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성지 지장/약사/문수/나한기도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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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약사/문수/나한성지 | |||
보개산 | 심원사(深源寺) | (033)455-3468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로리 72번지 |
와룡산 | 고산사(高山寺) | (043)646-0198 |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 1653번지 |
팔공산 | 거조암 | (054)335-1369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번지 |
관악산 | 연주암(戀主庵) | (02)502-3234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1 |
운문사 | 사리암 | (054)372-8811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도솔산 | 도솔암(兜率庵) | (063)561-0075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번지 |
상왕산 | 개심사(開心寺) | (041)688-2256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번지 |
팔공산 | 선본사(갓바위)(禪本寺) | (053)851-1868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동 587번지 |
지장도량
(1) 철원 보개산 심원사
심원사는 지장도량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찰이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 72번지에 위치한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薩 道場)’으로 불린다.
심원사에는 ‘지장영험비’가 있으며, 지장보살의 영험함을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사냥꾼 형제의 출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17년(720) 의 일로 보개산 아래 마을에 산짐승을 잡아 목숨을 이어가던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사냥에 나서 보개산 너머 담터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고, 순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마치 금란가사를 두른 듯한 누런 멧돼지는 왼쪽 앞다리에 화살을 맞고 보개산 정상인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사냥꾼 형제는 핏자국을 따라 멧돼지가 멈춘 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금빛 멧돼지는 볼 수 없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돌로 된 지장보살상이 맑은 물이 넘쳐나는 샘물 가운데 상반신만 내놓은 채 있었다.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석상은 태산 같은 무게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크게 놀란 형제는 깨달은 바 있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대성(大聖)이시여! 저희들을 죄에서 구해 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마땅히 출가하여 수도하겠나이다.” 다음 날 형제가 그곳으로 가 보니 과연 석상이 돌 위에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바로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출가하였다.
샘 옆의 숲 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고 항상 그 위에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그곳을 석대암(石臺庵)이라고 불렀다. 암자에는 자신들의 화살에 맞은 석상을 모셨다.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도 지장보살석상의 영험에서 유래한다.
고려 초의 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심원사 아래 마을에 어려서 열병을 얻어 장님과 앉은뱅이가 된 이덕기와 박춘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심원사 대종불사를 하기 위해 마을에 내려온 화주 스님에게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에서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3년여 동안 이들은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시주를 하였으며, 마침내 대종불사의 타종식 날이 되었다. 첫 타종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께서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뱅이는 “지장보살님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장님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자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덕기 또한 “어디! 어디!”하고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앞이 보였다. 그들은 산 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힜는 지장보살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절하였다.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었다.
그들이 지장보살님을 본 고개를 견불령, 그들이 살던 마을을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라 불렀다. 애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20km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이름)에 흥림사(興林寺, 심원사의 옛 이름)로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로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三創)하고 산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이후 수많은 영험이 생기며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근세에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末寺)로 석대암, 지장암, 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당우, 1609위의 불상, 탱화, 탑이 있었던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6.25 전쟁의 참화로 본당이 천불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불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의 절터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부도 12기와 아미타불 입상, 사적비, 공적비 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부도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의승군을 이끌었던 제월당 경헌(霽月堂 敬軒) 스님의 부도는 옥개석 운룡문(雲龍紋) 조각 솜씨가 빼어나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하며, 아미타불입상을 포함해 사지(寺址)에 대한 전체적인 문화재조사가 시급하다는 것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옛 절터는 군부대 안에 있어 순례하려면 미리 군부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2) 제천 와룡산 고산사
고산사는 충주시와 단양군을 이어 주는 국도변에 있는 와룡산 정상 반장재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충북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이고, 큰 길에서 절까지 오르내리는 길이 있기는 하지만 만만치 않다. 높을 고(高), 뫼 산(山)이란 이름처럼 산꼭대기에 절이 있다.
고산사는 875년(신라 헌강왕 5)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고,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곳에서 8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절의 모습은 1100여 년 무심한 세월 속에서 망국의 왕일 망정 한 나라의 국왕이 기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10평이 채 안되는 응진전(應眞殿)과 스레이트 지붕의 요사채 그리고 흙벽돌로 만든 선방(禪房)과 해우소가 도량의 전부다.
응진전은 함현(含玄) 스님이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전에는 다 쓰러져 가는 듯한 법당 위에 비닐 한 장을 덮어 비바람만 겨우 막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단장하여 편안하게 참배할 수 있다. 응진전이란 당호(堂號)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곳엔 나한님들이 계시다.
