종 종정 추대됐다.
해인사 해인총림
방장은 법전(法傳) 스님이다.
해인사 원당암에 주석하고 있는 원로회의 의장 혜암 스님은 94년
조계종이 총무원장 한 사람의 전횡으로 분규에 휩싸이자 소장 승려들을
앞세우고 개혁불사를 진두지휘한 스님이다.
불가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스님되는 것도 몇생
전부터 닦은 인연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출가할 사람은 처음부터 뭔가 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스님도 어릴적부터 ‘사람의 눈은 왜 두개가 앞에 있는가’
라며 다른 아이들 같으면 무심코 넘어갈 일들을 무척 궁금해 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화두를 튼 셈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궁금증이 발전해
마침내 일본으로 가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스님은
서옹 스님을 만난다.
서옹 스님은 그에게 금강경 한권과 ‘참선을 하라’는 말씀을 얻은 뒤
귀국한다. 그때가 25세. 나이가 나이인지라 출가에는 결혼문제가
제일 먼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이 그 덫을 피해 출가에 이르는 데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일본에서 돌아오자 부모님께서 결혼독촉이 이만저만이 아니셔요.
거역할 수 없어 두번 선을 봤지요. 세번째는 할 수 없이 결심을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결혼한 다음에 출가하면 안되겠느냐’고
간곡하게 매달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지요. ‘비구승하고 결혼할
사람 있으면 하겠다’고요. 그랬더니 노친네들이 비구승한테 시집올
여자를 찾고 다녔던 모양이에요.
백양사 근처에서 ‘그런 여자가 있으니 총각을 데려오라’고 어떤 스님의
말을 듣고는 귀가 번쩍 트이셨겠지요. 저를 데리고 그곳으로 가셨어요.
그 길로 해인사로 보내졌지요.”
견성(見性)도 어렵지만 출가도 그렇게 쉬운 건 아니다.
일본식으로 하이칼라를 한 겉모양 때문인지 대중공사를 세번이나 한 끝에
‘중노릇 할 위인이 아니다’라며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중노릇 할 위인이 아니다’라는 그들의 선입견은 잘못 본 것이었다.
스님은 나뭇간에서 새우잠을 자며 하루 한끼만 얻어 먹고 물 긷고
나무하면서 집념을 보였다.
그러기를 1주일쯤 지났을 때 서옹 스님을 다시 만나 출가의 길을 열었다.
스님은 40년 넘게 장좌불와를 해오고 있다.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절, “1주일만에 도 깨치겠다”
고 토굴을 찾아 들어가 참선한 것이 한주한주 쌓여 어언 40년을 넘겼다는
것이다. 스님의 장좌불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송광사 조계총림
송광사는 종조 보조국사를 비롯 열여섯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다.
송광사는 지난 69년 하안거 때 해인사에 이어 두번째로 총림을 설치했다.
초대 주지인 취봉 대선사가 송광사를 정화하면서 대중들에게
“비구 기준에 맞게 수행하자”며
총림을 설립하고 구산(九山) 스님을 초대 방장으로 초빙했다.
구산 스님이 83년 12월에 열반, 그 뒤를 이어 일각 스님이
방장에 추대됐다.
일각 스님이 96년 6월에 열반하자 현재의 보성 스님이
5대 방장에 추대됐다.
보성 스님은 “자리가 비어 있으면 안되므로 이름을 빌려 주었을 뿐”
불교는 학문이 아니고 오로지 수행으로 자득(自得)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신상에 관한 것이나 출가 후 행장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1928년 경북 성주 출생. 45년 해인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 후 73년부터 송광사 주지를 역임했다.
수덕사 덕숭총림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스님과의 인연 덕택에 선본사찰로 꼽힌다.
89년 덕숭총림 방장으로 추대, 오늘에 이른 원담 스님은
만공 스님과의 조우가 평생 면벽참선의 길로 접어들게 된 동기다.
첫눈에 법기(法器)를 보았음인지 만공 스님은 12세 꼬마에게
화두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모님을 따라 절에 놀러 왔습니다. 머리가 하얀 스님께 인사를 했지요.
‘어디서 왔느냐’‘충남 서천에서 왔습니다’
‘서천의 고향은 어디냐’‘역시 서천입니다’
스님은 껄껄 웃으시더니 ‘내가 묻는 것은 네 몸뚱이의 고향이 아니라
네 마음의 고향이니라’하셔요.
그 말씀에 대답을 못하고 지금까지 화두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참선이란 생사를 건 자기와의 싸움으로 마음을 일으키는 동기가 어지간해
가지고는 도중에 해이해져 버리기 십상이다.
