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승단 귀의…출가 8일만에 아라한과 증득
걸식·분소의·수하좌·진기약 등 사의〈四依〉 평생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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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제자 가운데 누구를 가장 신뢰하셨을까? 오랜 세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시중을 들어주었던 아난다였을까, 아니면 법의 상속자라 칭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사리풋타였을까? 혹은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 라후라였을까?
십대제자라 꼽히는 훌륭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몇몇 이름을 떠올리다 보니, 유독 마음이 가는 이름 하나가 있다. 바로 마하캇사파, 즉, 대가섭(大迦葉)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이자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평가되는 마하캇사파야말로 그 누구보다 부처님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은 제자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부처님은 그에게 당신의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하셨으며 또한 옷을 물려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영광을 누린 제자가 또 어디 있을까.
어릴 적 핍팔라야나 혹은 핍팔리라고도 불렸던 그는 라자가하 근처의 한 마을에 살던 대부호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었는지 아니면 후천적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릴 적부터 세간 생활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출가를 꿈꾸었다. 결혼에도 뜻이 없어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미루다가 결국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못하고 웨살리 교외에 살던 밧다 카필라니라는 절세의 미인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녀 역시 출가에 뜻을 두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각자 따로 침대를 쓰며 12년 동안이나 서로 접촉하는 일 없이 살았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상의하여 함께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출가를 감행한다. 물론 각자 향한 길은 달랐다.
핍팔라야나와 부처님과의 만남은 곧 이루어졌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사를 걸친 채 이곳저곳을 편력하던 핍팔라야나는 라자가하와 나란다 마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바후풋타 사당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수행자를 보았다. 바로 부처님이었다. 그는 부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분이야말로 내가 의지해야 할 스승이구나.”
부처님께 예를 갖춘 후 말씀드렸다.
“존귀한 분이시여, 존자야말로 제 스승이십니다.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따뜻하게 맞이하여 가르침을 들려주셨다. 성도 3년째 되는 해의 일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핍팔라야나는 출가 8일째 되는 날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했고, 수행자들은 이미 출가하고 있던 캇사파 3형제와 구별하여 그를 마하캇사파라고 불렀다.
부처님이 자신의 자리 나누기도
마하캇사파는 그 누구보다 청렴한 인격의 소유자였는데 부처님은 이를 꿰뚫어 보고 계셨다. 어느 날, 부처님이 탁발을 마치고 정사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 나무 아래 앉아 쉬려고 하시자, 마하캇사파는 자신이 입고 있던 대의(大衣)를 벗어 네 겹으로 접은 후 부처님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대의란 불교수행자가 소지해야 할 삼의 가운데 하나로 설법이나 탁발 등을 할 때 겉에 입는 가장 큰 가사이다. 그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으신 부처님은 칭찬의 마음을 곁들여 “캇사파야, 이 대의는 참으로 부드럽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마하캇사파는 자신이 부처님보다 좋은 옷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송한 마음을 느끼며 “세존이시여, 부디 제 대의를 받아주십시오”하고 부탁드렸다.
“옷을 내게 주고 나서 넌 무엇을 입으려 하느냐?”라고 부처님이 물으시자, 그는 부처님이 입고 있는 누더기 옷을 달라고 했다. “캇사파야, 내 옷은 오래 입어 낡을 대로 낡았느니라.” 그러자 마하캇사파는 그 누더기야말로 이 세상 최상의 것이라 말하며 교환할 것을 간곡히 청했다. 이후 마하캇사파는 부처님의 누더기 옷을 항상 걸치고 다녔으며 이를 계기로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완전히 떨쳐버렸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수행자들은 그를 비웃었다. “불결하기 짝이 없는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부처님을 따라 다니는 저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아직 마하캇사파에 대해 잘 모르던 수행자들의 눈에 그의 모습은 더럽고 불쾌할 뿐이었다.
