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慶州金氏

경주김씨 계림군파 9-10.가문의 역사속 인물

淸潭 2008. 2. 6. 18:32

    10.가문의 역사속 인물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     대

 삼국시대 < 1 > , < 2 >
 

김가기(金可紀 / ?~859)
김개원(金愷元)
혜공왕(惠恭王 / 756~780)
원성왕(元聖王 / ?~798)
김관장(金官長)
김구도(金仇道)
김구리지(金仇梨知)
김군관(金軍官 / ?~681)
김 귀(金 貴)
김균정(金均貞 / ?~836)
김 기(金 耆 / ?~758)
김대렴(金大廉)
김대문(金大問)
김대비(金大悲)
김대성(金大城 / 700~774)
김덕지(金德摯)
김도나(金道那)
민애왕(閔哀王 / ?~83)
김무(金武)
김문량(金文亮(良) / ?~711)
김문영(金文穎)
김문왕(金文王 / ?~665)
문무왕(文武王 / ?~681)
김법선(金法宣)
김사공(金思恭)
김사양(金思讓)
김사종(金嗣宗)
김석(金錫)
김수충(金守忠)
김숙흘종(金肅訖宗)
김순원(金順元)
김알지(金閼智 / 65~?) 

김 양(金 陽 / 808~857)
김양도(金良圖 / ?~670)

선덕왕(宣德王)
김양순(金良順(亮詢) / ?~847)
김언경(金彦卿)
헌덕왕(憲德王 / ?~826)
김 영(金 穎)
김용춘(金龍春)
신무왕(神武王 / ?~839)
김운경(金雲卿)
김웅원(金雄元)
김육진(金陸珍 / ?~?)
김은거(金隱居 / ?~775)
김의충(金義忠 / ?~739)
김인문(金仁問 / 629~694)
김입지(金立之 / ?~?)
김정종(金貞宗 / ?~?)
희강왕(僖康王 / ?~838)
김지성(金志誠 / 652~?)
김헌장(金憲章 / ?~?)
김헌정(金憲貞 / ?~?)
김효방(金孝芳 / ?~?)
김효양(金孝讓 / ?~?)
김후직(金后稷 / ?~?)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
진덕여왕(眞德女王 / ?~654)
마의태자(麻衣太子)
지증왕(智證王 / 437~514)
미추왕(味鄒王 / ?~284)
자비왕(慈悲王 / ?~479)
내물왕(奈勿王 / ?~402) 

실성왕(實聖王 / ?~417)
눌지왕(訥祗王 / ?~458)

법흥왕(法興王 / ?~540)
진흥왕(眞興王 / 534~576)
진평왕(眞平王 / ?~632).
신문왕(神文王 / ?~692)
효소왕(孝昭王 / 643~702)
진지왕(眞智王 / ?~579)
소성왕(昭聖王 / ?~800)
애장왕(哀莊王 / 788~809)
문성왕(文聖王 / ?~857)
헌안왕(憲安王 / ?~861)
김선(金鐥)
김계명(金啓明 / ?~?)
김관장(金官長 / ?~?)
김 선(金 鐥 / ?~?)
김제옹(金悌邕 / ?~?)
김충공(金忠恭 / ?~821)
소지왕(炤知王 / ?~500)
헌강왕(憲康王 / ?~886)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604~661)
효성왕(孝成王 / ?~742)
경순왕(敬順王 / ?~978)
진성여왕(眞聖女王 / ?~897)
성덕왕(聖德王 / ?~737)
경덕왕(景德王 / ?~765)
흥덕왕(興德王 / ?~836)
경문왕(景文王 / ?~875)
정강왕(定康王 / ?~887)
효공왕(孝恭王 / ?~912)
 

 고려시대

김경손(金慶孫 / ?~1251)
김고(金沽 / ?~1123)
김군수(金君綏)
김극기(金克己)
김기손(金起孫 / ?~1268)
김돈시(金敦時 / ?~1170)
김돈중(金敦中 / ?~1170)
김부식(金富軾 / 1075~1151)
김부의(金富儀 / 1079~1136)
김부일(金富佾 / 1071~1132)
김부필(金富弼)
김약선(金若先)
김원충(金元)  

김 의(金 義)
김인경(金仁鏡 / ?~1235)
김자수(金自粹)
김근(金覲)
김의(金義)
김진양(金震陽 / ?~1392)
김태서(金台瑞 / ?~1257)
김인관(金仁琯)
김장유(金將有)
김순웅(金順雄)
김원정(金元鼎 / ? - 10630)
김의진(金義珍 / ?-1070)
김후덕(金侯德) 

김균(金)
김원황(金元晃 / ? - 1062)
김상기(金上琦)
김경용(金景庸 / 1041-1125)
김일연(金一然 / 1206~1289)
김봉모(金鳳毛 / ?-1209)
김승무(金承茂)
김 혼(金 琿 / 1239 - 1311)
김 미(金 米)
김자흥 (金子興 / 1264 - 1323)
김효일(金孝一)
김천서(金天瑞)
김충한(金沖漢)

 조선시대 < 1 > , < 2 >

김 겸(金 謙 / 1375~1425)
김경복(金慶福 / 1550~1622)
김경여(金慶餘 / 1596~1653)
김관주(金觀柱 / 1743~1806)
김광악(金光岳 / 1694~1759)
김구주(金龜柱 / 1740~1786)
김기대(金器大 / 1714~1775)
김남중(金南重 / 1596~1663)
김노겸(金魯謙 / 1781~185)
김노경(金魯敬 / 1766~1840)
김노응(金魯應 / 1757~1824)
김 당(1465~1532)
김덕성(金德成 / 1729~1797)
김도희(金道喜 / 1783~1860)
김두량(金斗樑 / 1696~1763)
김 려(金 礪 / 1675~1728)
김만균(金萬鈞 / ?~1549)
김명원(金命元 / 1534~1602)
김명희(金命喜 / 1788~?)
김사목(金思穆 / 1740~1829)
김상리(金相리 / 1732~1806)
김세민(金世敏 / 1401~1486)
김세필(金世弼 / 1473~1533)
김수렴(金守廉 / 1574~1651)
김승경(金升卿 / 1430~1493)
김시구(金蓍耉 / 1724~1795)
김시양(金時讓 / 1581~1643)
김시진(金始振 / 1618~1667)
김여로(金汝老)
김 연(金 演 / 1552~1592)
김영유(金永濡 / 1418~1494)
김영작(金永爵 / 1802~1868)
김영제(金영濟 / 1883~1956)
김원량(金元亮 / 1589~1624)

김 익(金 瀷 / 1504~?)
김 인(金 寅 / ?~1592)
김재현(金載顯 / 1627~1700)
김 정(金 淨 / 1486~1520)
김정집(金鼎集 / 1808~1859)
김정현(金鼎鉉 / 1591~1675)
김정희(金正喜 / 1786~1856)
김종순(金從舜 / 1405~1483)
김종일(金宗一 / 1597~1675)
김종표(金宗杓 / 1843~1937)
김주신(金柱臣 / 1661~1721)
김진수(金進洙 / 1797~1865)
김창일(金昌一 / 1548~1631)
김창하(金昌河 / ?~?)
김창희(金昌熙 / 1844~1890)
김철희(金喆熙 / 1845~1922)
김춘희(金春熙 / 1855~1926)
김필진(金必振 / 1635~1691)
김한기(金漢耆 / 1728~?)
김한신(金漢藎 / 1720~1758)
김 호(金 虎 / ?~1592)
김홍욱(金弘郁 / 1602~1654)
김홍집(金弘集 / 1842~1896)
김흥경(金興慶 / 1677~1750)
김 수(金 需)
김의열(金義烈)
김자온(金自溫)
김인찬(金仁贊)
김 타(金 陀)
김덕재(金德載)
김위민(김爲民)
김 작(金 綽)
김자양(金自養)
김계돈(金季敦)

김종효(金從孝)
김자간(金自幹))
김인령(金引齡/1462-1504)
김장미(金長美)
김천민(金天民)
김천령(金千齡)
김명해(金明海)
김춘경(金春卿)
김효정(金孝貞)
김 함(金 緘)
김광수(金光粹)
김신민(金新民)
김 확(金 確)
김안민(金安民)
김인손(金麟孫/1479~1552)
김 임(金 任)
김의동(金意同)
김양보(金良輔)
김 요(金 耀)
김가원(金可遠)
김성구(金成九)
김세준(金世俊)
김 선(金 琁)
김치운(金致雲)
김 홍(金 泓)
김 저(1512 ~ 1547)
김천우(金天宇)
김 완(1546~1607)
김용경(金龍慶 / 1678~1738)
김한철(金漢喆)
김한구(金漢耉 /? ~ 1769)
김한록(金漢祿)

 

 근   대

김계선(金桂善/1891~1943)
김교준(金敎準/1884~1965)
김동명(金東鳴/1900~1968)
김돈희(金敦熙/1871~1936)

김석창(金錫昌/1876~1950)
김용원(金庸源/1892~1934)
김종남(金宗南/?~?)
김준현(金俊鉉/1918~1961)

김중건(金中建1889~1933)
김태석(金台錫/1875~1953)
김태원(金泰源/900~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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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 1 >                           
 

김수충(金守忠)
김숙흘종(金肅訖宗)
김순원(金順元)
김알지(金閼智 / 65~?)
김 양(金 陽 / 808~857)
김양도(金良圖 / ?~670)
선덕왕(宣德王)
김양순(金良順(亮詢) / ?~847)
김언경(金彦卿)
헌덕왕(憲德王 / ?~826)
김 영(金 穎)
김용춘(金龍春)
신무왕(神武王 / ?~839)
김운경(金雲卿)
김웅원(金雄元)
김육진(金陸珍 / ?~?)
김은거(金隱居 / ?~775)
김의충(金義忠 / ?~739)
김인문(金仁問 / 629~694)
김입지(金立之 / ?~?)
김정종(金貞宗 / ?~?)
희강왕(僖康王 / ?~838)
김지성(金志誠 / 652~?)
김헌장(金憲章 / ?~?)
김헌정(金憲貞 / ?~?)
김효방(金孝芳 / ?~?)
김효양(金孝讓 / ?~?)
김후직(金后稷 / ?~?)
 

 

김가기(金可紀 / ?~859)

신라의 도교가(道敎家)·학자. 제38대 원성왕 때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때 사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도술(道術)을 닦고, 종남산 자오곡  (終南山子午谷)에  은둔하여 화초와 도리 (桃李)를 가꾸며 《선경 (仙經)》과 《도덕경(道德經)》을 즐겨 읽었다.   858년 당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여 자기가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영문대시랑(英文臺侍郞)이 되어 이듬해 2월 15일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황제가 이상하게 여겨 사자를 파견하여 동정을 살폈는데, 그  날이 되자  과연 오색구름이 영롱한 가운데 그가 홀연히 승천하였다고 한다.

김개원(金愷元)

신라의 왕족. 이름을 예원(禮元)이라고도 한다.  무열왕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의 생질.   655년  (무열왕 2)  이찬(伊2)이 되고, 667년 당나라 고종의 칙령으로 장군이  되어 요동 전역(戰役)에 참가하여 대아찬(大阿2)에  올랐으며,  이듬해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이 되었다. 683년 신문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신목왕후(神穆王后)로 맞이하게 되자,  왕의 명으로 그 집에 가서 딸을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였다. 695년(효소왕 4) 상대등에 올랐다

혜공왕(惠恭王 / 756~780)

신라의 제36대 왕(재위 765∼780). 성명 김건운(金乾運). 경덕왕의 큰아들. 어머니는 서불한(舒弗)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金氏). 8세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太后)가 섭정을 하였고, 당나라와 친교를 맺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768년 당나라 대종(代宗)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도,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아 궁중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768년 일길찬(一吉2) 대공(大恭)의 모반을 비롯하여, 770년 대아찬(大阿2) 김융(金融)이 모반을 일으켰으며, 775년 이찬(伊2) 김은거(金隱居)가 모반을 일으켰다.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하였으나, 왕비와 함께 난군(亂軍)에게 피살되었다.

