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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불교성지> 관음나한성지

淸潭 2006. 9. 17. 20:47

불교성지 관음 나한 성지

(사찰 명 위에서 클릭하면 사찰 별 자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5대 관음나한성지    
두타산 삼화사(三和寺)-관음암 (033)534-8313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176번지
설악산 오세암(五歲庵) (033)462-2576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72번지
성덕산 관음사(觀音寺) (061)362-4433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2번지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061)432-4974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번지
금오산 향일암(向日庵) (061)644-4742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산 7번지 

 

(1) 동해 두타산 관음암

두타(頭陀)라는 말은 원래 범어 ‘dhuta’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으로써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듯 동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두타승(頭陀僧)처럼 엄격히 느껴지는 이 산에 있다. 삼화사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50분쯤 올라가면 관음암이 자리하고 있다.

관음암의 원래 이름은 지조암(指祖庵)이었다고 한다. 921년(고려 태조 4)에 창건되었으며 항간에는 용비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하나 용비(龍飛)는 임금이 등극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잘못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관음암의 중건은 왕실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934년(태조 20) 태조 왕건은 통일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공암(三公庵)을 삼화사(三和寺)로 이름을 바꾸면서 삼화사에 노비와 사전(寺田)을 하사하였다. 삼화사는 이를 발판으로 산내에 8개의 암자를 창건하는 등 급격히 사세가 신장하였는데, 이 때 관음암도 중건된 것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 불탄 것을 당시 삼척부사였던 윤청이 주선해 중건했다. 현재 남아 있는 삼화사의 유일한 산내 암자이다.

관음암은 작은 관음상을 모시고 있는데 예로부터 그 영험함이 소문나 동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지금도 사시사철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1959년 이 암자를 중건하면서 아예 이름도 관음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관음암에 얽힌 영함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아랫마을에 심(沈)씨 성을 가진 총각이 늙고 병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심총각은 얼굴도 잘 생기고 마음씨도 착했으나 나이 서른이 다되도록 결혼을 못해 노총각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심총각이 장가를 못 든 것은 집안이 가난해 아무도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총각은 삼화사 뒤 두타산과 청옥산에 약초를 캐서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약초를 캐로 갈 때면 늘 산중의 작은 암자 앞을 지나갔다. 이 암자에는 스님 한 분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심총각은 매일 같이 암자 앞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님의 염불소리를 조금씩 흉내내게 되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다가도 문득 목탁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어느날 심총각은 약초를 캐고 내려오는 길에 기도하는 스님한테 불쑥 물었다.

“스님, 관세음보살한테 기도를 하면 정말로 소원이 성취됩니까?”

스님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백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행도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내가 자네 소원을 성취하게 애주겠네”

“스님,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약속했습니다.”

총각은 그날부터 산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법당에 들려 관세음보살 앞에 세 번 절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며 기도를 했다. 어느날 정심을 싸 가지고 간 강냉이를 관세음보살 앞에 공양으로 올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에는 산나물을 뜯어 관세음보살 앞에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석 달 가까이 하다 보니 비록 말 없는 불상이지만 친숙함이 느껴졌다.

어느덧 백일이 다 되가던 어느 날 심총각은 산으로 들어가다가 암자에서 큰 비를 만났다. 총각은 약초를 캐러 갈 수도 없고, 다시 내려 갈 수도 없어서 법당 추녀 밑에 앉아 비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 무료해져서 맨땅에 줄을 그어 놓고 혼자서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서 두는 꼬니라 재미가 없었다. 총각은 문득 법당의 관세음보살을 바라보았다. 관세음보살은 입가에 미소를 보일락 말락 총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각이 관세음보살에게 말을 걸었다.

“관세음보살님, 저하고 꼬니 한판 두시렵니까?”

관세음보살이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총각은 혼자말로 다시 말했다.

“우리 내기를 합시다. 내가 이기면 보살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시고, 보살님이 이기면 내가 보살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지요. 제 소원은 예쁜 색시를 얻어 장가를 드는 것이니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보살님은 무엇이 소원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말씀해주세요. 꼬니는 세 판을 두어서 두 판을 먼저 이기면 승부가 나는 것으로 합시다.”