응진전은 보통 주존불이 석가모니 부처님인데 이곳은 관세음보살님이 양 옆으로 각각 세 분 나한님들의 외호를 받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화관을 쓰고 흰색 가사를 걸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충청북도에서는 유일한 석조관음상이다. 여섯 분의 나한님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모습이 정겹고 재밌다. 눈을 반쯤 감고 골똘이 생각에 잠겨 있는 나한님, 흰색 눈썹이 유난히 빛나는 나한님, 한쪽 어깨를 비스듬이 치켜 세운 나한님, 눈을 부릅뜨고 딴 생각을 못하게 하는 나한님이 있다. 옛날에 일곱 분의 나한이 계셨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는 여섯 분 만이 자리를 지키고 계실뿐 나머지 한 분은 어디로 가셨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3) 영천 팔공산 거조암
거조암은 팔공산에 있다. 나한 기도선지로 유명한 거조암(居祖庵)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본사인 은해사에서 30여 분정도 올라가면 질박한 돌담안에 거조암이 자리하고 있다.
거조암은 기도도량으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693년(신라 효소왕 2)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때(742~765)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전해올 뿐이다. 그러나 원효스님은 686년(신문왕 6)에 입적했으므로 신빙성이 문제가 있고, 경덕왕이 창건했다는 설 또한 정확한 근거가 없다고 한다.
거조암이 우리 나라 불교사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스님이 이곳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지눌 스님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도반들과 함께 <정혜결사문>을 지어 후일을 기약했다.
그 정혜결사문은 “우리들이 아침 저녁으로 행하는 자취를 살펴보면, 불법을 빙자하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만을 키우며 이양의 길에서 구구(區區)하며 풍진 세상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도 아니하면서 의식을 허비하니, 비록 출가했다 하니 무슨 덕(德)이 있겠는가. 아! 대저 삼계(三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티끌을 멀리할 행은 없고 헛되이 남자의 몸이 되어서 대장부의 뜻은 없으니, 위로 도를 넓히지 못하고 아래로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가운데로 사은(四恩)을 저버리니 참으로 부끄럽도다.” 당시의 타락한 불교교단의 실태를 엄중하게 비판한 지눌 스님은 경북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 은거하며 수행에만 전념한다. 그러기를 몇 년, 마침내 1188년(명종 18) 봄 거조암 주지 득재(得才) 스님의 청으로 거처를 옮긴 스님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수행 결사에 나선다. 이후 송광사로 결사 도량이 옮겨가지만 결사의 시작은 바로 이곳이었다.
지눌 스님이 거조암에서 정혜결사의 횃불을 치켜든 것은 결코 우연의 일만은 아니다. 거조의 조(祖)는 조사(祖師), 즉 일대사를 해결한 수행의 종장(宗匠)을 가리키는 말이거니와 그것은 바로 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은 진리에 계합한 이라하여 응진(應眞)이라 하고, 그리하여 공양을 받을 만한 존재이므로 응공(應供)이라 한다. 정혜결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수행자가 응진, 응공,나한인 것이다. 결사도량 거조암은 그 뒤 1298년(충렬왕 24) 정월에 원참(元참) 스님이 밤중에 낙서(樂西)라는 도임을 만나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懺法)을 전수받아 기도도량으로 크게 부각되기에 이른다.
거조암은 나한 기도성지 답게 오백나한전인 영산전이 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영산전은 건축학적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미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나뭇결의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살아 있고 흙벽의 질감이 부드럽게 다가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 후불탱화인 영산탱은 색조나 화풍이 이채로운 불화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 불화들의 대부분은 녹색이나 청색 또는 적색이 화면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탱화는 적색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붉은 색이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는 느낌이다.
거조암의 백미는 역시 영산전에 안치되어 있는 오백나한상이다. 오백나한이 안치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두 5백 26위의 나한님이 봉안돼 있다. 학계에서는 영산전이 건립될 당시 오백나한상이 조성됐을 당시 조성됐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4) 과천 관악산 연주암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은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위치하고 있다.
연주암의 창건은 해동 화엄 초조(初祖) 의상스님에 의해서다. <연주암중건기> 등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스님은 문무왕 17년(677)에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관악사가 연주암의 본래 이름이고 의상대는 지금의 연주대이다. 그러나 의상 스님이 연주암을 어떤 이유로 창건하게 됐는지, 또 이곳에서 어떻게 수행 정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의상 스님이 연주암을 창건했다는 기록을 <중건기> 외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경내에도 의상 스님의 창건과 관련된 유물이 전혀 전하지 않는다.