원성왕(元聖王 / ?~798)

신라 제38대 왕(재위 785∼798).  성명 김경신(金敬信). 비(妃)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淑貞夫人).    780년(혜공왕 16) 이찬(伊飡) 때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 그 공로로 선덕왕 즉위 뒤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을 계승, 왕위에 추대된 왕의 족자(族子)  주원(周元)이 홍수로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은 대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으며, 788년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790년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봉덕사(奉德寺) 남쪽에 묻혔다.

김관장(金官長)

통일신라 초기의 대신.   대아찬(大阿2)으로 680년(문무왕 20) 금마저(金馬渚:전북 익산)의 고구려 유민 안승(安勝)에게 가서 신라왕의 교지(敎旨)·교서(敎書)를 전하였으며, 687년(신문왕 7) 사벌주(沙伐州:경북 상주)의 총관(摠管)이 되었다

김구도(金仇道)

신라 초기의 장군.    미추왕(味鄒王)의 아버지. 172년(아달라왕 19)파진찬(波珍)에 오르고,  185년(벌휴왕 2) 좌군주(左軍主)가 되고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188년 백제의 군대를 모산성(母山城)에서 막고 189년 백제군을 구양(狗壤)에서 격파하였다. 190년 백제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했으나, 도리어 패하여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아들 미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263년(미추왕 2)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김구리지(金仇梨知)

신라의 대신.   내물왕의 6대손이고,  사다함(斯多含)의 아버지. 급찬(級飡) 벼슬을 지냈다.

김군관(金軍官 / ?~681)

통일신라 초기의 장군·대신. 신문왕비(神文王妃)의 아버지. 김유신(金庾信)과  김인문(金仁問)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661년(문무왕 1) 남천주총관(摠管)이 되어 고구려 원정에 출정하였다.   663년  아찬(阿飡)이 되어 한천주(漢川州:경기 광주) 도독을 지내면서  삼국통일에 공을 세우고 상대등에 올랐다. 681년 김흠돌(金欽突)의 모반사건을 보고하지 않은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

김 귀(金 貴)

통일신라 민애왕 때의 대신.  838년(희강왕 3)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김균정(金均貞 / ?~836)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원성왕의 손자. 신무왕·헌안왕의 아버지. 802년(애장왕 3) 대아찬(大阿飡)이 되고,  812년(헌덕왕 4)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였다. 822년 이찬(伊飡)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을 성주에서 격파하였다. 835년(흥덕왕 10) 상대등이 되었으나, 이듬해 왕이 후사 없이 죽자 종질(從姪) 제륭(悌隆)과 왕위다툼을 하다가, 김이홍(金利弘) 등에게 살해되었다.  아들 우징(祐徵)이 신무왕이 되자 성덕대왕(成德大王)에 추봉되었다.

김 기(金 耆 / ?~758)

통일신라 시대의 정승. 이찬(伊飡)의 관등으로서, 755년(경덕왕 14) 7월 조량(朝良)의 후임으로 시중(侍中)이 되어 국정을 총찰하였다.  758년 정월 사망하여 시중 재임기간은 2년 6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 사이 관리 봉급을 토지로 분급하는 녹읍제(祿邑制)를 부활시켜  녹봉제의 개혁을 시도하고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김대렴(金大廉)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차(茶)를 가져온 사신. 828년(흥덕왕 3)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왔으며,  흥덕왕이 이것을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명령하였다.  차는 이전부터 있었으나 대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며, 그가 차 종자를 가지고 온 이후부터 성하였다.

김대문(金大問)

통일신라시대의 유학자  저술가. 진골귀족 가문 출신. 704년(성덕왕 3)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을 지냈다.  저서로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 등이 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계림잡전》은  역대의 설화를 모아 놓은 책으로 《삼국사기》를 집필하는 데 많이 이용되었고,   《고승전》은 유명한 승려의 일생을 적은 저술이었다. 《악본》은 가무(歌舞)와 관계된 책이었고, 《화랑세기》는 신라 화랑의 전기였으며,  《한산기》는  한산주도독으로 있으면서 지방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저술들은 신라 중대의 문화 수준이 단순히  중국 것을 모방한 단계를 벗어나 신라의 독특한 문화전통과 생활경험을 토대로 하는 데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불교는 원효(元曉)·원측(圓測)·의상(義湘)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수립하였고, 아울러 유학도 통일기 이후 강수(强首)·설총(薛聰) 등을 거치면서 정치이념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신라인으로 하여금 문화형성에 대한 자신을 갖게 하였다.   김대문은 이 같은 신라의 문화적 능력에 대한 신뢰와 전통에 대한 확인을 통해  자기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함으로써 통일신라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대비(金大悲)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722년(성덕왕 21) 당(唐)나라 홍주(鴻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역사(力士)  장정만(張淨滿)에게 돈 2,000냥을 주어 조계사(曹溪寺)의  육조(六祖)인 육조탑(六祖塔)에서 선종(禪宗) 혜능(慧能)의 두골(頭骨)을 훔치게 하여,  그 두골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현재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의 탑전(塔殿)에 있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그것이라고 전한다.

김대성(金大城 / 700~774)

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가. 재상을 지낸 문량(文亮)의 아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세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이 설화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김덕지(金德摯)

울산김씨의 시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29세손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935년(경순왕 9)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아,   처자를 버리고 개골산(皆骨山:겨울의 금강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해인사에 들어가 스스로 범공(梵空)이라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그는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져 학성(지금의 울산)으로 수관(受貫)함으로써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자세하게 상고할 수 없으나, 그의 14세손인 환(環)이 고려 충숙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학성군에 봉해짐에 따라,    그의 후손이 본관을 울산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도나(金道那)

통일신라시대의 사신(使臣).  벼슬은 급찬(級飡)이다. 689년(신문왕 9) 일본 왕   덴무[天武]의 조상(弔喪)을 위한 사신으로 갈 때, 명총(明聰)·관지(觀知) 등의 학승(學僧)과 함께 금동아미타상·금동관세음보살상 등을 가지고 가서 일본의 불교전파에 공헌하였다.

민애왕(閔哀王 / ?~83)

신라 제44대 왕(재위 838∼839). 성명 김명(金明).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민애왕(敏哀王)이라고도 한다. 835년(흥덕왕 10) 대아찬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  836년 제륭(悌隆)과 균정(均貞)이 왕위를 다툴 때, 제륭을 도와 왕(僖康王)이 되게 하고 자신은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38년 시중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과 함께  희강왕을 협박,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아버지 충공(忠恭)을 선강대왕(宣康大王), 어머니 박씨귀보부인(朴氏貴寶夫人)을 선의태후(宣懿太后)라 추시(追諡)하고, 처 김씨는 윤용왕후(允容王后)라고 하였다.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이 청해진(淸海鎭)으로 가서  진장(鎭將) 장보고(張保皐)에 의탁해 있었는데,  민애왕이 즉위하자 장보고의 힘을 빌려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민애왕은 같은 해 12월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고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김무(金武)

신라의 의사. 호 한기(漢紀:旱岐). 관등 파진찬(波珍飡). 《니혼쇼키[日本書記]》에만 나오는 인물로,  414년(실성왕 13) 일본 민교왕[允恭王]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약방문(藥方文)에 의하여 왕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관등이 파진(波鎭)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파진찬의 약칭 파진(波珍)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김문량(金文亮(良) / ?~711)

신라 성덕왕 때의 중시(中侍).  대성(大城)의 아버지.  706년 중시에 임명되었다.  대성이  그의  명복과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불국사 석굴암 창건을 발원(發願)했다고 한다.

김문영(金文穎)

통일신라 초기의 장군. 일명 문영(文永). 660년(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킬 때,  독군(督軍)으로  김유신(金庾信)의 막하(幕下)에서 공을 세웠다. 668년(문무왕 8) 대아찬(大阿)으로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이 되어 사천원(蛇川原)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으로 진격,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683년 이찬(伊), 694년(효소왕 3)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김문왕(金文王 / ?~665)

신라 때의 왕족. 태종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의 동생.  648년(진덕여왕 2)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 되었다.   655년(태종무열왕 2) 귀국하여 이찬(伊飡)을 거쳐, 658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661년 백제부흥군과 사비성(泗侁? 부근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문정(文正), 《책부원구(冊府元龜)》 《신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등에는 문왕(文王),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는 문왕(文汪)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文武王 / ?~681)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성 김씨.  이름 법민(法敏). 태종무열왕·문명왕후(文明王后)의 맏아들, 비(妃)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650년( 진덕여왕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을 받았고, 654  년태종무열왕 1)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655년  태자로 책봉 되었으며, 660년  나,당(羅唐)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분전,  백제를 격멸하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고, 이듬해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그뒤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의 백제 부흥운동을 저지하였다.   668년 다시 나, 당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왕제(王弟) 인문(仁問)은  당나라의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으나,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은 물론  백제의 옛 땅까지도 자국 영토로 삼으려 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하였다. 고구려 유민(遺民)의 부흥운동을 원조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여, 677년 그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완수하였다. 이때부터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등장하였다. 문무왕은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 데 힘을 기울여 664년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唐制)에  따르게 하였고, 또 당악(唐樂)을 수입하였다.  674년 당나라의 역술(曆術)을 본떠 신력(新曆)을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675년 동인(銅印)을 만들어 중앙 백관(百官)과  지방의 주군(州郡)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676년 의상(義湘)으로 하여금 경북 영주시 부석면(浮石面)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하였다. 681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경주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에 안장(安葬)하였다.

김법선(金法宣)

통일신라의 왕족. 내물왕의 8대손. 벼슬은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현손(玄孫)  경신(敬信)이 원성왕에 오르자, 현성대왕(玄聖大王)에 추봉되었다.

김사공(金思恭)

통일신라 성덕왕(聖德王) 때의 대신.  파진찬(波珍飡)의 관등이던 718년(성덕왕 17) 효정(孝貞)의 후임으로 중시(中侍)가 되어 720년 퇴임하였다.  이찬(伊飡)이던 728년에는 노쇠한 배부(裴賦)의 후임으로 상대등(上大等)에 오르고, 732년 12월 각간(角干)으로 장군에 임명되었다.

김사양(金思讓)

신라의 관리.  703년(성덕왕 2) 아찬(阿飡)으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갔다.  이듬해 3월 귀국할 때, 인도 의학의 대요(大要)가 들어 있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을 가져와 왕에게 바쳐 의학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김사종(金嗣宗)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신문왕(神文王)의 동생.   728년(성덕왕 27)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신라인의 당나라 국학(國學)에의 입학을 요청하는 국서를 전하였다. 당나라 현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과의(果毅)라는 무관직에 임명하여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김석(金錫)

의성김씨의 시조.  신라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의 아들. 고려 태조의 외손자.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28대손.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복속한 후  얻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다 (다섯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  고려에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정하였다.

김수충(金守忠)

신라의 왕족. 성덕왕의 아들.  714년(성덕왕 13) 견당대감(遣唐大監)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숙위하였다. 당나라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아 집·비단을 하사받았다. 717년 공자와 10철(哲) 및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쳤다.