스님이 일생을 화두 하나 붙들고 씨름한 얘기는 전설처럼 들린다.
“5년을 행자 생활하면서 노스님들이 선문답을 나누면 부엌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것으로 공부를 대신했어요.
그러다가 참선을 시작했는데 스승 만공은 선사가 글 읽는 것을 무척
경계하는 스님이었습니다.
어느날은 누가 부처님 일대기를 적은 ‘팔상록’을 주기에 읽다가
스승께 들켰어요. 아차 싶어서 엎드려 빌었더니 ‘강아지가 성불했으면
했지 네놈은 못한다. 차라리 염불을 배워서 선업이나 쌓아라’하시면서
벼락같은 호통을 치시는 겁니다.
그때 나는 ‘성불 못할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 기왕 죽을 바에는 해보고
죽자고 작심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 한눈 팔아본 일 없어요.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원담 스님은 경허의 선맥을 이어 받았다고 일컫는다.
그가 통도사 방장으로 있던 경봉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장면은 이렇다.
“통도사 극락암으로 경봉 스님을 찾아 뵈었지요.
스님께서 ‘어디서 왔는고’ 하시길래 ‘덕숭산에서 왔습니다’‘
스승은 누구신고’‘송만공입니다’‘
만공께서 무슨 법을 보여 주었는고’ 하시기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높이 쳐들며 ‘이것을 뵈어 주리다.
스님께서도 이것이 있습니까’ 했더니 허허 웃으시며
옆에 앉으라고 하시더군요.”
27년 충남 서천 출생. 33년 출가해 70년 수덕사 주지,
89년 덕숭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조계종 어떻게 이뤄져 있나
대한불교조계종은 신라 헌덕왕조 도의(道義)국사를 종조(宗祖)로 한다.
조계종은 5교 9산이 통합된 것이다.
고려말 태고(太古) 국사가 여러 종파를 포할(包轄),
조계(曹溪) 단일종으로 칭했다.
1941년 북한산 태고사를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으로 옮기고
조선불교의 총본산으로 삼았다.
그뒤 조선불교조계종으로 개칭했다가 해방과 함께 다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바꾸었다.
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유시를 발표
하면서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됐다.
‘대처파’와 ‘비구파’의 싸움이다.
비구파는 당시 총무원이던 태고사를 점령해 ‘조계사’로 개명한 뒤
오늘에 이른다.
62년 다시 비구─대처가 합쳐 통합종단이 운영됐지만 얼마가지 않아
조계종에서 태고종이 분리됐다.
조계종은 현재 전국의 24개의 사찰을 본사로 하여 그 밑에는
2천5백여개의 크고 작은 말사가 있다.
절의 책임자인 주지 위에 절의 최고 어른을 가리키는 방장·조실이 있다.
방장은 총림의 최고책임자다.
총림이란 불교계의 3대 교육기관인 강원과 선원·율원(염불당)을
모두 갖추고 있는 큰 사찰이다.
강원은 불경을 집중적으로 수학·선수하는 곳이고,
선원은 선을 닦고 선어록을 공부하는 곳,
율원은 불교의 계율을 전문적으로 학습하는 곳이다.
총림은 원래 ‘많은 비구가 한곳에 화합하여 마치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것과 같다’는 뜻의 범어 ‘vindhyavana’에서
나왔으며 우리나라에는 해인사 · 송광사 · 통도사 · 수덕사 · 백양사
의 5개 사찰이 해당한다.
해인사는 해인총림, 송광사는 조계총림, 통도사는 영축총림,
수덕사는 덕숭총림, 백양사는 고불총림이다.
총림의 최고 어른인 방장은 스님들 가운데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현재 종정인 월하(月下) 스님도 통도사의 방장이다.
이에 비해 조실은 각 선방(66군데)의 정신적 최고 어른을 일컫는다.
예컨대 방장이 종합대 총장이라면 조실은 단과대의 학장격이다.
24개 본사와 2천5백여개 말사 위에는 이를 총괄하는 종단 집행부인
총무원(총무원장 月珠)이 있고
그 위에 불교계의 정신적 지주인 종정이 있다.
국가에 비교한다면 종정과 총무원장은
내각책임제 하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여기에 총무원의 기능이 마비됐을 때 종단 집행을 대신할 수 있는
원로회의(23명)와 중앙종회(의장 설정(雪靖)·의원 81명)가 있다.
김재성 <서울신문 출판국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