관악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연주암’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그 동기와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고려가 망하자 강득룡(姜得龍),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등 유신들이 관악산에 은신하며 의상대에서 고려 왕조를 그리워 한데서 유래한다는 것으로 이들이 고려 왕조 고려의 임금을 그리워 했으므로 임금을 뜻하는 ‘주(主)’를 써서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연주(戀主)’를 관악사의 새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과 관련된 것으로 태종이 왕위를 셋째인 충녕대군(세종)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선 이들은 관악사에 머물며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자 했다고 한다. 이 때 지은 건물이 40여 칸에 이르렀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들 대군의 심정을 기리기 위해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효령대군은 연주암을 중건했고 숭유억불로 침체 일로에 있던 불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조선의 역대 왕비나 빈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효령대군의 그 같은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효령대군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각종 법회 개최나 사찰 중건, 경전 간행 등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효령각이 있어 효령대군을 기리고 있다. 고려의 유신들이 개성을 그리워하며 은거했다거나 양녕, 효령 두 대군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어찌됐든 연주암이 조선왕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태조는 즉위 원년(1392)에 연주암을 신축했다. 약사여래와 미륵불, 5층 탑을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조성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선 초의 중건과 신축이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주암의 역사는 거의 알려진 바 없고 별다른 성보문화재도 없다. 가장 오래된 것은 3층석탑을 들 수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각 부분의 비례가 균형 잡혀 있고, 그 수법이 매우 정교한 우수한 석탑이다.
연주암에서 4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영험 있는 나한기도처로 유명한 연주대가 있다. 기도는 백척간두에서 뛰어내리듯 간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나한을 모셨음을 나타내는 응진전(應眞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처님 또한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고 한다.
(5) 청도 운문사 사리암
나반존자(那畔尊者)의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운문사 사리암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을리에 자리하고 있다.
사리암(邪離庵)이 창건된 것은 937년(고려 태조 20)이다. 당시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후삼국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국사가 절을 지은 것이 사리암의 시초다.
이후 세인의 이목에서 멀어져 고고한 산중 암자로만 남아 있던 사리암은 1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뒤 1845년(조선 헌종 11) 효원대사가 중건하고 신파스님이 천태각(天台覺)을 건립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851년(철종 2) 현재의 나반존자상을 봉안한 후 사리암은 영험있는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리암은 절 이름 그대로 삿된 마음을 용납하지 않는 도량이라고 한다. 절에 전해내려 오는 설화는 이것을 더욱 잘 알려준다고 한다.
옛날에 사리암 바위굴에서는 수행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한 사람분의 쌀이, 두 사람이 공부하면 두 사람분의 쌀이 , 열사람이 도를 닦으면 열 사람분의 쌀이 나왔다. 어느 날 욕심이 생긴 사리암 대중 한 사람이 막대기로 쌀이 나오는 구멍을 들쑤셨다. 그런데 웬걸 나오라는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솔솔 나왔으며 그후로는 쌀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사리암에는 전해 내려오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은 모두 나반존자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인 것
(6) 대구 팔공산 갓바위
대구광역시 동쪽의 하양 마을에서 신령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높고 우람한 산봉우리들이 줄지어 늘어선 산이 보인다. 대구, 경북의 진산(鎭山)인 도립공원 팔공산(八公山)이다. 높이는 1,193m 산자락은 대구광역시와 경북 경산시, 군위군, 영천군, 칠곡군에 걸쳐 있다.
영남의 영산(靈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팔공산은 풍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숭앙되어 왔다.
공산(公山), 부악(父岳) 등으로 불렸던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국토의 중앙에 있는 산(중악)으로서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 등과 함께 나라를 외호하는 5악의 하나로 신성시 되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팔만구천의 절이 있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산 전체가 도량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주 남산에 비견할 만큼 산 곳곳에 불교 유적, 유물이 널려 있는 성지(聖地)다. 바로 이 팔공산에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준다는 그 유명한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약사여래)이 계시다.
선본사는 팔공산 동남쪽 주봉인 관봉(冠峯:갓바위) 아래에 있다. 본래 절 이름보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으로 더 알려져 있다. 원래 절집이야 한적한 곳이기는 하지만 선본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람들이 갓바위 부처님 쪽으로 곧바로 향하기 때문이다. 갓바위를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갓바위 시설지구에서 곧바로 올라가거나 선본사를 거쳐 등산로를 따라 약15분 정도 올라가면 된다.