김숙흘종(金肅訖宗)

신라의 왕족.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의 둘째 아들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둘째 아들.  진흥왕(眞興王)의 아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只召夫人)이다. 즉 지증왕의 큰아들인 법흥왕은 왕통을 이었으나 딸만 있어, 그 딸 지소부인이 법흥왕의 아우이며 숙부가 되는 입종갈문왕과 혼인하여 진흥왕과 숙흘종을 낳은 것이다.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은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서현(金舒玄)과 혼인하여 김유신을 낳았으므로,  숙흘종은 김유신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김순원(金順元)

신라의 대신.  698년(효소왕 7) 대아찬(大阿飡)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700년 이찬(伊飡) 경영(慶永)의 반란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720년(성덕왕 19) 딸 소덕(炤德)을 성덕왕의 후비로 보내고, 739년 딸 혜명(惠明)을 외손자인 효성왕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런  이중적 혼인관계로 큰 외척세력가로 성장하였다.

김알지(金閼智 / 65~?)

경주김씨의 시조. 65년 탈해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 신하 호공(瓠公)을 시켜 가보게 하였다.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미추왕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고 함으로써,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알지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지라는 말은 어린아이,   즉 아기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후대에  부친 해석이므로 당대에도 그렇게 쓰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또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 설화에서 혁거세거서간(居西干)이 알에서 나와  처음 입을 열 적에 스스로 알지거서간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로써 알지는 곡물 또는   곡물에 들어있는  신령(神靈)을 나타내는 말이고 특정의 인명이 아닌 농업의 신 또는 그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는 알지의 알은 금(金)을 나타내는 말이고 지는 존장자(尊長者)에 붙이는 존칭어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도 한다. 알지의 의미야 어쨌든  이 설화는 김씨 부족의 시조 출현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그가 석씨 시조인 탈해왕에 의해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김씨의 등장과 독점이 가장 늦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김 양(金 陽 / 808~857)

신라의 왕족. 자 위흔(魏昕).  828년(흥덕왕 3) 약관(弱冠)의 나이로 고성태수(固城太守)가 되고, 이어 중원대윤(中原大尹)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 균정(均貞)과 제륭(悌隆:僖康王)이  왕위 쟁탈전을 벌이자 균정을 돕다가 실패하여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839년(민애왕 2) 균정의 아들 우징(佑徵:神武王),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張保皐)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대구(大丘:大邱)에서  왕을  시해하고 우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신무왕이 죽은 후 문성왕(文聖王:신무왕의 아들)을 옹립하였으며, 소판 겸 창부령(蘇判兼倉部令)시중 겸 병부령(侍中兼兵部令) 등을 지내고, 공검교위위경(公檢校衛尉卿)에 올랐다.  서발한 (舒發翰)에 추증되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김양도(金良圖 / ?~670)

신라 중기의 장군. 660년(태종무열왕 7) 백제 정벌에 공을 세워 대아찬(大阿2)이 되고,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으로부터 백제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661년(문무왕 1)  백제 잔민이 공격해오자 품일(品日)충상(忠常)과 함께 사비성(泗侁?扶餘)을 지켰다. 668년(문무왕 8)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종군하였으며,신라군은 이적(李勣)의 당나라군과 합세,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669년(문무왕 9)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함부로 다스린 데 대해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당제(唐帝)에게 사실을 밝히러 갔다가 이듬해 당나라 서경(西京)에서 옥사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났다.

선덕왕(宣德王)

신라 제37대 왕(재위 780∼785). 내물왕(奈勿王)의 10대손. 성 김(金), 휘(諱) 양상(良相).  해찬(海2)   효방(孝芳)의 아들이다. 성덕왕(聖德王)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 김씨 소생.  비(妃)는 각간 양품(良品)의 딸 구족부인(具足夫人)이다.  780년 혜공왕(惠恭王)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대등(上大等)으로 있던 양상이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난중에 혜공왕이 죽자 양상이 즉위하였다.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  (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의 봉작을 주었다.    유언대로 불법에 따라 화장하고 뼈를 동해에 뿌렸다.

김양순(金良順(亮詢) / ?~847)

통일신라시대의 대신.  836년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은 후 왕위 다툼이 벌어져 김제륭(金悌隆)이 김균정(金均貞)을 죽이고 희강왕이 되자, 837년 이미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에게 의탁해 있던 김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을 찾아가 합세하였다. 839년 2월 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신무왕으로 즉위하였다가 5개월 만에 죽고 신무왕의 태자 문성왕이 즉위하자, 840년 이찬(伊飡:2등관)에 올랐다. 843년에는 시중(侍中)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해임되었으며,  847년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 등과 함께 모반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김언경(金彦卿)

신라의 서예가. 보조(普照)의 제자로 병부시랑(兵部侍郞)전중대감(殿中大監)을 역임하였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머리에서 7행까지는 김원(金)이  해서(楷書)로 썼고,  7행의 선(禪)자 이하는 행서로 썼다.

헌덕왕(憲德王 / ?~826)

신라의 제41대 왕(재위 809∼826).  성명 김언승(金彦昇). 소성왕(昭聖王)의 동생.   비(妃)는 각간(角干) 예영(禮英)의 딸 귀승부인(貴勝夫人). 790년(원성왕 6) 당나라에 다녀와 대아찬(大阿2)이 되고,  이듬해  역신(逆臣)  제공(悌恭)을 죽인 공으로 잡찬(2)에 승진하였다. 794년 시중(侍中)을 거쳐, 이듬해 이찬 으로서 재상에 올랐다.  애장왕(哀莊王)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으며, 801년(애장왕 2)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09년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한 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으로 책봉받고, 이듬해 제방(堤防)을 수리하여 농사를 장려하였다. 또한 왕자 헌장(憲章)을  당나라에 보내어  금,은으로 만든 불상(佛像)과 불경을 바치고, 당나라 순제(順帝)의 명복을 비는 등 친당(親唐)정책에 힘썼다. 819년 당나라 헌종(憲宗)의 청으로 운주(州:山東省)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 3만을 파견하였으며,  822년  웅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을 평정하고,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의 모반을 진압하였다.  이듬해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수(白水)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북쪽의 군민(郡民) 1만을 동원하여 패강(浿江:大同江)에 장성(長城) 약 3백리를 쌓게 하였다. 능은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있다.

김 영(金 穎)

신라의 문신. 관등은 급찬(級飡)을 지냈다. 효공왕 때 창부시랑(倉部侍郞)으로 있으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갔다. 이때 유학생 8명을 데리고 갔으며,   만기가 된 학생 김의선(金義先) 등 4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한 일도 있으며 문장이 뛰어나 보림사보조선사비(寶林寺普照禪師碑)·월광사원랑선사비(月光寺圓郞禪師碑) 등의 비명(碑銘)을 찬(撰)하였다.

김용춘(金龍春)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일명 용수(龍樹). 진지왕의 아들.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622년(진평왕 44) 이찬(伊飡)으로 내성사신(內省私臣)이 되었다.   629년 대장군으로 부장(副將)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淸州)을 공격,  5,000여 명을 살해하고 성을 함락시켰다.  635년(선덕여왕 4) 왕명으로 주현(州縣)을 순무(巡撫)하고, 그 아들(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오르자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신무왕(神武王 / ?~839)

신라 제45대 왕. 성 김(金). 휘 우징(祐徵). 원성왕(元聖王)의 증손,   희강왕(僖康王)의  종제(從弟). 어머니는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는 진종부인(眞從夫人). 828년(흥덕왕 3) 대아찬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가 831년 면직, 834년 다시 시중이 되었으나 이듬해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이 되자 사임,  836년(희강왕 1) 흥덕왕이 죽어 희강왕이 왕위를 탐내자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에게로 가 은신,   839년(민애왕 2) 4월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같은해 7월에 병사하였다. 능은 경주시 동방동(東方洞)에 있다.

김운경(金雲卿)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821년(헌덕왕 13)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우감문위수부병조참군(右監門衛率府兵曹參軍)·연주도독부사마(州都督府司馬)를 지냈다. 841년(문성왕 3) 선위부사(宣慰副使)로 귀국하여 문성왕에 대한 책봉칙서를 전달하였다.

김웅원(金雄元)

통일신라시대의 장군.  이찬(伊2)으로 811년(헌덕왕 3) 완산주도독(完山州都督)이 되었으며,  819년 당나라 운주절도사(州節都使)  이사도(李師道)의 반란에 순천장군(順天將軍)으로 3만의 원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건너가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822년(헌덕왕 14) 웅천도독(熊川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키자, 잡찬(2)으로 균정(均貞)·우징(祐徵)과 함께 3군을 평정하였다.

김육진(金陸珍 / ?~?)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진골 출신이다. 관등이 대나마(大奈麻)이던 803년(애장왕 4) 왕명을 받들어 무장사(藏寺)에 세운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의 비문을 지었다. 그 뒤 대아찬(大阿飡)에 올라, 809년 당(唐)나라에서 소성왕(昭聖王)의 책봉조책(冊封詔冊)을 보내주고 왕의 숙부 언승(彦昇) 등에게 문극(門戟)을 내려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왕명에 의해 비문을 쓰거나 사신이 된 것으로 미루어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보이며, 그가 지은 비문의 글로 미루어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문장력의 소유자인 것을 알 수 있다.

김은거(金隱居 / ?~775)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관등이 이찬(伊飡)에 이르러 767년(혜공왕 3)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8세에 즉위하여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하던 혜공왕에 대한 책명(冊名)을 청하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듬해 7월 대공(大恭)·대렴(大廉)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고, 그해 10월 시중(侍中)에 올라 백관을 총관하였다. 그러나 770년 대아찬 김융(金融)의 난을 진압하고, 그해 12월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正門)이 시중에 올랐다. 775년 6월에는 그 스스로 난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었다. 그의 난은 모반이 아니라, 권신들에게 찬탈된 왕권을 되찾고자 권신들의 제거를 위하여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김의충(金義忠 / ?~739)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경덕왕의 장인. 서불한(舒弗)을 거쳐 735년(성덕왕 34)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가, 현종(玄宗)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토점유에 대한 인정을 받고 귀국하였다. 737년(효성왕 1) 아찬(阿飡)으로 중시(中侍)가 되었으며, 이벌찬까지 승진하였다.

김인문(金仁問 / 629~694)

신라의 장군·외교가. 자 인수(仁壽).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문무왕의 아우. 651년(진덕여왕 5)에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여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 되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뒤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조직에 성공했고, 660년(태종무열왕 7)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멸망시켰고, 파진찬(波珍)·각간(角干)으로 승진되어 당나라에 머물렀다. 665년(문무왕 5년) 숙위하던 김문왕(金文王)이 죽자, 제5차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66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으로부터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에 임명되고, 668년(문무왕 8)에 귀국하여 20만 군사를 동원,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9년(문무왕 19)에는 당경(唐京)에 머물면서, 진군대장군행우무위위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이 되었다. 690년(신문왕 10) 보국대장군상주국임해군개국공좌우림군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이 되고, 694년(효소왕 3) 당경(唐京)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영구는 신라에 호송되고 효소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 추증(追贈)되었다. 유학의 대가로도 이름을 떨쳤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隸書)에도 능하였다.

김입지(金立之 / ?~?)

통일신라의 문장가. 825년(헌덕왕 17) 왕자 김흔(金昕)에 인솔되어 당(唐)나라에 들어간 12명의 숙위유학생(宿衛留學生)이다. 다른 유학생과 함께 당나라의 관청인 홍로시(鴻'A寺)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외국유학생으로서 수도에서 숙위를 하면서 국자감(國字監)에서 수업하였으며, 뒤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885년에는 한림랑(翰林郞)으로 추성군태수(秋城君太守)에 있으면서 충남 보령시의 《성주사비문(聖住寺碑文)》을 썼다. 또 원(元)나라의 조자앙(趙子昻)이 찬탄한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의 찬자(撰者)이기도 하다.

