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향한 출가
출가(出家)하여 도(道; 깨달음)를 이루리라는 일념으로 한 평생 정수리에 법계(法界)에 충만하신 부처님과 보살님을 모시고 가슴속에는 고귀한 가르침을 담고 정도(正道)의 수행을 쉼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어찌 금생(今生)의 발심(發心)과 서원(誓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복이겠습니까?
실로 이 큰 복은 과거 전생부터 헤아릴 수 없는 생을 거듭하면서 세운 흔들림 없는 서원의 힘과 올곧은 수행의 힘으로 인연된 결과라 생각합니다. 하늘을 덮고 땅을 덮고도 남는 복이 있어야 출가해서 장애 없이 원만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출가할 때에는 살을 베어내듯 뼈를 깎아내듯 정든 사람과 재물, 명예를 세속(世俗)에 두고 떠나기가 힘도 들겠지만 생로병사의 모진 굴레에서 벗어나서 대자유인이 되는 길은 출가의 길이 가장 확실하고 반듯하고 쉬운 지름길이라 확신하면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저녁 안개처럼 퍼져 가는 온갖 망상을 쉬고 이 육신은 상처나 종기와 같아서 소중히 할 것도 가볍게 할 것도 없이 수행에 마장(魔障)이나 일으키지 않도록 검박(儉朴)하게 보살피며, 항상 정신은 칼 끝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정진해 가다보면 언젠가는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듯 오도(悟道)해서 허망한 오온가(五蘊家; 색·수·상·행·식)를 벗어나고 궁극에는 삼계가(三界家; 욕계·색계·무색계)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처음 길을 떠나는 두 나그네의 첫 몇 걸음은 어디를 향하나 별 차이가 없으나 천 걸음 만 걸음에 다다르면 동쪽을 향한 첫 걸음은 동에 있고, 서쪽을 향한 첫 걸음은 서에 있으며 산을 향한 첫 걸음은 산에, 바다를 향한 첫 걸음은 바다에 있게 되는 법이니 사람으로 태어나 도(道)를 흠모하고 출가 수행의 길에 당당히 서 있다면 이보다 더 멋진 삶의 출발점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문수보살(文殊菩薩)님께서 금색여인(金色女人)을 출가시키시며 이르시기를, “보살의 출가는 자신만이 머리를 깎고 가사(袈裟)를 입고 계행을 지니고 고요한 곳에 살면서 열반(涅槃)에 드는 것을 출가라 하지 않는다. 크게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일체 중생의 번뇌를 끊으며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이에게 깨끗한 계율을 지키게 하고 생사에 윤회하는 이로 하여금 해탈(解脫)을 얻게 하며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넓혀 중생을 두루 이롭게 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큰 열반에 들게 하여야 그것을 출가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일을 맞이하는 법회 자리에서 다시금 깊이 그 뜻을 새기고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출가한 그날부터 이 몸이 부모님께 받은 단순한 육신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을 담고 다니는 법구(法具)라 생각하고 항상 구법(求法)의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는 선재동자(善財童子)처럼 순진무구한 수행자의 정신으로 늘 부처님과 스승님과 부모님과 시주님과 도반들에 감사드리며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출가수행자가 한 순간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께서 마왕의 궁전에 앉으시고 또 한 순간 나쁜 마음을 일으키면 마왕이 부처님의 법당에 살게 되는 것이니 지혜로운 마음으로 계율(戒律)과 선정(禪定)을 익히고 탐욕과 분노의 어리석은 마음을 털어버리면 형상이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단정하고 위엄 있는 위의(威儀)에 모든 이들이 믿고 따를 것입니다.
세상에 출가할 뜻이 있는 사람은 많으나 참으로 세연(世緣)을 끊고 쾌락을 등지고 출가하는 사람은 흙 속의 금과 같이 귀한데 우리는 다행히 출가를 하였으니 항상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처럼 번뇌의 불꽃을 끄고 불도(佛道)를 이루어야 합니다. 형상만 출가하고 마음은 세속의 늪에서 허덕이면서 시주물(施主物)을 먹고 사는 출가자는 죄인과 다름이 없으니 왜냐하면 부처님께는 반역죄(反逆罪)를 짓고 부모님께는 불효죄(不孝罪)를 짓고 나라에는 불충죄(不忠罪)를 짓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치우침없이 오직 출가자다워야지 몸은 출가자의 형상을 하고 마음은 속인(俗人) 그대로 있어서 늘 세속인과 더불어 세상사 돌아가는 것에 정신을 쏟고 세월을 허비하면 불난 집 같은 세상에 산중에서 생긴 기름까지 가져다 불을 지피는 위태로운 승려가 되는 것이니 오히려 몸은 세인(世人)이나 마음은 세상사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공부인보다 못한 처지가 됩니다.
부디 대중스님들께서는 형상의 출가에 만족하지 마시고 선지식(善知識)을 만난 인연에도 자만하지 마시고 늘 하심(下心)하며 아상(我相)을 버리고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님과 같은 자세로 생활하여야 합니다.
법화경(法華經)에 나투신 상불경보살님께서는 항상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나는 당신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들도 앞으로 해탈할 수 있습니다.”라고 찬탄하셨습니다. 참다운 수행자는 이처럼 상대가 어떤 중생이든 가볍게 보지 않고 자비심을 가지고 공덕을 베풀며 중생의 미래에 희망을 가지고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는 그날까지 큰 원력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논어(論語)에 보면 세속의 어진 학자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며 도에 목숨을 거는 훤출한 장부의 길을 가는데 삼계의 대도사를 모시고 사는 출가수행자가 어찌하여 도를 이루는 길에 고통이 따른다고 두려워하며 가던 길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향기로운 나무는 토막토막 나누어도 향기가 나듯이 오직 깨달음을 향한 출가의 길이 한 걸음 한 걸음 반듯 반듯하게 이어져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로 펼쳐지길 바랍니다.
다시금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날을 봉축하며 맞이하고 우리 대중도 참다운 출가자의 정신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올바른 출가자상을 정립하여서 안일과 나태의 지난날을 참회하고 성불(成佛)의 그 날을 향해 새로운 각오로 출발합시다. 도를 향해 떠나는 매일매일 순간순간이 언제 어디에 있든 출가입니다.
- 부처님 출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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