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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김구의 모순된 행적…

淸潭 2024. 9. 29. 09:22

 

1948년 김구의 모순된 행적…김일성과 “내전 없다” 공동 발표, 서울 돌아와선 ‘북한 남침’ 확신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2024. 9. 29. 08:00
[역사 발굴]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 하다 갑자기 ‘통일정부’ 세워야 한다며 평양 방문
1946년엔 “국내에 있던 사람은 모두 일제 협력자…모조리 감옥 가야” 주장도

(시사저널=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저항시인 이육사는 1936년 《청포도》라는 시에서 나라를 잃은 설움과 향수, 그리고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나라를 되찾아 세계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우리 정치권은 여전히 '친일 매국 타령'과 '친북 추종 노선'을 쏟아내고 있어 자유민주공화국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넘어섰고, 올 상반기 수출액은 일본 턱밑까지 올라갔다. 제조업·영화·엔터테인먼트 등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거나 추월했다. 일본 편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고 국익을 훼손하는 매국 친일파가 지금 대한민국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있지도 않은 허깨비를 세워 때리는 '친일몰이'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정쟁세력만 존재할 뿐이다.

광복절이나 남북대화 행사가 시대착오적인 파당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정치권의 인식 변화가 절실하다.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반일은 애국, 친일은 변절·배신자'라는 병리적 대결 구도가 형성된 배경에 김구 선생이 상징하는 '민족주의 프레임'이 일부 있는 만큼, 이번 기회에 그의 세계관과 리더십을 사실적으로 가늠해 보는 작업을 해보려 한다. 특히, 5개 종교로 개종한 김구가 이승만 노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추론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11월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식에서 연설하는 김구 주석 ⓒ연합뉴스
1948년 4월22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때 김일성을 따라 이동 중인 김구(오른쪽) ⓒ위키미디어 제공

5개 종교 개종한 김구의 유아독존형 세계관

유교였던 김구 선생은 1893년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유·불·도를 통합한 동학교도로 개종했다. 19세 때 황해도 꼬마접주로 동학운동을 벌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저항으로 일본 순사를 살해한 뒤 감방 생활을 하다 탈옥해 공주 마곡사에선 승려 생활을 했다. 1903년경 김구는 친구 우종서의 권유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1905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을사조약 철회를 위한 상소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테러 공격을 받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으며 천주교도가 됐다.

 

김구 선생이 다섯 번의 개종과 전향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지만 그에게 종교는 목적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한 방법론이 아니었나 추론할 수 있다. 최기영 교수(서강대 사학과)도 청년 김구는 종교 자체에 감화돼 입교했다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줄 사상과 공간을 찾아 방황했다고 봤다.

5대 종교를 섭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김구는 어떤 세계관을 가졌을까? 우선 무한한 신의 능력인 '신성(神性)' 앞에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연약하다는 '청교도적 유한세계관'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유한한 인성'과 '무한한 신성'을 섞어 인간도 수양을 통해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무한세계관'을 바탕으로 '성인군자형 리더십'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상숭배 타파' '구원예정설' '직업소명설'같이 유한세계관을 전제로 칼뱅이 전개한 청교도적인 세계관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김구는 일찍이 청교도 정신에 충만한 기독교로 전향해 개화사상으로 무장하고, 미국 유학에서 영미식 보통법과 만국공법 등 서구식 유한세계관을 갖게 된 이승만의 정치 노선을 어떻게 봤을까? 변화된 20세기 미국과 소련의 패권적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19세기 중화 질서에 기초한 소중화 관점에 서서 이승만을 소인배나 위정척사, 이단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을까.

김구는 일제, 미·소 냉전 시기 이승만과 함께 투쟁했지만 항상 같은 노선을 취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 관련 결정 사항을 신탁통치로 규정하고 좌파·공산주의 진영의 '찬탁운동'에 맞서 우파진영의 '반탁운동'으로 협력했었다. 그러나 끝내 '단독정부 수립론' '통일론'을 놓고 갈라서며 대립했다.