김정종(金貞宗 / ?~?)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713년(성덕왕 12) 2월 조공사(朝貢使)로서 당나라에 갔다. 이때 당나라 현종(玄宗)은 누문까지 나와 그를 접견하였고, 귀국할 때 성덕왕을 ‘표기장군 특진 행좌위위 대장군 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계림주자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驃騎將軍特進行左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鷄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732년 이찬(伊飡)의 관등에 있으면서 장군에 임명되고, 효성왕이 즉위하자 737년 3월 최고관직인 상대등에 올랐다. 741년(효성왕 5) 왕이 참관한 노병(弩兵) 검열을 주관하였다.

희강왕(僖康王 / ?~838)

신라 제43대 왕(재위 836∼838). 성 김(金). 이름 제륭(悌隆)·제옹(悌). 원성왕의 손자이며, 이찬(伊2) 김헌정(金憲貞)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包道夫人). 비는 대아찬(大阿2) 충공(忠恭)의 딸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다. 흥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과 왕위 다툼을 하다가 시중(侍中) 김명(金明:민애왕), 아찬(阿2) 이홍(利弘) 등의 도움으로 균정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김명을 상대등(上大等),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여 정권을 맡겼으나, 838년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측근자를 살해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능은 경주의 소산(蘇山)에 있다.

김지성(金志誠 / 652~?)

통일신라의 문신. 그의 생애에 관하여는 아버지가 일길찬(一吉飡) 인장(仁章)이며, 어머니가 관초리부인(觀肖里夫人)이고, 67세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은 없으나, 은퇴한 뒤 감산사(甘山寺)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82)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 미륵상의 광배(光背)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그는 지략(智略)이 없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다가 형벌을 받을 뻔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시랑직에서 물러난 것도 개혁의 실패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미타상의 명문을 통하여 그가 감산사를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게 된 동기가 부모의 은공을 갚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은퇴한 후에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老莊思想)에도 심취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신라 중대의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널리 퍼진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헌장(金憲章 / ?~?)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아들. 형제가 있다거나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809년 그의 아버지와 숙부, 즉 언승(彦昇)·옹제(邕悌) 형제가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탈취하였을 때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듬해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이때 그는 금·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가서 805년에 죽은 당나라의 선대 황제 순종(順宗)의 명복을 빌었다. 그에게 왕위는 돌아가지 않고 숙부 경징(景徵:흥덕왕)이 제42대 왕위를 계승하였다.

김헌정(金憲貞 / ?~?)

통일신라의 종실. 원성왕(元聖王)의 손자. 이찬 예영(禮英)의 아들. 희강왕(僖康王)의 아버지. 초노(草奴)라고도 한다. 807년(애장왕 8)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809년 7월 누이동생 귀승부인(貴勝夫人)의 남편 김언승(金彦昇)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헌덕왕(憲德王)으로 즉위함에 따라 이듬해 정월 시중에서 물러났다. 819년 병들어 나라 일을 집행하기가 어려워, 아직 70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왕은 70세에 이르는 중신에게 내리는 금식자단장(金飾紫檀杖)을 하사하였다. 836년 그의 아들이 희강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이듬해 익성대왕(翼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자손은 희강왕 이후 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그의 형 균정(均貞)의 자손과 왕위계승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김효방(金孝芳 / ?~?)

통일신라 선덕왕(宣德王)의 아버지. 각간(角干) 원훈(元訓)의 아들. 내물왕의 9세손. 부인은 성덕왕(聖德王)의 딸 사소부인(四炤夫人) 김씨. 관등은 해찬(海飡:波珍飡)에 이르렀다. 780년 아들 양상(良相)이 선덕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추존(追尊)되고, 그의 부인은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봉되었다.

김효양(金孝讓 / ?~?)

통일신라 원성왕(元聖王)의 아버지. 내물왕의 12세손. 이찬(伊飡) 위문(魏文)의 아들. 부인은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 생전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간수하다가 아들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관등은 일길찬(一吉飡, 또는 대각간에 이르렀다. 아들 경신(敬信)이 후사 없이 죽은 선덕왕의 뒤를 이어 785년 원성왕으로 즉위하자, 그와 부인은 각각 명덕대왕(明德大王)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다. 또한 시조대왕(始祖大王)·태종대왕·문무대왕 및 그의 부친 흥평대왕(興平大王:추존)과 함께 새로 정해진 오묘(五廟)에 향사되었다.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아들 원성왕을 포함한 이후의 신라 19명의 왕 중 16명(53·54대 왕은 제외)이 그의 자손이었다.

김후직(金后稷 / ?~?)

신라 진평왕 때의 충신. 지증왕의 증손. 진평왕을 섬겨 이찬(伊飡)으로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 왕이 사냥을 즐겨 정사를 소홀히 하므로 이를 염려하여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가 병들어 죽을 무렵 세 아들을 불러놓고, 신하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죽게 되니 내가 죽거든 그 시체를 왕이 사냥을 다니는 길목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 뒤 왕이 사냥을 갔는데, 길가에서 사냥을 하지 말라는 가냘픈 소리가 들리므로 시종에게 물어, 그의 유언임을 알았다. 왕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다시는 사냥을 가지 않고 국사에 힘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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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 2 >                
 

헌안왕(憲安王 / ?~861)
김선(金鐥)
김계명(金啓明 / ?~?)
김관장(金官長 / ?~?)
김 선(金 鐥 / ?~?)
김제옹(金悌邕 / ?~?)
김충공(金忠恭 / ?~821)
소지왕(炤知王 / ?~500)
헌강왕(憲康王 / ?~886)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604~661)
효성왕(孝成王 / ?~742)
경순왕(敬順王 / ?~978)
진성여왕(眞聖女王 / ?~897)
성덕왕(聖德王 / ?~737)
경덕왕(景德王 / ?~765)
흥덕왕(興德王 / ?~836)
경문왕(景文王 / ?~875)
정강왕(定康王 / ?~887)
효공왕(孝恭王 / ?~912)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

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 성 김(金), 휘(諱) 덕만(德曼),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진평왕(眞平王)의 맏딸.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634년(선덕여왕 3)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이어서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비담(毗曇)·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유언에 의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진덕여왕(眞德女王 / ?~654)

신라 제28대 왕(재위 647∼654). 휘(諱) 승만(勝曼).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인 갈문왕 국반(國飯)의 딸.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金春秋)를 중국 당(唐)나라에 보내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649년 당나라를 본떠 복제(服制)를 개편하였다. 650년 법민(法敏)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친히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고, 같은 해에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652년 김춘추의 둘째아들 인문(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왕이 죽은 뒤 사량부(沙梁部:慶州)에 묻혔는데, 당 고종(高宗)은 비단 300필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했다.

마의태자(麻衣太子)

신라 56대 경순왕의 태자. 935년(경순왕 9)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皆骨山:金剛山)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증왕(智證王 / 437~514)

신라 제22대 왕(재위 500∼514). 본래의 칭호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성 김(金). 휘(諱) 지대로(智大路:智度路).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의 아들. 어머니는 눌지왕(訥祗王)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 소지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왕위에 추대되었다. 502년 순장법(殉葬法)을 폐지하고 농사를 장려, 우경법(牛耕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503년 국호를 ‘신라’로 개정하고, 왕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왕이라고 칭하게 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504년 상복(喪服)제도를 제정하였고, 다음해에 주(州)·군(郡)·현(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에는 군주(軍主)를 두었다. 512년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공취(攻取)하였다. 죽은 뒤에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이것이 한국 시법(諡法)의 시초이다.

미추왕(味鄒王 / ?~284)

신라의 제13대 왕(재위 262∼284). 성 김씨(金氏). 이름 미조(未照)·미소(未召). 구도(仇道)의 아들, 김알지(金閼智)의 6대손.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이칠(伊柒)의 딸 박씨(朴氏), 비(妃)는 조분왕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 조분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다. 267년과 283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괴곡성(槐谷城)을 각각 공격해왔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한편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內治)에도 힘썼다.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

자비왕(慈悲王 / ?~479)

신라 제20대 왕(재위:458∼479). 원래의 칭호는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이며 눌지왕(訥祗王)의 맏아들. 어머니는 아로부인(阿老夫人)으로 실성왕(實聖王)의 딸 김씨(金氏). 비(妃)는 미사흔(未斯欣)의 딸. 459년(자비왕 2) 왜병이 병선 1백여 척으로 월성(月城)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463년 2월에도 왜병이 경남 양산(梁山)의 삽량성(良城)에 침입하자 벌지(伐智)·덕지(德智) 등에게 명하여 대파시켰으며, 7월 대규모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하였다. 한편 왜인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470년 이후 일모성(一牟城)·사시성(沙尸城) 등 많은 성을 축조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467년에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전함(戰艦)을 수리하게 하였고, 475년 명활성(明活城)에 이거(移居)하였으며, 476∼477년 계속하여 왜병이 침입하였으나 매번 이를 격퇴하였다.

내물왕(奈勿王 / ?~402)

신라 제17대 왕(재위 356∼402). 성 김씨.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 비(妃)는 미추왕(味鄒王)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 미추왕에게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 뒤를 이었다. 364년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벌여 세우고, 용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일축하였다. 381년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堅)에게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은 뒤 중국문물 수입에 힘써,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문화가 들어왔고 한자(漢字)도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다음해 왜적 침입으로 서울이 포위되었으나 이를 물리쳤고, 395년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실성왕(實聖王 / ?~417)

신라 제18대 왕(재위 402∼417). 실주왕(實主王)·실금왕(實金王)이라고도 한다.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어머니는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 이리부인(伊利夫人), 비는 미추왕(味鄒王)의 딸 아류부인(阿留夫人). 392년(내물왕 37)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401년 귀국, 내물왕이 죽고 태자가 어리므로 추대받아 즉위하였다.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 수호(修好)를 맺고, 405년 명활산성(明活山城)에 침입한 왜병(倭兵)을 물리쳤으며, 408년 정벌을 계획하였다가 서불한(舒弗) 미사품(未斯品)의 건의로 중지하였다. 417년 내물왕의 어린 태자였던 눌지(訥祗)를 시기하여 고구려 사람을 시켜 죽이려다가 눌지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실성왕의 왕호(王號)가 ‘실성이사금(實聖尼師金)’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으로 되어 있다.

눌지왕(訥祗王 / ?~458)

신라 제19 대 왕(재위 417∼458). 성은 김씨(金氏). 눌지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17대 내물왕(奈勿王)이며, 제18대 실성왕(實聖王)의 딸을 비(妃)로 맞았다. 자신을 해치려는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418년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볼모로 간 동생 복호(卜好)를 데려왔으며, 또 박제상(朴堤上)을 일본에 보내 역시 볼모로 간 다른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박제상은 일본을 속이고 미사흔을 빼돌린 사실이 발각되어 잡혀 죽었다. 미사흔의 귀국 이후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나 모두 막아냈다.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백제에 원병을 보냈다. 재위 기간에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법흥왕(法興王 / ?~540)

신라의 제23대 왕(재위 514∼540). 성 김(金). 이름 원종(原宗). 지증왕의 아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 비(妃)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 왕위에 오르자 시법(諡法)을 제정하고, 517년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520년 율령(律令)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고, 521년 양(梁)나라와 국교를 열었다. 522년 가야국(伽倻國)이 청혼하자,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출가시켰다. 523년 감사지(監舍知) 19인을 임명하였으며, 524년 남부지방을 순행(巡行)하고 황무지를 개척하여 군사당주(軍師幢主)를 두고, 525년 사벌주(沙伐州)에 군주(軍主)를 두었다. 527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으며, 531년 상대등 벼슬을 새로 두어 국사(國事)를 총리하게 하였다. 532년 본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정하였다. 능은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있다.