총각은 혼자말로 약속을 하고는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자기가 한 수를 두면 다음 수는 관세음보살의 수를 대신 두고, 그 다음은 다시 자기가 두곤했다. 첫 판은 총각이 이겼다. 둘째 판은 관세음보살이 이겼다. 셋째 판은 막상막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선수는 관세음보살이 잡고 있었다. 장고를 하던 관세음보살이 드디어 결정적인 한 수를 두었다. 승부가 나는 수였다. 심총각은 한수 물리자고 억지를 부렸다. 관세음보살은 묵묵부답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총각은 벌떡 일어나 법당의 관세음보살한테 절을 세 번 하고 절값으로 한 수를 물리겠다고 했다. 심총각은 얼른 한 수를 물리고 다시 두자 이번엔 보살이 지고 총각이 이겼다. 총각은 찬을 쓸어 버리며 관세음보살에게 말했다.

“보살님,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제 소원이 무엇인지 아시죠? 예쁜 색시한테 장가보내 주시는 겁니다.”

총각은 관세음보살님한테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 사이 비는 그치고 저녁노을이 들기 시작했다. 총각은 기분좋게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그날 밤 총각은 꿈을 꾸었다.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 총각에게 말했다.

“나는 지조암에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오늘 너하고 꼬니를 두어서 졌으니 약속대로 예쁜 색시를 얻어 주겠다. 내일 약초를 가지고 장에 나가면 어떤 처녀가 약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 처녀에게 약을 팔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꿈을 깨니 벌써 아침이었다. 총각은 약초를 들고 장에 나가 전을 펴고 앉았다. 조금 있으려니 처녀가 약을 사러 왔다.

“이 약이 두타산에서 캐온 것인가요? 지금 저희 아버지께서 몹시 위중하신데 이 약을 달여 억으면 나을 수 있답니다. 저에게 이 약을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처녀는 약을 외상으로 달라고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돈을 가지고 오지 못했으나 반드시 갚겠다며 막무가내로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심총각은 할 수 없이 얼굴도 모르는 처녀에게 약을 외상으로 팔았다.

“나도 늙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처지요. 사정이 그러하다니 약초를 외상으로 드리겠소. 그 대신 이 약을 드시고 아버님이 낫거든 꼭 찾아와 약값을 갚으시오.”

총각은 처녀에게 약을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며칠이 지났다. 날이 어둑어둑 지는데 문밖에서 사람 찾는 소리가 났다. 총각이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며칠 전 장에서 만난 처녀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죽을 사람에게 약을 공짜로 준 총각을 치하하며 약값을 갚으러 왔다며 약값을 물었다.

“약 값이 좀 비쌉니다. 노인장의 딸을 저에게 주시면 약값으로 받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노인은 약간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러나 심총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몸도 건강하고 마음씨도 착해 보였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혼인을 승낙했다. 이리하여 심총각은 드디어 장가를 들게 됐다.

드디어 꿈같은 첫날밤, 심총각은 아내의 옷고름을 풀며 지나간 세월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지조암 관세음보살하고 꼬니를 둔 얘기며, 그날 밤에 꾼 꿈 얘기를 털어 놓았다. 남편의 얘기를 들은 아내도 비슷한 사연을 털어 놓았다.

“사실은 저도 지조암 관세음보살님한테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했지요. 기도가 끝나던 말 꿈을 꾸었는데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장에 가보라고 해서 간 것입니다.”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무엇인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날리 밝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절을 찾았다. 법당에 들어가서 세 번 절을 하고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살펴보니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난 귀부인의 얼굴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지조암 관세음보살 앞에 무수히 절을 하며 소원을 이루게 해준 것에 감사했다.

그 후부터 이 암자에는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여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2) 인제 설악산 오세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만경대 아래에 있는 오세암(五歲庵)은 백담사의 산내 암자이다. 백담사에서 약 10㎞ 지점, 영시암을 거쳐 마등령 고개 길로 가노라면 오세암이 있다. 뒤로는 관음봉이 병풍처럼 외호하고 오른쪽에는 만경대가 굽어보고 있다. 앞으로는 용아장성릉이 삿된 기운을 막는 듯 오세암을 안고 있다.