김구 주석이 1945년 12월19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에 참석해 이승만 당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뉴시스

일제 때 국내파를 친일파·악마화하는 오류

무한세계관 성향의 김구는 유아독존형 리더십, 패권주의형 리더십으로 흐르기 쉽다. 몇 가지 단서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구 선생이 친일파의 범위를 매우 광범위하게 규정한 점은 유아독존형 리더십을 잘 보여준다. 1946년 11월 7일 《일본 다이어리 Japan Diary》에 마크 게인이 남긴 자료(Mark Gayn·Japan Diary·433쪽)에 따르면, 김구 선생은 "한국 내에 있던 사람들은 사실상 모두 일제 협력자다. 그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런 발언은 김구 선생의 무한세계관에 따른 유아독존형 리더십을 보여준다. 김구는 '선악의 이분법'에 따라 자신이 서있는 해외 독립지사의 선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국내파들을 모두 친일파로 보고 악마화하면서 그 범위를 넓게 규정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논쟁 사항이다. 해외 민족지사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만들어주던 사람들은 여건상 국내를 떠나지도 못하면서 일제의 압제와 수탈 속에서 독립을 지원했던 국내파 민중이다. 일제 지배하에서 국내에 있었던 국내파들을 친일 부역자로 보고 모조리 감옥에 보내겠다는 김구 선생의 시각은 '해외 독립지사=애국자=선이고, 국내 민중파=친일파·변절자=악'이라는 이분법적 선악관을 만들어낸다.

친일파의 범위를 국내에 있는 모든 국민으로 넓히는 김구의 이분법적 시각은 민족지사들의 과도한 선민의식, 특권의식, 보상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김구 선생과 같은 인식이라면, 박정희 독재정부 시절 해외 망명정부를 세우지 않고 국내에 있었던 모든 사람은 모조리 독재 협력자라고 비난받게 된다.

둘째는 김구 선생의 패권주의형 리더십은 '단독정부 수립론(단정론)'에서 잘 드러난다. 김구는 '찬탁-반탁 논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소련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북한인민정부 수립'을 주도하고 있는 김일성에 맞서 '단정론'을 주장하는 이승만 노선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어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전개하면서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반공 노선에 협조하지 않는 태도를 명확히 드러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두 차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에 따라 1948년 초 한반도의 총선거를 감독해 신생 정부 수립을 이루려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38선을 넘지 못했다. 소련이 이들의 입북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반면 김구는 2월10일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발표하고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어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고,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남북에서 외국군이 철수한 뒤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김구는 4월30일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김일성과 함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불과 2년 후 북한의 남침이 일어났다.

2015년 미국에서 공개된 '김구 극비문서'

김구의 패권주의형 리더십과 태도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경교장을 방문한 주한 중화민국 공사 유어만(劉馭萬)과 김구(金九)의 대화 비망록(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July 11, 1948 Wilson Center)에서 잘 드러난다. 이 비망록은 이승만 정부에 협력할 것을 권유한 장개석 총통의 뜻을 전하면서 평양 방문에 관해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극비문서다. 이 비망록은 2015년 6월24일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북한 국제문서 프로젝트' 보고서로 공개했으며 현재 이화장에 보관되고 있다.

이 비망록에서 김구는 자신의 북한 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남북지도자회의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북한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한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병력을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입니다."

비망록에서 드러난 김구의 발언은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김일성과 함께 발표한 4월30일 공동성명서 내용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김구는 자신이 북한에 가봤더니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이 남침해 남한을 무너뜨리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유어만에게 말하고 있다. 이 발언은 김구가 김일성과 함께 합의했던 공동성명서의 내용과 완전히 배치된다. 김구와 김규식은 4월30일 4개 항으로 구성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며 남북협상이 엄청난 성과를 냈다고 자화자찬했었다.

하지만 이 극비문서는 김구가, 북한이 머지않아 소련의 도움으로 남침할 걸 알면서도 대중을 향해서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이라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서는 김구가 왜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곧 멸망할 나라에 왜 참여하느냐'는 해석이다. 대세(大勢)는 북한 주도의 통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굳이 이승만과 손잡을 필요가 없다는 해석이다.

이 부분은 논란거리다. 아직 결론을 내기에 이르다. 김구의 세계관과 리더십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좌우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관점에 얽매여 한쪽으로 몰아가는 식의 태도는 피해야 한다. 다양한 의견 제시와 더 많은 토론, 무엇보다 사실의 새로운 발견들이 필요하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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