진흥왕(眞興王 / 534~576)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 성 김(金). 휘 삼맥종(f麥宗). 일명 심맥부(深麥夫). 법호 법운(法雲). 지증왕(智證王)의 손자,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 어머니는 법흥왕(法興王)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비는 사도부인 박씨(朴氏). 법홍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할 때 태후, 즉 법흥왕비가 섭정하였다. 541년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에 임명, 백제에 대해 화친정책을 썼으며 551년(진흥왕 12) 개국(開國)이라고 개원(改元)하였다. 그해 3월에는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泥文)을 불러들여 음악 연주를 듣고 역시 같은 해에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다. 553년 백제가 점령했던 한강 유역의 요지를 공취(攻取)하여, 거기에 신주(新州:廣州)를 설치하였다. 554년 백제 성왕(聖王)의 군사를 격퇴하고,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561년 이사부의 공으로 대가야(大伽倻)를 평정하고, 이어 주위의 침입에 대비, 한강 유역에 주군(州郡)과 강력한 군단을 설치하고, 이들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는데, 창녕(昌寧)·북한산·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 등의 비가 지금까지 전한다. 565년 중국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면서 아울러 불교의 경론(經論) 1,700여 권을 보내왔다. 566년 기원(祇園)·실제(實際)의 두 절을 지었으며, 같은 해에 황룡사(皇龍寺)도 준공했다. 568년 대창(大昌)으로 개원(開元)하였는데, 572년 다시 홍제(鴻濟)로 고쳤다. 같은 해에 전사한 장병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팔관연회(八關筵會)를 개최하였다. 574년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절의 구층탑, 진평왕(眞平王)의 옥대(玉帶)와 함께 신라 삼보의 하나로 꼽힌다. 576년 비로소 화랑제도를 창시했는데, 이것이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군사적·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장차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이다.

진평왕(眞平王 / ?~632)

신라 제26대 왕(재위 579∼632). 성 김(金). 휘 백정(伯淨:白淨). 진흥왕(眞興王)의 손자.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현종(金玄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 즉위 후 584년(진평왕 6)에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 수(隋)나라에게 공물을 바치며 수교하였다. 618년 수나라가 망하자 621년 당(唐)나라와 수교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대내적으로는 위화부(位和府)·선부서(船府署)·예부(禮部)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원광(圓光)·담육(曇育) 등 명승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도 힘썼다.

신문왕(神文王 / ?~692)

신라 제31대 왕(재위 681~692). 휘 정명(政明)·명지(明之). 자 일초(日). 문무왕의 맏아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 비는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 665년(문무왕 5) 태자에 책봉,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후,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 김흠돌을 주살(誅殺)하고 비 김씨를 폐위시켰다. 682년 위화부령(位和府令) 2명을 두어 선거(選擧) 사무를 맡게 하고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683년(신문왕 3)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또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을 소판으로 기용하여 김(金)씨 성(姓)을 하사하였고, 이듬해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분산, 거주하게 하였다. 685년 9주를 정비하였고,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 봉성사(奉聖寺)·망덕사(望德寺)를 창건하였으며, 항복한 고구려 유민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689년에는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조(租)를 주기로 개정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과 당(唐)나라에 사신이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문화의 흥륭정책을 도모하여 설총(薛聰)과 강수(强首)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효소왕(孝昭王 / 643~702)

신라 제32대 왕(재위 692∼702). 성 김씨(金氏). 휘(諱)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큰아들. 어머니는 일길찬(一吉飡) 흠운(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 691년(신문왕 11) 태자로 책봉되고, 즉위하자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신라 보국대장군(新羅輔國大將軍)·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봉해졌다. 모든 관제를 정비하고, 당·일본 등과 수교하였으며, 692년 좌·우 이방부(左右理方府)를 좌·우 의방부(左右議方府)로 고쳤다. 693년 처음으로 의학박사(醫學博士)를 두었으며, 이듬해 송악(松嶽)·우잠(牛岑:黃海道 金川)의 두 성(城)을 축조하고, 695년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하여 699년 창부(倉府)를 두었다. 앞서 695년(효소왕 4) 음력 11월을 정월이라 정하였다가 700년 다시 1월을 정월로 정하였고, 이찬(伊飡) 경영(慶永)의 모반을 평정하였다. 세자가 없어서 동생 융기(隆基)가 왕위를 이었다.

진지왕(眞智王 / ?~579)

신라의 제25대 왕(재위 576∼579). 성 김(金). 휘 사륜(舍輪)·금륜(金輪). 진흥왕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 비(妃)는 오공(烏公)의 딸 지도부인(知道夫人). 백제와 불화하여 자주 침공을 받았으나,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 상대등(上大等) 거칠부(居柒夫)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중국의 진(陳)나라와 수교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다. 능은 경주(慶州)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

소성왕(昭聖王 / ?~800)

신라 제39대 왕(재위 798∼800). 휘(諱) 준옹(俊邕). 원성왕(元聖王)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어머니는 성목왕후(聖穆王后) 김씨. 비는 대아찬(大阿) 숙명(叔明)의 딸인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 원성왕의 태자 인겸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요절(夭折)하자 왕세손으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으나 재위 1년 7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이후부터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심해졌다.

애장왕(哀莊王 / 788~809)

신라의 제40대 왕(재위 800∼809). 성 김씨. 휘(諱) 청명(淸明)·중희(重熙). 소성왕과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의 맏아들. 13세에 즉위하였으나 숙부 김언승(金彦昇)이 섭정하였다. 801년에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묘당(廟堂)을 세우고, 802년에는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일본과 우호를 증진하고, 807년에는 공식(公式:法規) 20여 조를 반포하였다. 809년 섭정으로서 실권을 장악한 김언승의 반란 때 살해되었다.

문성왕(文聖王 / ?~857)

신라의 제46대 왕(재위 839∼857). 성명 김경응(金慶膺). 신무왕·정계부인(貞繼夫人)의 태자, 비(妃)는 위흔(魏昕)의 딸 소명왕후(炤明王后). 이때는 신라의 쇠퇴기로 귀족들간에 왕위쟁탈전이 성행하였으므로, 재위 연간에 많은 반란이 있었다. 841년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이 반란을 일으키고, 846년 청해진대사(大使) 장보고(張保皐)가 자기 딸을 왕비로 삼게 하려다가 실패한 데 대한 보복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847년 양순(良順)·흥종(興宗) 등이 모반하였으며, 849년 이찬(伊飡) 김식(金式)·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즉위 초에는, 장보고가 청해진대사로서 청해장군(淸海將軍)이 되어 남해일대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을 성하게 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였다. 그가 안전항해를 보장해 주었으므로 사신·승려들의 왕래도 많았고, 당나라와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능은 경주 공작지(孔雀址)에 있다.

헌안왕(憲安王 / ?~861)

신라의 제47대왕(재위 857~860). 성 김(金). 이름 의정(誼靖)·우정(祐靖). 신무왕의 이복동생.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 김씨(金氏). 859년(헌안왕 3) 전국에 흉년이 들자 백성의 구원에 힘썼고, 제방을 쌓아 농사를 장려하였다.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景文王)을 맏사위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능은 경주 공작지(孔雀趾)이다.

김선(金鐥)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시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28대손.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복속한 후 맞이한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고려 조정에 의해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언양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김계명(金啓明 / ?~?)

통일신라시대의 재상. 경문왕(景文王)의 아버지. 희강왕(僖康王)의 아들. 어머니는 갈문왕 충공(忠恭)의 딸 문목왕후(文穆王后). 부인은 신무왕(神武王)의 딸 광화부인(光和夫人). 838년 희강왕이 민애왕(閔哀王)에게 살해되어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였으며, 848년(문성왕 2) 파진찬(波珍飡)의 관등으로 위흔(魏昕)의 뒤를 이어 시중이 되어, 861년 경문왕이 즉위할 때까지 13년 간 재직하였다. 866년 정월 의공대왕(懿恭大王)에 추봉되고 부인은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가 되었다. 이후 통일신라 왕통은 효공왕까지 그의 자손 5명에 의해 계승되고, 마지막 왕 경순왕도 그의 4대손이 된다.

김관장(金官長 / ?~?)

통일신라 초기의 대신. 대아찬(大阿2)으로 680년(문무왕 20) 금마저(金馬渚:전북 익산)의 고구려 유민 안승(安勝)에게 가서 신라왕의 교지(敎旨)·교서(敎書)를 전하였으며, 687년(신문왕 7) 사벌주(沙伐州:경북 상주)의 총관(摠管)이 되었다.

김 선(金 鐥 / ?~?)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시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28대손.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복속한 후 맞이한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고려 조정에 의해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져 그의 후손들이 언양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김제옹(金悌邕 / ?~?)

신라의 왕족. 원성왕의 손자. 소성왕·헌덕왕의 동생. 809년(애장왕 10) 이찬(伊2)으로, 형 언승(彦昇)과 함께 난을 일으켜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언승을 헌덕왕에 오르게 하였다.

김충공(金忠恭 / ?~821)

통일신라의 왕족·중신. 민애왕의 아버지. 808년(애장왕 9) 당(唐)나라로부터 문극(門戟)을 받았다. 817년(헌덕왕 9) 이찬(伊2)의 품계로 시중(侍中)이 되고, 821년 상대등(上大等)으로 승진하였으나 그 해 여름 병으로 죽었다. 아들 명(明)은 838년 1월(희강왕 3) 왕을 죽게 하고 자립(自立)하여 민애왕이 되었다. 딸 정교(貞矯)는 희강왕의 비(妃:文穆夫人)가 되었다.

소지왕(炤知王 / ?~500)

신라 제21대 왕(재위:479∼500). 일명 조지(照知)·비처(毗處). 자비왕의 맏아들. 비는 선혜(善兮)부인. 480년 말갈족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고, 481년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하여 북변을 침공하여 호명(狐鳴) 등 7성(城)을 탈취해갔으며 이듬해 왜인이 해변을 침범하였다. 484년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왔으나 백제와 연합하여 이를 모산성(母山城)에서 격파하였으며, 486년 왜인의 재침이 있었다. 이후 백제와는 화평을 유지하여 이벌찬(伊伐2) 비지(比智)의 딸을 백제왕에게 보냈다. 487년 신궁(神宮)을 나을(奈乙)에 세웠고, 각 지방에 우편역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 왕이 월성(月城)으로 옮겼다. 490년 시장을 개설하였다. 495년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 공격하자 원병을 보내 이를 구하였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침공하자 신라는 고구려군을 이하(泥河)에서 격파하였다.

헌강왕(憲康王 / ?~886)

신라의 제49대 왕(재위 875∼886). 성명 김정(金晸). 경문왕·문의왕후(文懿王后)의 아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즉위하자 문치에 힘썼으며, 876년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큰 법회)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878년 당나라에 조공하여 희종(僖宗)에 의해 신라왕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반란을 도모한 일길찬(一吉2) 신홍(信弘)을 처형하였다. 880년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으나,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604~661)

신라 제29대 왕(재위 654∼661). 성 김(金). 휘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 이찬(伊2) 용춘(龍春:龍樹)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 무열왕(武烈王)이라고도 한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에 청원하여 당나라가 백제 정벌의 대군을 파견하자, 왕자 법민(法敏:文武王)과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고, 이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키다가 죽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專制化)가 확립되었고, 또한 크게 성장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모방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구서당(九誓幢)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로 군사조직이 강화되는 등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또, 김유신의 매부(妹夫)가 됨으로써 경주김씨 왕실과 김해김씨와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효성왕(孝成王 / ?~742) 

신라 제34대 왕(재위 737∼742). 성 김(金). 이름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 비는 이찬(伊2) 순원(順元)의 딸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 즉위 후 당현종(唐玄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고, 739년 동생 헌영(憲永)을 태자로 책립하였다. 이듬해 후궁(後宮)이 왕비의 질투로 살해된 것에 분개한 후궁의 아버지인 파진찬(波珍2) 영종(永宗)이 모반하자 이를 평정했다. 죽은 뒤 유언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 화장, 그 골분(骨粉)은 동해에 뿌려졌다.