오세암이 창건 된 것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 자장 율사에 의해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장 율사가 절을 창건하고 관음보살이 언제나 상주하는 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觀音庵)이라 부른 것이 오세암의 시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도 1445년(조선 세조 1) 여기서 출가했다. 이후 오세암은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스님에 의해 크게 중건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금강산에서 수도하다가 불교중흥의 큰 뜻을 품고 이곳에서 기도하던 보우 스님이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고 난 직후 암자를 중건한 것이다.

그 뒤 1643년(조선 인조 21)에 설정(雪淨) 스님이 중수한 다음부터 암자 이름이 오세암으로 바뀌고, 5세 동자와 연관된 유명한 관음 영험 설화도 이 때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설정 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데려다 암자에서 키우고 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된 10월의 어느 날, 스님은 월동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 조카를 위하여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 스님은 아이에게 신신당부 하였다.

“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스님은 절을 떠나 장을 본 뒤 신흥사에 다다랐다. 다음날 돌아가려고 일찍 잠을 자고 일어나니 눈이 엄청나게 쌓여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눈은 그 뒤에도 간간히 내려 계속 쌓였다. 눈 높이에 비례해 스님의 속도 점점 시커멓게 타갔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혼자 남겨둔 조카가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만이 화두처럼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허나 길이 막혔으니 어찌하랴.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만 드렸다. 억지로 가려고 하니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말렸다. 죽을 게 뻔한데 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무정한 시간은 그 사이에도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눈도 거의 녹았다. 서둘러 걸망을 챙긴 스님은 나는 듯이 달려 암자에 들어섰다. 달려가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스님은 정신없이 아이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리고 한참 후 까닭을 물었다.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 그 때 갑자기 환한 백의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감격한 설정 스님은 다섯 살의 동자가 관음보살의 가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

이렇게 하여 다시 태어난 오세암은 이후 영험있는 기도도량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865년(고종 2) 남호(南湖) 스님은 해인사 대장경 2질을 인출하여 한 질은 오대산 사원사에, 한 질은 오세암에 봉안하였다. 1898년에는 인공(印空) 스님의 주도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도량이 되어 무려 18년 동안이나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외에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사격을 일신했던 오세암은 한국전쟁 때 거의 모든 당우(堂宇)가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 1992년 지우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백의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산신각, 요사채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세암은 관음 기도도량이기도 하지만 김시습으로 널리 알려진 설잠(雪岑)과 만해 한용운 스님이 거(居)했던 곳이기도 하다. 영험이 가득한 오세암은 영험이 가득한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3) 곡성 성덕산 관음사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기슭에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금랑각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관음사는 백제 분서왕 때인 308년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樂安浦)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 원랑(元良)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소년 시절 실수로 눈이 멀고 말았다. 눈은 멀었으나 행실이 정직하고 기개가 고상하여 인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런 그가 결혼을 하고 그 후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던 원량에게 불행이 닥쳤다. 성품이 현숙하고 바느질과 품팔이로 앞 못보는 자신을 봉양하던 부인이 그만 산고(産苦) 끝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딸 홍장(洪莊)을 젖동냥으로 키운다.

홍정 또한 성장하면서 성품이 현숙하고 민첩하여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부축해 드렸으며, 봉양이 극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 밖으로 나갔다가 홍법사의 화주승 성공(性空) 스님을 만나게 된다. 원량을 보자마자 성공 스님은 사찰 불사를 도와 달라며 간청을 했다. 원량은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스님이 빈털터리인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성공 스님은 한사코 시주를 청했다. 불사의 원을 세워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마지막 회향하는 어젯밤 꿈에 부처님께서 “내일 기도를 마치고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이번 불사에 큰 시주가 될 것이니라”하셨다는 것이다. 원량은 마지못해 “집에는 곡식 한 줌 없고 내 땅 한 뼘 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합니까? 다만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혹시 대작불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데리고 가서 좋은 도리를 생각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성공 스님은 원량을 따라 그의 오두막으로 갔다. 아버지 원량은 스님과의 약속을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홍장은 아버지와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애통하게 울었다. 홍장의 나이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어린 딸을 보내야 하는 원량 역시 기막힌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약속한 것을.

