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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38] 12·12 쿠데타

淸潭 2008. 7. 26. 10:10
  • 너무나 짧았던 '서울의 봄'
  •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38] 12·12 쿠데타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8.07.25 20:08 / 수정 : 2008.07.26 06:24
    • 윤보선·김대중·함석헌·지학순·이태영·김동길씨 등‘반(反)유신 인사’들의 복권을 보도한 1980년 3월 1일자 조선일보.
    • "이놈들!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누가 그따위 지시를 하던가?"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쯤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의 공관에 신군부측 허삼수(許三守)·우경윤(禹慶允) 두 대령이 찾아왔다. "총장님, 조사할 게 있으니 저희 녹음실로 가시죠." 함께 온 보안사 수사관들은 전화를 돌리는 총장의 부하들에게 네 발의 총을 쐈다. 군인 한 명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M16소총으로 정승화를 후려쳤고, 33헌병대 병력 60여 명이 공관으로 난입했다.

      총성과 함께 역사는 47일 전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10·26 사태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에게 실권이 집중됐다. 사조직 '하나회'가 중심이 된 전두환의 신군부(新軍部)는 10·26 당시 정승화가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것 등을 근거로 그를 강제 연행했다. 하극상이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崔圭夏)는 "국방장관 불러오라"며 정승화 체포 재가(裁可)를 새벽까지 거부했고, 그 사이 신군부측 1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사단장
      노태우(盧泰愚)의 9사단 병력은 중앙청으로 진입했다. 신군부는 군권(軍權)을 장악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연행된 직후인 1979년 12월 13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중앙청 앞에 진주한 신군부측 병력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조선일보 DB
    • 12월 21일 유신헌법에 의해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최규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자는 강력한 여론에 마주치게 됐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1980년대는 유신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 기대와 함께 시작됐다. 2월 29일에는 오랜 연금 생활을 겪었던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金大中)이 복권됐다. 차기 대통령은 김대중(DJ)과 신민당 총재 김영삼(YS), 공화당 총재 김종필(JP)의 3김(金) 중에서 나오리라는 것은 확실한 것처럼 보였지만 양김(兩金·YS와 DJ)은 분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학기가 되자 대학생들은 정부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 구상을 사실상 유신체제를 연장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10만여 명의 학생이 운집했다. 17일, 신군부는 사회불안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독단적으로 단행하고 2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서울의 봄'은 너무나 짧았다.

    • 1979년 10월 27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계속된 '서울의 봄' 시기의 대한뉴스 동영상들. 1979년 11월 김영삼 신민당 총재 등의 인사들과 회담을 갖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의 서울역 시위.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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