경순왕(敬順王 / ?~978)

신라의 왕(재위 927∼935). 성 김(金). 이름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아버지는 이찬(伊2)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에 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897)

신라의 제51대 왕(재위 887∼897). 성 김(金). 휘(諱) 만(曼)·원(垣). 경문왕(景文王)의 딸, 헌강왕(憲康王)·정강왕(定康王)의 누이동생. 정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888년(진성여왕 2)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명하여 향가집(鄕歌集)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게 했는데,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여왕은 위홍과 사통하고 궁중에 미소년을 끌어들여 음행을 일삼았으며, 뇌물을 받는 등 궁중의 풍기를 문란케 하였다. 891년 지방에서는 조세가 걷히지 않고 병제(兵制)가 법대로 시행되지 않아, 나라 안이 소란해져 지방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였다. 이 때 북원(北原)에서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봉기하자, 이를 토평(討平)하려다가 도리어 실패하였고, 892년에 완산(完山:全州)에서 견훤(甄萱)이 일어나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에 이르렀다. 여왕은 895년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책립하였다가, 897년 6월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자에게 양위한 뒤 그 해에 죽었다. 능은 경주(慶州)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있다.

성덕왕(聖德王 / ?~737)

신라 제33대 왕(재위 702∼737). 초명은 천중(天中). 휘(諱)는 융기(隆基)·흥광(興光).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 비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 성정왕후(成貞王后), 계비는 이찬(伊2)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 계비에게서 승경(承慶:孝成王)과 헌영(憲英:景德王)의 소생을 보았다. 717년에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孔子)와 10철(哲) 72현(賢)의 초상화를 대학(大學)에 두었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었으며, 당나라 문화수입에 힘써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다. 732년에는 발해를 치고자 김사란(金思蘭)을 당나라에 보냈으나 눈으로 길이 막혀 중단하였다. 이때 정식으로 패강(浿江:大同江) 이남의 땅을 판도로 하였다.

경덕왕(景德王 / ?~765)

신라 제35대 왕(재위 742∼765). 성 김(金). 이름 헌영(憲英). 성덕왕(聖德王)의 아들이고, 효성왕(孝成王)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덕태후(炤德太后)이다. 비(妃)는 이찬(伊2) 순정(順貞)의 딸 김씨(金氏)와 서불한(舒弗)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金氏)이다. 전 왕인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739년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제도·지명·관직 등을 당나라 식으로 개편하고, 당나라와 교역을 활발히 하여 산업발전에 힘써서 신라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을 정비하였고, 국학(國學)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고 천문박사(天文博士)·누각박사(漏刻博士)를 설치하였다. 또한 불교의 중흥에도 노력하여, 754년 황룡사종(皇龍寺鐘)을 주조하고, 석굴암(石窟庵)의 축조를 비롯하여 불국사(佛國寺)·굴불사(掘佛寺)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의 수축과 탑·불상의 제작에 힘썼다. 능은 경북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부지리(鳧池里)에 있다.

흥덕왕(興德王 / ?~836)

신라 제42대 왕(재위 826∼836). 성 김(金). 이름 경휘(景徽). 초명 수종(秀宗)·수승(秀昇). 원성왕의 손자이며 헌덕왕의 동생으로, 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 김씨(金氏). 819년(헌덕왕 11) 이찬(伊2)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822년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갔다. 즉위하자 당(唐)나라에 사신을 파견, 당 문종(文宗)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고, 828년(흥덕왕 3) 대아찬(大阿2) 김우징(金祐徵)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고,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이 해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서 재배, 이때부터 차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다. 834년 복색제도(服色制度)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였다. 유언에 따라 경주시 안강읍 북쪽에 있는 장화부인, 즉 정목왕후(定穆王后)의 능에 합장되었다.

경문왕(景文王 / ?~875)

신라 제48대 왕(재위 861∼875). 성 김(金). 이름 응렴(膺廉:凝廉). 아버지는 아찬(阿2) 계명(啓明), 어머니는 신무왕(神武王)의 딸 광화부인(光和夫人), 할아버지는 희강왕(僖康王)이다. 비는 헌안왕(憲安王)의 큰 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아들은 황(晃:정강왕)·정(晸:헌강왕)·윤(胤), 딸은 만(曼:진성여왕)이다.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었고, 여왕 선덕(善德)·진덕(眞德)의 예를 따르지 않게 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한 뒤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왕비를 문의왕후(文懿王后)로 책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봉했다. 신라의 쇠퇴기를 당하여 빈번히 일어나는 중앙귀족의 모반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기에 힘썼다. 한편 사신을 당(唐)나라에 파견하여 긴밀한 유대를 맺었고, 황룡사탑(皇龍寺塔)을 수축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으나, 재위 중에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많아 백성이 곤궁하였다.

정강왕(定康王 / ?~887)

신라 제50대 왕(재위 886∼887). 휘(諱) 황(晃). 경문왕(景文王)의 둘째 아들. 형 헌강왕(憲康王)이 후사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887년(정강왕 2)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어 청강(聽講)하였으며 이찬(伊2) 김요(金)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887년 7월 재위 2년 만에 죽으면서 누이동생만(曼:眞聖女王)에게 전위(傳位)하였다. 능은 경주 보리사(菩提寺) 남동쪽에 있다.

효공왕(孝恭王 / ?~912)

신라의 제52대 왕(재위 897∼912). 성 김(金). 이름 요(嶢). 정강왕(定康王)의 서자. 어머니는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비는 이찬(伊2) 우겸(又謙)의 딸 김씨. 893년(진성여왕 9) 태자에 책봉되고, 897년 진성여왕이 죽자 즉위, 898년에 궁예에게 패서도(浿西道)·한산주(漢山州)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기고, 900년 남서쪽의 땅을 견훤에게 빼앗겼으며, 904년 북쪽의 땅을 또 궁예에게 빼앗겨 신라의 영토는 날로 축소되어갔다. 907년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기고도 환락의 세월을 보냄으로써 후삼국(後三國)을 탄생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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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김태서(金台瑞 / ?~1257)
김인관(金仁琯)
김장유(金將有)
김순웅(金順雄)
김원정(金元鼎 / ? - 10630)
김의진(金義珍 / ?-1070)
김후덕(金侯德)
김균(金)
김원황(金元晃 / ? - 1062)
김상기(金上琦)
김경용(金景庸 / 1041-1125)
김일연(金一然 / 1206~1289)
김봉모(金鳳毛 / ?-1209)
김승무(金承茂)
김 혼(金 琿 / 1239 - 1311)
김 미(金 米)
김자흥(金子興 / 1264 - 1323)
김효일(金孝一)
김천서(金天瑞)
김충한(金沖漢)
 

 

김경손(金慶孫 / ?~1251)

    고려시대의 장군. 초명 운래(雲來).1231년(고종 18)에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이 되었다. 이때 몽골군이 침입하자 결사대 12명을 거느리고 분전 격퇴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적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구주(龜州)에 가서 병마사 박서(朴犀)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우세한 병력으로 성을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는 몽골군과 20일간의 분투 끝에 마침내 격퇴하였다. 33년 대장군·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를 거쳐 37년 전라도 지휘사(指揮使)가 되어 나주성(羅州城)에 있을 때, 적도(賊徒)들을 규합하여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고 자칭하며 광주(光州) 등지의 주현(州縣)을 수중에 넣고 세력을 떨치던 이연년(李延年)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이에 별초(別抄) 30명을 이끌고 그들과 싸워 이연년을 죽이고 패주시켰다. 뒤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더욱 민심을 얻게 되었다. 이에 권세를 잡은 최항(崔沆)의 시기를 받아 49년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최항이 계모와 계모의 아들 오승적(吳承績) 등을 죽일 때, 그들과 인척관계라고 트집잡아 바다에 던져 죽임을 당하였다.

김고(金沽 / ?~1123)

    고려의 문신. 신라 종실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시랑평장사 상기(上琦)의 아들. 문하시중 인존(仁存)의 동생. 1104년(숙종 9) 밀진사(密進使)로 요나라에 다녀왔으며, 1109년(예종 4) 좌승선(左承宣)·이부지사(知事), 11년 예부시랑(侍郞)·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듬해 어사대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년 상서이부지사·연영전학사, 17년 대사성·보문각학사·문덕전학사 등을 지내고, 18년 예빈경(禮賓卿)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이르렀다. 이듬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22년(인종 즉위) 추밀원지사를 거쳐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김군수(金君綏)

    고려시대의 문신. 호 설당(雪堂). 부식(富軾)의 손자. 1194년(명종 24) 문과에 장원급제, 이듬해 명종이 문신을 모아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1위로 뽑혔다.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고종 초에 시랑(侍郞)으로서 각 도의 찰방사(察訪使)가 되어 민정을 시찰하였다. 1218년 거란병 침입 때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숙주(肅州:평남 평원)·영청(永靑:평남 평원) 등지에서 400여 명을 죽이고 말 50여 필을 빼앗았다. 이듬해 의주에서 한순(韓恂)·다지(多智) 등이 난을 일으키자, 금(金)나라 원수 우가하(于哥下)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의 목을 베게 하여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병마사 김취려(金就礪)에게 알리지 않아서 체포되고, 한남(漢南:水原)에 유배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전남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을 찬하였으며, 묵죽을 잘 그렸다. 《동문선》에 시 몇 편이 전한다.

김극기(金克己)

    고려 명종 때의 시인. 호 노봉(老峯). 어려서부터 문명(文名)이 높았고, 입을 열면 시가 나왔다고 한다. 문과(文科)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그대로 초야에 묻혀 시(詩)를 즐겼다. 명종 때 학행(學行)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으나 얼마 후 죽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의하면 그의 문집이 150권이나 된다고 한다. 저서에 《김거사집(金居士集)》이 있다.

김기손(金起孫 / ?~1268)

    고려의 문신.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태서(台瑞)의 아들. 1251년(고종 38) 우복야(右僕射), 이어 문하성 지사(知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59년 원종이 즉위하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겸임하고, 이어 이부판사를 거쳐 68년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물러났다.

김돈시(金敦時 / ?~1170)

    고려시대의 문신. 중서령(中書令) 부식(富軾)의 아들. 돈중(敦中)의 동생. 의종 때 시랑(侍郞)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일으킨 무신의 난 때 살해되었다.

김돈중(金敦中 / ?~1170)

    고려시대의 문신. 중서령(中書令) 부식(富軾)의 아들. 1144년(인종 22) 문과에 장원하고 내시직에 임명되었다. 촛불로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웠는데, 부식이 도리어 정중부를 나무라므로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의종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나, 환관 정함(鄭)을 합문지후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하여 시랑(侍郞)으로 좌천되었다. 67년 좌승선(左承宣) 때 의종이 봉은사에서 연등행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 그의 말이 놀라 한 군사의 화살통에 부딪쳐 화살이 임금의 수레에 떨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죄없는 군인들이 귀양가게 되어 김돈중에게 더욱 원한을 품게 되었다. 70년 정중부가 보현원(普賢院)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살해당하자, 도망하여 감악산(紺獄山)에 숨었으나 종자(從者)의 밀고에 의하여 잡혀 죽었다.