홍장은 곧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스님을 따라 나섰다. 홍장은 길을 나서며 이제 고향과 아버지와는 영영 이별이라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였다. 난생 처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소량포라는 바닷가에 이르렀다. 너무나 많이 걸어 잠깐 쉬어 가기로 하고 언덕에 앉아 있는데, 바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붉은 배 두 척이 나타나 질풍같이 홍장에게 다가왔다. 배는 모두 중국의 배였다. 배에서 내린 그들은 언덕에 앉아 있는 홍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예를 갖추고 말하길 “참으로 왕후마마이십니다.”하는 것이었다. 홍장은 물론 성공 스님도 깜짝 놀랐다.

“저희는 진(晋)나라 사람입니다. 최근 왕후께서 돌아가신 후 임금님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이미 동국 백제에 탄생하여 성장하셨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하니 가신 이를 생각하고 과히 슬퍼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답니다. 이에 저희들은 금은진보를 준비해 황명을 받자와 동국으로 오던 중 다행히 여기서 마마를 뵈옵게 된 것입니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한숨을 쉬며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다만 아버님을 위해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어 드리고자 스님과 가고 있는 중이니 배에 실은 폐백을 모두 스님께 바치면 기꺼이 가겠나이다.”고 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자신의 원불(願佛)로서 관음성상을 조성하여 아침 저녁으로 모시다가 고향 백제를 그리는 마음에서 석선에 실어 보내면서 “관음보살이여, 인연따라 고향 백제로 가셔서 그들에게 자비와 지혜를 주시고 정업(淨業)을 닦아 소원을 성취하게 하여 주소서”라는 원력을 세웠다. 그 배는 바다에 표류하기를 한 달 만에 홀연히 낙안(樂安) 단교 곁에 정박하게 되었다. 그곳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잡으려 하였으나 관음성상을 실은 배는 스스로 움직여 바다 멀리 가버렸다.

이 때 옥과(현 곡성군 오성면)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아가씨가 우연히 집에서 나와 낙안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바다에서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성덕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성덕에게 다가오는 배를 보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배 안에 번쩍이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경스런 마음이 생긴 성덕은 보살상을 어디든 좋은 자리를 찾아 모셔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음상을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고향인 옥과로 향했다. 관음상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도중에 열 두개의 정자를 만나 쉬어 갔다.

막상 고향 가까이 왔으나 관음상을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았다. 9일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다시 관음상을 업고 성덕산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태산처럼 관음상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덕은 관음사을 모실 곳이 가까워 옴을 알고 주위를 살폈다. 마침 앞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져 있고, 가운데는 집짓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터를 잡고 관음상을 모셨다. 바로 현재의 전남 곡성군 오산면(梧山面) 선세리(善世里) 성덕산 관음사 자리다.

성덕은 나무 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관음사 창건을 발원하는 기도를 조석으로 드렸다. 그런 지 얼마 후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이를 보게 됐고, 그들도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드리고 나자 신기하게도 소원이 한가지씩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이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주산(主山)을 성덕 아가씨 이름을 따서 성덕산이라 하였으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관음사는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80여 동의 건물을 자랑하던 거찰이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832년(순조 32)에 큰 홍수가 일어 전각의 거의 반이 쓸려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물이 차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가, 1936년 청운 스님의 발원으로 중건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없어졌고, 전쟁 후에 창훈스님이 근처에 있는 대은암의 건물을 옮겨 와서 원통전을 중건하였다. 최근에는 1982년 중환 스님이 천왕문을 복원하였다. 요즘에는 만월당과 종각을 짓는 등 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전에는 원통전이 국보 제273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국보 제214호로 지정되었으나 전쟁으로 둘 다 없어졌다. 사찰 일대는 현재 전남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4) 강진 월출산 무위사

전남 강진군 월출산(月出山) 무위사는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의 이름이 관음사였는데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더구나 617년은 원효대사가 출생한 해이므로 사적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이름을 갈옥사(葛屋寺)로 바꿨고,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국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각국사는 이미 917년에 입적했으므로 사실과 거리가 있다.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절 이름을 무위사로 정했다. 무위사는 10세기 이전에 창건되어 도선국사가 머물던 시기에 사세(寺勢)를 확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도 화를 입지 않아 웅장함과 화려함이 전라도 사찰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무위사는 그후 점차 퇴락하여 영조 15년(1739)에 이르면 미타전(지금의 극락보전), 천불전, 시왕전 만이 남게 된다. 일제시대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 벽화보존각에 따로 모셨으며, 1974년 벽화보존각과 해탈문, 분향각(焚香閣), 천불전, 미륵전 등을 중건했다.

