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마야 부인을 대신해 싯다르타 양육
석가족 여인 500명 이끌고 승단에 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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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후, 고향 카필라성을 찾은 부처님에게 조심스레 옷을 건네며 받아주시기를 청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집을 떠난 아들이 숲속이나 들판에서 수행하며 혹시 추위에 떨지는 않는지, 밤새도록 모기에 시달리지는 않는지, 노심초사하며 정성스럽게 짠 옷이었다. 항상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맛난 음식만을 먹던 아들이었다. 그 어디선가 홀로 쓸쓸히 누더기 옷을 걸친 채 거친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할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미어질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나중에 아들을 만나면 건네주리라 생각하며 옷을 지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마하파자파티, 즉, 부처님의 양모였다. 언니 마야(Mayā)와 함께 카필라성의 슛도다나왕에게 시집 온 그녀는 언니 마야가 출산 후 7일 만에 저 세상으로 떠나자,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며 조카를 키웠다. 그 아기가 고타마 싯다르타. 바로 부처님이었다. 마하파자파티는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소중하고도 소중하게 싯다르타를 키웠다. 싯다르타가 출가를 감행했을 때, 아버지 슛도다나왕보다 아내 야소다라보다 그녀는 더 비탄에 빠져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애정도 싯다르타의 진리를 향한 애타는 갈증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 듯, 결국 싯다르타는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길고도 힘든 시간이 흐른 뒤, 이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각자가 되어 고향을 찾은 아들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자신의 슬픔과 기다림이 담긴 옷을 내민 것이었다.
“부처님, 당신을 위해 제가 직접 지은 옷입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하지만, 부처님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옷을 내게 주지 말고 승가에 보시해 주십시오. 승가에 보시하면 내가 공양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하파자파티는 선뜻 그 말에 따를 수 없었다. 일찍이 자신의 품속에서 고이고이 길렀던 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옷이었다. 그런 옷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받아주시기를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난다가 나서 마하파자파티를 설득했고, 그녀는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며 옷을 승가에 보시했다. 양모의 따뜻한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부처님이지만, 오히려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보시의 본질을 일깨우며 그녀가 더 큰 공덕을 쌓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고 싶으셨던 것이리라.
팔경법 수지 약속하고 출가 허락
부처님께서 고향을 찾으신 후 샤카족의 젊은이들은 뒤를 이어 출가했다. 아난다, 아누룻다, 데와닷타, 밧디야, 바구 등을 비롯하여 부처님의 친아들인 라후라와 이복형제 난다마저 출가했다. 난다는 마하파자파티의 아들이었다. 싯다르타에 이어 난다까지 떠나보낸 마하파자파티, 그리고 남편에 이어 아들 라후라까지 출가시킨 야소다라. 이 두 여인을 비롯하여 카필라성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출가로 많은 여인들이 홀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슛도다나왕까지 죽어버리자, 카필라성에는 여인들의 온기만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결심한 듯, 마하파자파티는 카필라성 교외의 니그로다동산에 머물고 계신 부처님을 찾아갔다. 남편도 아들도 없는 곳에서 더 이상 머물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며 진정한 의지처에 대한 동경도 생겼던 터였다. 그녀는 부처님께 청을 드렸다.