김부식(金富軾 / 1075~1151)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부식·부철(富轍)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38년에 검교태사·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儷文體)에서 당·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시호는 문열(文烈)

김부의(金富儀 / 1079~1136)

    고려 시대의 문신. 자 자유(子由). 초명 부철(富轍). 시호 문의(文懿). 부식(富軾)의 동생. 1097년(숙종 2) 19세로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111년(예종 6) 서장관(書狀官)으로 추밀원부사 김연(金緣)을 따라 송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돌아와 감찰어사가 되었다. 17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형제국(兄弟國)이 되기를 청하자, 금나라를 회유하기 위하여 화의하자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재상의 저지로 왕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첨사부사직(詹事府司直)이 되어 문학으로 우대를 받았고, 23년(인종 즉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특진하였다. 24년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과 이부·호부·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34년 묘청(妙淸)의 주장을 김부식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다. 이듬해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평서십책(平西十策)을 올리고 좌군수(左軍帥)·추밀원사가 되어 출정하였으며, 평정하고 돌아와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형부상서·보문각대학사·추밀원지사·지제고(知制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수사공·상서좌복야·정당문학·판상서예부사·수국사·주국(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修國史柱國)이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시호는 문의(文懿)

김부일(金富佾 / 1071~1132)

    고려시대의 학자. 자 천여(天與). 시호 문간(文簡).좌간의 대부 근(覲)의 아들. 김부식(金富軾)의 둘째형. 어려서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추밀원사 왕가(王")를 따라 송나라에 가서 명문(名文)으로써 송나라 철종의 찬사를 받았다. 숙종 때 습유(拾遺)·지제고(知制誥)를 거쳐 원주·상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여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예종 때 예부낭중(郞中)이 되었는데, 요나라가 여진을 치려고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모든 대신이 찬성했으나, 김부식과 함께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직후이므로 출병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보문각대제(待制)를 거쳐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왕과 보문각 유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동지사·정당문학·한림원학사승지(樞密院同知事政堂文學翰林院學士承旨)가 되었다. 1127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으며, 뒤에 수태위·개부의동삼사·비서성사·주국(守太尉開府儀同三司書省事柱國)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관후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김부필(金富弼)

    고려시대의 문신. 김부식(金富軾)의 형. 1088년(선종 5) 문과에 급제,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때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척준경(拓俊京) 등과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김약선(金若先)

    고려시대의 문신. 평장사(平章事) 태서(台瑞)의 아들.최우(崔瑀)의 사위.원종비  경순왕후(경순왕후)의 아버지. 1225년(고종 12)에 내전을 수리할 때 그의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할 만큼 고종의 사랑을 받았다. 35년 딸이 원종의 비가 되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다. 최우의 부중(府中) 여자들을 망월루(望月樓) 모란방(牡丹房)에 모아놓고 음란한 짓을 자행하다가, 처의 밀고로 최우에 의하여 여자들은 유배되고 누방(樓房)은 철거되었다. 처도 종과 간통한 사실이 있었는데, 화를 두려워한 처의 무고(誣告)로 최우에게 살해되었다. 뒤에 사실이 밝혀져 장익공(莊翼公)에 추시되었다.

김원충(金元) 

    고려시대의 문신. 문종의 장인.시호는 정간(貞簡). 정종(靖宗)초 1036년(정종 2)에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풍랑을 만나 옹진(甕津)에서 되돌아왔다. 이듬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연호의 반포를 청하고 돌아와 중추원지사에 올랐다. 40년 딸이 정종의 비가 되었으며, 47년(문종 1)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다. 49년 작은딸이 문종의 비가 되자,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판상서형부사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정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김 의(金 義)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공민왕(恭愍王) 때 좌우아 중랑장(左右衙中郞將)을 지낸 국보공(國寶公)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74년(공민왕 23)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공신으로 추앙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고려조 때 명나라 사신을 살해한 사실로 난처해진 조정에서는 변방(邊方)의 수비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를 붙여 그를 정평(定平)으로 유배하였는데, 뒤에 영흥(永興)으로 옮겨 그곳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그가 호인(胡人) ‘야열가(也列哥)’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종문(宗門)에서는 이 사실이 조선조의 사관(史官)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인경(金仁鏡 / ?~1235)

    고려시대의 문신. 시호 정숙(貞肅). 초명 양경(良鏡).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 초에 조충(趙?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判官)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예부낭중(郞中)·추밀원우승선(右承宣)을 거쳐, 1227년(고종 14) 수찬관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撰修)하였다. 그 해 동진(東眞)이 쳐들어오자, 중군병마지사가 되어 의주(宜州:德源)에서 싸우다 패전, 상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형부상서·한림학사에 오르고, 추밀원지사·상서좌복야(樞密院知事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였다. 32년 강화로 천도한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이부상서·감수국사(政堂文學吏部尙書監修國史)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를 겸하였으며, 일반행정에도 뛰어났다. 특히 시에 능하고 예서(隸書)를 잘 썼다.

김자수(金自粹)

    고려 말기의 문신. 자 순중(純仲). 호 상촌(桑村).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해 회교(回敎)를 작성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를 거절한 죄로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전교부령(典校副令)·사재시판사(司宰寺判事)에 이르고, 공양왕 때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상소하였다. 뒤에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좌상시(左常侍)·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김근(金覲)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부식(富軾)의 아버지. 1080년(문종 34) 호부상서 유홍(柳洪), 예부시랑 박인량(朴寅亮)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그와 박인량이 지은 척독(尺牘)·표장(表狀)·제영(題? 등을 보고 감탄한 송나라 사람들이 두 사람의 시문집 《소화집(小華集)》을 간행하였다. 예부시랑으로 있던 86년(선종 3)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자위(李子威)와 함께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고, 뒤에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에 이르렀다. 아들 넷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모두 등과하였으며, 예종은 부일(富佾)·부식·부의(富儀) 3형제가 모두 문한(文翰)에 시종하였다 하여 그의 부인을 대부인으로 책봉하고 늠속(稟粟)을 하사하게 하였으나, 이미 나라의 은혜를 크게 입었다 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김의(金義)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공민왕(恭愍王) 때 좌우아 중랑장(左右衙中郞將)을 지낸 국보공(國寶公)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74년(공민왕 23)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공신으로 추앙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고려조 때 명나라 사신을 살해한 사실로 난처해진 조정에서는 변방(邊方)의 수비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를 붙여 그를 정평(定平)으로 유배하였는데, 뒤에 영흥(永興)으로 옮겨 그곳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그가 호인(胡人) ‘야열가(也列哥)’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종문(宗門)에서는 이 사실이 조선조의 사관(史官)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진양(金震陽 / ?~1392)

    고려 말기의 문신. 자 자정(子靜). 호 초려(草廬).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학업에 힘써,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그 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어 많은 치적을 올렸다. 문하사인(門下舍人)을 거쳐 좌사의(左司議)에 올랐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初)의 옥(獄)이 일어나자 동료들에게 그 중대함을 논하다가, 경솔히 대역(大逆)을 논하고 정론(正論)을 저해시켰다는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좌산기상시를 지냈다. 이확(李擴) 등과 함께 상소를 하여,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변란을 꾸며 민심이 흉흉하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유배시켰다. 다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이성계 일파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김태서(金台瑞 / ?~1257)

    고려시대의 문신. 시호 문장(文莊).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봉모(鳳毛)의 아들. 추밀원부사 경손(慶孫)의 아버지. 그의 손녀가 원종(元宗)의 비(妃)가 되어 충렬왕을 낳았다.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명종·신종(神宗)·희종(熙宗)·강종(康宗)·고종(高宗)의 5대왕을 섬기는 동안 관직이 누진되어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연로하여 물러났다. 비록 유학(儒學)을 전업으로 하였으나 글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품이 탐욕스러워 남의 전답을 함부로 빼앗아 원성이 높았으나, 아들 약선(若先)이 집권자 최우(崔瑀)의 사위였기 때문에 관에서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우가 죽고 그 아들 항(沆)이 정권을 쥐자, 1251년(고종 38) 항이 계모 대씨(大氏)와 계모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죽이면서, 이들과 관계가 있다 하여 그의 집을 적몰(籍沒)하고 유배지에 있던 그의 아들 경손도 살해하였다.

김인관(金仁琯)

    고려 문종때 명신으로    상서도성 좌사랑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 주국 개국자 경조현에 녹작되고 검교태자 태사로 치사하다. 그후 삼중대광상서도성령 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태사공파의 파조이다.

김장유(金將有)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아들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고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다가, 정국(政國)이 어지러워지자 충북보은에 은거 하였다.

김순웅(金順雄)

    고려초 대장군(大將軍).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의 이군(二軍)을 거치고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0, 흥위위(興尉衛), 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등 육위의 장군을 거치고 대장군이되어 안주 홀성주 (황해도)병마사가 되었다.
    경주김씨의 파조(派祖)이며 그의 아들 인위(因渭)는 문익공(文翼公)의 시호를 받은 고려 현종의 국구가 되었다.

김원정(金元鼎 / ? - 10630)

    고려 (문종 17)때 문신으로 문종초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1063년 수태위.문하기중(守太尉門下侍中)이 되었다.

김의진(金義珍 / ?-1070)

    고려(문종24)때 문신으로 1065년(문종19)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등을 역임하여 평자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신(良愼)

김후덕(金侯德)

    고려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9세손(九世孫)이요. 자(字)는 상인(尙仁). 병부시랑(兵部時郞) 김양감(金良鑑)과 한림(翰林) 이용(李容)과 공부시랑(工部時郞) 박시중(朴時中)과 함께 1073년(문종27년) 침잠(沈潛)한 성리학을 일으켜 유림(儒林)의 종맹(宗盟)이 되었다.

김균(金)

    고려말 密直副使(밀직부사)를 하시었고, 本朝(조선)에서는 大光補國崇綠大夫 (대광보국숭록대부).議政府春秋館 左贊成(의정부춘추관 좌찬성)을 지내셨고 忠馱議佐 命開國功臣(충헌의좌명개국공신)으로 鷄林君(계림군)칭호를 받았다. 충헌의 좌명개국공신 1등 15명, 2등 9명, 3등 15명중 제2차 좌목에 올라 있으며, 태종 대왕(太宗大王) 광주(廣州) 유릉신도비(猷陵神道碑) 뒷면에 공신범록 51명중 제28차에 올라있다. 시호는 재숙공(齋肅公)이다.

김원황(金元晃 / ? - 1062)

    고려의 대신. 문종때 공부상서(工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햇다. 시호는 의경(毅敬)

김상기(金上琦)

    고려때 문신. 1084년(선종1)에 이부시랑(吏部時郞)을 거쳐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랐고, 1085년 송나라에 다녀와 좌간의 대부(左諫議 大夫).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러 국사를 편찬했다. 숙종초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다시 태부(太傅)에 승진하였으며 선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김경용(金景庸 / 1041-1125)

     고려의 문신. 병부상서(兵部尙書) 원황(元晃)의 아들. 합문지후(閤門祗候) 광주판관(廣州判官).어사중승(御史中丞)등을 거쳐 1098년(숙종3) 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紙御史臺事)를 지내고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를 역임햇다.
    1105�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太子太師). 수사공(守司空)이 되고 이어 지문하성야. 좌복야. 참지정사(參知政事), 개부의동삼사(開府儀 同三司).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문하시중(門下時中). 상주국(上柱國)등을 지냈다.
    협모위사치리공신(協謀衛社致理功臣)이 되고 수대보(守大保).판상서이형부사(判尙書吏刑部事)로 수태사.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에 봉해진후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이 되었다.

김일연(金一然 / 1206~1289)

    고려시대의 승려·학자. 이름 견명(見明). 자 회연(晦然)·일연(一然). 호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 보각(普覺). 탑호 정조(靜照). 경북 경산(慶山) 출생. 언필(彦弼)의 아들. 1214년(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9년 승려가 되었다. 27년 승과(僧科)에 급제, 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 46년 선사(禪師), 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61년(원종 2) 왕명으로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어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68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 그 맹주가 되었다. 77년(충렬왕 3) 72세에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 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84년 경북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어록(語錄)》 《계승잡저(界乘雜著)》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僧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점송사원(禪門頌事苑)》 등이 있다.