무위사의 큰 자랑거리인 극락보전은 1430년(조선 세종 12)에 지어졌다. 성종 7년(1476)에 극락전 안에 아미타삼존도, 아미타래영도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는 당시 무위사가 수륙사(水陸寺)로 지정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한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서 갈 곳 잃은 고혼(孤魂)들을 위한 수륙재를 자주 지냈을 것이고,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부처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위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그림은 바로 극락보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도이다. 얼굴과 목, 어깨가 건강한 남성적인 인상의 관음보살이 버들가지와 정병(淨甁)을 들고 노비구를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주변에는 물결이 표현돼 바다 위에 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벽화보존각 안에는 아미타불이 8여래와 8보살을 이끌고 죽은 이들을 맞으러 나오는 광경을 그린 아미타래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해수관음상좌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비천신인도 등 30여 점이 보존돼 있다. 모두 고려 불화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불화들로 극락보전에 있는 아미타삼존도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극락보전 오른편에 있는 선각 대사 형미(泂微)의 부도비도 매우 아름답다. 946년에 건립된 부도비는 비신과 비신을 받친 거북, 비신머리가 모두 온전하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정수리에 뿔이 있고 귀 뒤에 작은 깃이 달려 있다. 코가 벌름하고 윗입술은 조금 말려 올라갔으며, 여의주를 문 입에 가지런한 이빨과 혀가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비의 주인공 선각대사 형미(864~917)는 광주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였다. 15세에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출가하여 보조체징(普照體澄)의 제자가 되었다. 28세 되던 해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받고 905년(효공왕 5)에 귀국하였다. 무위사에서 머물던 형미는 이후 철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5) 여천 금오산 향일암

향일암은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오산(金鰲山)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호젓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전라남도 여천군 돌산읍 율림리 임포 산 7번지이다. 절의 왼쪽으로는 보리암과 감응도가 보이고 앞으로는 세존도, 오른쪽으로는 미타도와 관음동굴이 있다.

‘해(日)를 바라본다’는 절 이름에 걸맞게 향일암의 아침 해돋이는 장관이다. 향일암은 1300년 전인 신라 선덕여왕 8년(659) 원효 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圓通庵)이라 했으며, 고려 제4대 광종 9년(958) 윤필(允弼) 스님이 산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金鰲庵)이라 개명했다. 그 뒤 조선 숙종 41년 인묵(仁默) 대사가 주석하면서 금불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약 1백여 년 전인 1849년 무렵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책육암(策??庵)이라 하였고, 근래에는 경봉(鏡峯, 1892~1982)이 영구암(靈龜庵)으로 이름을 고쳐 현판까지 써 주었다.

향일암은 이렇게 여러 차례 사찰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먼저 원통암은 관음보살이 지닌 원통자재의 위신력을 의미하는 말로 사찰이 곧 관음도량임을 나타낸다.

금오암과 영구암은 모두 거북이와 관계 있는 이름이다. 현재 절이 위치한 금오산은 기암괴석이 절경이며 바위들이 거북이 등 같이 금이 있고, 지형자체가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데서 이런 이름들이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책육암이라는 이름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책육은 육근(눈,귀,코,혀,몸,의식)의 옳지 못한 행위를 경계한다는 수행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또 거북이의 목과 네 다리, 꼬리를 모두 합하면 여섯이 되므로 사람의 육근을 여기에 비교하여 거북이가 위급할 때 고개를 집어 넣고 발을 감추고, 꼬리를 사리는 모습처럼 사람도 조심해서 수행하라는 의미도 있다.

향일암은 현재 대웅전, 관음전, 용궁전,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으로 사격(寺格)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1987년에 조성한 청동석가모니불과 관음,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1988년에 조성한 영산회상도와 금니(金泥)로 채색한 신중탱화, 1983에 만든 소형 범종 등도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뒤에 있는 일명 흔들바위는 마치 경전을 펼쳐 놓은 듯한 형상인데, 이 바위를 한 번 흔들면 경전을 사경한 공덕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관음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있다. 1991년에 조성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고, 관음전 옆에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동자상이 있다. 향일암은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한 절이다. 기도 시간은 하고자 하는 사람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출처 : 수덕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bany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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