부처님이 코살라국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초라한 그의 행색을 본 다른 수행자들이 또 다시 수군거리며 조롱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설법을 중단하시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하캇사파를 부른 후 당신의 자리 반을 내어 주시며 앉을 것을 권하셨다. 이 모습을 지켜본 수행자들은 마치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공포를 느꼈고, 부처님은 캇사파야말로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도달한 성자라고 설하시며 수행자들을 교화시켰다고 한다. 이렇듯 마하캇사파에 대한 부처님의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그를 이렇듯 신뢰하신 것일까. 그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의 고결한 인격과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교수행자들은 원래 유행생활을 기본으로 했으며, 의식주도 유행생활에 걸 맞는 사의(四依)가 권장되었다. 사의란 걸식(乞食), 분소의(糞掃衣), 수하좌(樹下坐), 진기약(陳棄藥)을 말한다. 걸식이란 탁발로 얻은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것, 분소의란 쓰레기장이나 무덤가에 버려진 헌 옷감 등을 주워 덧붙여 만든 옷을 입는 것, 수하좌란 나무 밑이나 수풀 등 지붕이 없는 야외에서 자는 것, 진기약이란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것을 약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사의는 부처님도 실천하신 것으로 가능하다면 모든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할 원칙이었다. 하지만 중도를 지향했던 부처님은 이 사의만을 고집하지는 않으셨다. 사의를 기본으로 하지만 만약 신도들의 보시가 있다면 그것이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 한 청식도 거사의도 또한 정사도 받아들여도 좋다고 하셨다.
이는 고행적인 내용의 사의에 근거한 의식주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집착으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또한 의식주 역시 수행을 위한 도구이므로 수행에 최상의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도들의 보시를 통해 안락함을 맛본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점차 사의의 생활로부터 멀어져갔다. 사의를 실천하는 수행자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자신이 그런 고달픈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어떤 수행자는 아예 사의를 실천하는 수행자들을 경시하며 그 지저분한 모습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제1결집 단행…교단 분열 막아
마하캇사파는 이와 같은 승가의 변화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고행에 가까운 두타행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두타행은 의식주 전반에 걸쳐 탐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심신을 단련하여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으로 만족이나 욕망의 제어와 같은 덕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중요시되었다. 마하캇사파는 그 누구도 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너덜너덜한 헝겊조각을 가져다 기워 입었으며, 음식은 오전 중에 한 번 그것도 항상 일정한 양 만을 탁발해서 먹었다. 그리고 항상 숲 속이나 야외, 무덤가 등에 거주했다. 나이 들어서도 너무나도 가혹한 생활을 계속하는 마하캇사파를 염려하여 한번은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캇사파야, 너도 많이 늙었구나. 언제까지나 힘든 두타행을 계속할 필요는 없다. 누더기 옷도 숲에서 거주하는 것도 이제 그만두어도 좋지 않겠느냐.”
그러자 마하캇사파는 대답했다.
“저는 두타행을 실천하는 삶 그 자체가 즐겁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의 모습이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격려가 될까 싶습니다.”
그에게 있어 두타행은 힘든 수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체가 즐거운 경지, 이미 그는 그런 경지에 있었다. 이런 그를 어찌 부처님이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구성원들이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때 나는 침상에서 내려와 시내로 탁발을 나갔다. 밥을 먹고 있는 한 문둥병자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가만히 섰다. 그는 문드러진 손으로 밥 한 덩어리를 집어 나에게 주었다. 발우 안에 밥을 담는 순간 그의 문드러진 손가락이 툭하고 그 안에 떨어졌다. 담 벽 아래에서 나는 그가 준 밥을 먹었다. 그것을 먹고 있는 동안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내게는 혐오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테라가타’라는 초기경전에 마하캇사파의 말로 전해지는 시구이다. 좋고 나쁨, 더럽고 깨끗함, 추하고 아름다움, 이 모든 분별을 떠난 그의 경지가 느껴진다.
마하캇사파는 특히 부처님의 만년에 큰 활동을 하게 된다. 사리풋타도 목갈라나도 일찍이 모두 입멸해 버리자, 승가는 아난다와 마하캇사파 두 사람 체제로 들어갔던 것 같다. 아난다는 포근하고 상냥한 성품으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았지만 마음이 너무 유약한 탓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마하캇사파는 지나치게 엄격한 성격 때문에 인기는 없었지만, 수십 년을 통해 보여준 청렴하고도 고고한 그의 인격은 위기 상황에서 승가를 집결시키는 위대한 힘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부처님의 열반 후 500명의 아라한을 소집하여 라자가하의 칠엽굴에서 제1결집을 실행함으로써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막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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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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