“부처님이시여, 부디 여인도 출가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부처님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셨다. 거듭 세 번에 걸쳐 간절히 청을 드렸지만, 부처님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부처님은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크게 낙담한 마하파자파티는 울면서 돌아갔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후 부처님이 카필라성을 떠나 웨살리마을로 유행을 떠나시자, 마하파자파티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사를 걸친 채, 500명의 석가족 여성들과 더불어 부처님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부처님이 머물고 계시는 대림중각강당의 문 앞에서 울며 서 있었다. 익숙지 않은 긴 여행으로 발은 퉁퉁 부어오르고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측은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난다는 부처님께 그녀들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부처님의 대답은 다름없었다. 그러자 아난다는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만약 여인이 이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여 수행한다면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야, 만약 여인이 이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여 수행한다면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획득하는 능력에 있어 여성이 남성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여성의 출가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대답을 받아, 만약 그러하다면 마하파자파티가 양모로 젖을 주어 부처님을 기른 은혜를 생각하여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부처님은 결국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게 된다. 단, 팔경법(八敬法)이라 불리는 8종의 법을 평생 지킨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구니는 구족계를 받은 지 백세가 되어도 오늘 구족계를 받은 비구를 예경하고, 일어나서 맞이하며, 합장하고, 공경해야 한다. 둘째,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주처에서 우기를 보내서는 안 된다. 셋째,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승가에 두 가지 법을 청해야 한다. 즉, 포살을 묻는 것과 교계에 가는 것이다. 넷째, 비구니는 우안거가 끝나면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의 양 승가에서 보고, 듣고, 의심 가는 세 가지 일에 대해 자자를 행해야 한다.
부처님 입멸 3개월 전 사선에 들어
다섯째, 비구니가 경법(敬法)을 범하면 양 승가에서 보름동안 마낫타(mānatta)를 행해야 한다. 여섯째, 식차마나가 2년 동안 6법의 학처를 배우고 나면 양 승가에서 구족계를 구해야 한다. 일곱째,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된다. 여덟 째, 오늘부터 비구니의 비구에 대한 언로(言路)는 폐쇄되고, 비구의 비구니에 대한 언로는 폐쇄되지 않는다. 이 8종의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고, 봉사하되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난다는 마하파자파티를 찾아가 만약 이 8종의 법을 지킨다면 부처님께서 출가를 허락하신다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녀는 “장식을 좋아하는 젊은 남녀가 머리를 감고 각종의 아름다운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듯이, 저는 이 여덟 가지 조항을 평생 소중하게 지키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받아들였다. 이 팔경법은 곧 그녀의 구족계가 되었고, 이렇게 해서 최초의 비구니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어 그녀와 함께 했던 500명의 석가족 여성들이 구족계를 받아들면서 비구니승가가 성립하게 된다. 아마도 비구승가 성립 후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던 것 같다.
이 팔경법에 의하면 비구니의 지위는 비구보다 낮고, 비구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조차 비구니는 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인정된다. 그리고 비구와 비구니는 보통 따로 승가를 형성하여 자치적으로 운영되지만, 안거나 포살, 자자와 같은 승가의 중요한 정기행사, 승잔죄를 저지른 자에게 부과되는 마낫타라 불리는 근신 기간,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는 구족계 등의 경우에는 비구니 승가의 자치가 인정되지 않고 반드시 비구승가의 지도나 감독을 받아야 한다.
부처님이 왜 여성의 출가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는가, 왜 성차별이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팔경법을 조건으로 세웠는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여성출가자를 받아들였을 때 당시 인도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로 인해 발생할 승가 내외의 파문, 여성의 육체적인 특수성에 의한 수행 생활의 어려움을 고려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신참자로서의 비구니에게 선배인 비구의 지도를 받게 하고자 하는 배려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욕생활을 지켜 수행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던 남성 중심의 승가에 애욕의 대상인 여성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팔경법이라는 제도적인 장치를 둠으로써 남성 출가자와 여성 출가자 사이에 상하 관계에 근거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여하튼 당시 인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여성의 출가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난다의 설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어쩌면 이는 부처님의 양모이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이미 고령의 상태에서 출가한 마하파자파티이지만, 열심히 수행하여 성자의 경지에 도달했고, 모든 면에서 다른 비구니들의 모범이 되었다.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신 부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항상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이리라. 그렇게 20여년의 세월을 보낸 후,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부처님의 입멸 3개월 전이었다. 사리풋타나 목갈라나처럼 그녀 역시 부처님의 입멸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웨살리의 강당으로 돌아가 조용히 문을 잠근 그녀는 대신변을 일으킨 후 사선(四禪)에 들어 입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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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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