등산로는 상당히 가파른 편인데도 1년 365일 전국에서 몰려오는 기도객들로 붐빈다. 갓바위에는 칠성각, 산신각, 용왕각과 요사가 있다. 칠성각 등은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 칠성각이고, 좌우가 산신각과 용왕각이다. 바로 아래는 수각(水閣)으로 사용되고 있다.
(7) 서산 상왕산 개심사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번지 상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개심사는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사찰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개심사가 창건된 것은 654년(백제 의자왕 14)이며, 13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의 풍랑을 겪어 온 고찰이다. 당시 혜감(慧鑑)이란 스님이 절을 짓고 개원사(開元寺)라 했다.
개심사로 불린 것은 1350년(고려 충정왕 2) 처능(處能) 스님이 중건하면서 부터이다. 1475년 중창, 1740년 중수하였으며, 최근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심 당우인 대웅보전과 요사로 쓰이는 심검당(心劍堂), 안양루(安養樓) 등 당우는 몇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지만 충남의 4대 사찰로 불릴 만큼 가치 있는 절이다.
절 입구 돌계단에 발을 디디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는 듯 늘어선 소나무 가지가 그늘을 드리운다. 계단을 다 오르면 직사각형의 연못이 보인다. 풍수지리에서 성왕산은 코끼리의 모양이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외나무 다리, 3단으로 쌓은 연못의 돌벽이 있다. 연못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해탈문, 안양루, 심검당, 대웅보전이 차례로 다가온다.
대웅보전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보물 제143호로 지정돼 있다. 고려 말 화려했던 팔작지붕 양식에서 조선시대 맞배지붕의 양식으로 넘어오는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심검당은 대범함과 소박함을 함께 전해주는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러하거니와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쓴 것이 그러하다. 심검당 또한 조선 초기의 요사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는 예서체의 현판이 먼저 눈에 들어 오는 안양루에 오르면 절과 산이 한눈에 들어 온다. 현판의 글씨는 유명한 근세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의 필체다. 안양루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는 마음을 글씨에 그대로 담아낸 듯 하다.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조선 중기로 일찍이 이곳이 지장신앙의 도량임을 알려준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 안의 지장보살님의 단정한 모습이 근엄한 표정의 장군상과 매우 대조적이다. 개심사는 영험있는 지장기도 도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근대불교사의 큰 봉우리들이 주석하면서 수행했던 참선도량으로도 이름이 높다.
근대 한국불교 선종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鏡虛)스님(1849~1912)이 한동안 머물며 두문불출 정진하던 곳이 바로 개심사이다. 어느 날 생사의 절박함을 깨달아 동학사의 강사의 자리를 던지고 깨달음을 얻은 후 이곳에서 보림(保任)했다. 붉은 녹이 슨 함석지붕의 요연선원(了然禪院)은 일엽스님이 세워 비구니 스님들을 정진케 했던 곳이다.
(8) 고창 도솔산 도솔암
도솔암은 선운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선운사사적기>는 전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선운사의 왼쪽 굴(지금의 진흥굴)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깨뜨리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감응받아 중애사(重愛寺), 선운사, 도솔사 등의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부인의 이름이 중애였으며, 딸의 이름은 도솔이었다. 진흥왕 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둘러싸고 심한 대립에 있었던 때라 <사적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산과 암자의 이름을 도솔이라고 하고 미륵삼존이 꿈에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곳이 미륵신앙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도솔암 마애불상이 554~598년(백제 위덕왕 재위기간) 사이에 검단 선사(黔丹禪師)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검단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검단 선사가 창건한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마애불상을 중심으로 여러 암자들이 들어섰다.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이곳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상도솔암은 1511년(조선 중종 6)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도솔암은 1658(효종 9), 북도솔암은 1703년(숙종 29)에 각각 창건되었다.
1994년 부여문화재연구소의 도솔암 인근 지역조사에서 ‘도솔산 중사’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돼 예전에는 중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검단 선사에 읽힌 일화 가운데 도적의 무리들을 절복시킨 이야기는 절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선운사와 도솔암이 창건되기 전의 이 지역은 도적들의 소굴이었다. 검단 선사는 이들에게 도적질을 하지 말고 참되게 살라며 소금 굽는 법과 제지 기술을 가르쳐 생업으로 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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