김봉모(金鳳毛 / ?-1209)

     고려 때 문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세린(世麟)의 아들.1176년(명종6)   남방에서 민란이일어나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외국의 방언, 속어에 능하여 금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관반(館伴)이 되어 접대했고, 나라의 대사에는 항상 전례(典禮)가 되어 일을 보았다. 중서문하평장사 태자대부(中書門下平章事 太子大傅)에 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정평(靖平)

김승무(金承茂)

    고려 고종때의 문신. 평장사(平章事) 인경(仁鏡)의 손자. 일찍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을 지냈고, 권신(權臣) 김준(金俊)의총애를 받아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이때 뇌물을 받은 승선(承宣) 허공(許珙)을 탄핵하여 그의 미움을 샀다.

김 혼(金 琿 / 1239 - 1311)

    추밀원부사(樞密院部事)   경손(慶孫)의 아들. 1255년 (고종 42) 18세로 석릉직(碩陵直)이 되어  뒤에 감찰사(監察史)를 거쳐 충열왕때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종제(從弟)로써 총애를 받아 大將軍이 되었다.
    우승지(右承旨). 중찬(中贊) 등을 역임하면서 왕이 원나라에 들어가자 왕을 대신하여 행성(行省)일을 맡아ㅆ다.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이 된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선(忠宣)

김 미(金 米)

    추밀부사(樞密副使) 약선(若先)의 아들. 권신 최우(崔瑀)의 덕으로 1236년 (고종 23)에 내급사(內給事)가 되고, 뒤에 장군(將軍)이 되었다. 최우의 아들 최항이 자기를 해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기선을 제압하려고 숙부 김경손(金慶孫)과 상의 했으나, 경손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이것을 최우에게 밀고하자 잡혀서 고란도에 유배 되었다.

김자흥(金子興 / 1264 - 1323)

    고려 때 문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혼(琿)의 아들. 1303년(충열왕 29)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김원상(金元祥). 오현량(吳賢良)과 함께 간신 송방영(宋邦英)일파를 제거했다.

김효일(金孝一)

    경순왕의 四子 은열공의 16세손으로 고려말기에 장사랑(將仕郞)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찬(仁贊)이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으로 익화군(益和君)에 봉해지고 양근김씨(楊根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는데, 인찬(仁贊)의 아들 가운데 일부는 양근김씨를 승계하고 일부는 경주김씨를 승계하였으므로 후손(後孫)들이 효일(孝一)을 파조(派祖)로 하고 있다.

김천서(金天瑞)

    호(號)는 송은(松慇)으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관악산(冠岳山)으로 은거(隱居)하였다.

김충한(金沖漢)

    1고려 때 충신으로 예의판서(禮儀判書)까지 지냈고, 134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조선조(朝鮮朝)를 섬기지 않았으며, 후에 호남(湖南)에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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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 1 >                 
       

    김상리(金相리 / 1732~1806)
    김세민(金世敏 / 1401~1486)
    김세필(金世弼 / 1473~1533)
    김수렴(金守廉 / 1574~1651)
    김승경(金升卿 / 1430~1493)
    김시구(金蓍耉 / 1724~1795)
    김시양(金時讓 / 1581~1643)
    김시진(金始振 / 1618~1667)
    김여로(金汝老)
    김 연(金 演 / 1552~1592)
    김영유(金永濡 / 1418~1494)
    김영작(金永爵 / 1802~1868)
    김영제(金영濟 / 1883~1956)
    김원량(金元亮 / 1589~1624)
    김유경(金有慶 / 1669~1748)
    김 익(金 瀷 / 1504~?)
    김 인(金 寅 / ?~1592)
    김재현(金載顯 / 1627~1700)
    김 정(金 淨 / 1486~1520)
    김정집(金鼎集 / 1808~1859)
    김정현(金鼎鉉 / 1591~1675)

     

    김 겸(金 謙 / 1375~1425)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익보(益甫). 시호 평원(平原). 월성군(月城君) 수(需)의 아들,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종질.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하고 군기시직장(直長)·교서감승(校書監丞)을 지내고, 1402년(태종 2) 형조전서가 되었다. 뒤에 개성부유후(開城副留後)·한성부윤·동지우군총제·풍해도관찰사·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었다. 1408년 중군총제(中軍摠制)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한성부윤, 20년(세종 2) 개성유후가 되었다. 22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돈령부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25년 명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김경복(金慶福 / 1550~1622)

      조선 중기의 무신. 자 백수(伯綏). 시호 장의(壯毅).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번 오랑캐와 싸워 공을 세웠다. 83년 이탕개(尼湯介)가 침입하자 힘써 싸워 물리치고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그 뒤 장련(長連)현감·이성(利城)현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북평사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키자, 선봉장이 되어 국경인(鞠景仁)을 유인하여 죽였다. 그 뒤 종성부사·영원군수 등을 지냈다. 병조참판이 추증되고, 영흥의 정충사(精忠祠)에 배향되었다.

    김경여(金慶餘 / 1596~165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유선(由善). 호 송애(松厓). 시호 문정(文貞). 이귀(李貴)의 사위.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년(인조 2)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가 되고, 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고향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대간(臺諫)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교역(金郊驛)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49년(효종 1) 대사간이 되고, 김자점(金自點)의 잘못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군사력 배양에 힘썼다. 이어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좌찬성이 추증되고 회덕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배향되었다. 출처와 의리에 분명하였으며,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과 친교가 두터웠다. 문집에 《송애집》이 있다

    김관주(金觀柱 / 1743~1806)

      조선후기의 문신. 자 경일(景日). 시호 문익(文翼).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72년 수찬(修撰)으로서 시파(時派)의 영수인 홍봉한(洪鳳漢)을 탄핵하였으나, 영조의 진노를 얻어 갑산에 유배되었다. 93년(정조 17) 용궁(龍宮)현감에 다시 기용되었다. 순조 즉위 뒤 벽파(僻派)가 득세하면서 중추부첨지사(僉知事)·이조판서·양주목사 등을 두루 거쳐, 1802년(순조 2) 우의정에 올랐다. 1804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다시 수렴청정을 실시하려 하자, 좌의정 이시수(李時秀)와 함께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순조·순원왕후(純元王后)의 국혼을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1806년 대사간 신헌조(申獻朝)의 탄핵을 받고 경흥으로 유배가던 도중, 이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김광악(金光岳 / 1694~1759)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동첨(東瞻)·수이(秀而). 호 독좌와(獨坐窩). 1726년(영조 2) 사마시의 생원과에 장원급제하고, 3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37년 황해도도사, 이듬해 현릉령(顯陵令) 등을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병환이 중해지자 피 섞인 배설물을 입으로 핥아내었고, 상을 당하자 죽을 마시면서 여막(廬幕)의 예를 지켰다. 그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죽었다.

    김구주(金龜柱 / 1740~1786)

      조선 후기의 문신.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서산 출생. 홍양해(洪量海)의 문인. 누이가 영조의 계비(繼妃)가 됨에 따라, 음보에 의하여 벼슬에 올라 궁중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1762년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으며, 67년 강원도관찰사·좌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외조 홍봉한(洪鳳漢)을 모함하여 왕세손의 지위를 위협하였으며, 이때부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하여 벽파의 영수(領袖)로서의 지위에 올랐다.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면서 벽파를 의심하자, 홍국영(洪國榮)에게 접근하여 지난날의 허물을 은폐하려 하였다. 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흑산도에 유배되었고, 79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84년 왕세자 책봉 때 특사령으로 나주에 옮겨졌으나 병사하였다.

    김기대(金器大 / 1714~1775)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덕용(德容). 사복시정(司僕寺正) 구연(九衍)에게 입양되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친정조카가 되었다. 음보로 이천부사(利川府使)가 되었다가,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승지로 특진하였다. 62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63년 9월 한성부우윤에 임명되고, 64년 전은군(全恩君) 돈(墩)·안표(安杓)와 함께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67년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백두산의 제사를 위한 제단을 갑산에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실현되었다. 68년 승지·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역임한 뒤 예조판서를 지냈다.

    김남중(金南重 / 1596~166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백진(白珍). 호 야당(野塘). 시호 정효(貞孝).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어 가주서(假注書)로 광해군에게 입시(入侍)하였다. 23년(인조 1) 검열·전적(典籍) 등을 지내고, 지평(持平)·장령(掌令)에 이르렀다. 36년 병자호란 때 예조참의로서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강화도가 함락된 것에 대한 수장(守將)의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생일에 여러 읍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 41년 대사간으로 기용되고, 44년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56년 춘추관동지사가 되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58년(효종 9) 공조판서, 이어 예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개성부유수에 이르렀다. 저서에 《역대인감(歷代人鑑)》이 있다

    김노겸(金魯謙 / 1781~18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 원익(元益). 호 성암(性菴). 학문에 전념하다가 1814년(순조 14) 진사시에 합격, 뒤에 충청도 홍산현감(洪山縣監)이 되었다. 47년(헌종 13) 조운선(漕運船) 침몰 사건으로 충청도관찰사 조운철(趙雲澈) 등 12명과 함께 견책받았다. 경학(經學)은 물론, 사학(史學)·음악·언어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하였으며, 고증적인 전거(典據)를 위주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문집에 《성암집》이 있는데, 70세 이전에 저술한16권 12책, 그 후의 12권 6책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김노경(金魯敬 / 1766~1840)

      조선 후기의 문신. 자 가일(可一). 호 유당(酉堂). 서예가 정희(正喜)의 아버지.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등용되었다. 승지·이조참판·평안도관찰사등을 두루 거쳐 이조·예조·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809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22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익종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할 때 김로(金?·홍기섭(洪起燮)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휘둘렀다는 죄와, 이조원(李肇源)의 옥(獄)을 밝히지 않았다는 죄로 인하여, 30년에 탄핵을 받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40년 사사(賜死)되었다. 사후 58년(철종 9) 관직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아들 정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에 글씨 《신라경순왕전비》 《신의왕후탄강구묘비(神懿王后誕降舊墓碑)》 등이 있다.

    김노응(金魯應 / 1757~18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유일(唯一). 호 일와(一窩). 시호 정헌(正獻). 1786년(정조 10) 진사에 합격하고, 헌릉참봉을 거쳐 활인서 별제(別提) 등을 지냈다. 장악원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1805년(순조 5)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07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응교(應敎)를 지내고,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1년 대사성,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에 오르고, 22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병조판서·성균관 동지사(同知事)에 이르러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효행·우애가 돈독하고 검소하였다.

    김 당(1465~1532)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옥이(玉耳). 시호 공절(恭節). 1492년(성종 23) 사마시를 거쳐, 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지냈다. 1507년(중종 2) 사간·장령(掌令)을 거쳐, 14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9년 기묘사화 때 호조참판으로서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 숙청에 관여하였으며, 23년 진향사(進香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한성부판윤·우참찬(右參贊) 등을 지내고, 31년 의금부판사·호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 겸 도총관(都總管)이 되었다. 성품이 청렴·솔직하였으나, 지조(志操)가 없었다.

    김덕성(金德成 / 1729~1797)

      조선 후기의 화가. 자 여삼(汝三). 호 현은(玄隱). 화원인 두량(斗樑)의 조카, 화가 종회(宗繪)의 아버지.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으며 화가로서의 그는 특히 김씨 가승(家乘)의 신장상(神將像)을 잘 그렸다. 현재 전하는 《신장도(神將圖)》와 《뇌공도(雷公圖)》 등의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는 입체적인 음영법과 공필(工筆)이 매우 정교하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뇌공도》를 들 수 있다.

    김도희(金道喜 / 1783~1860)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사경(士經). 호 주하(柱下). 시호 효헌(孝憲).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설서(說書)·참의를 지냈다. 이조참판·경기도관찰사·한성부좌윤(左尹)을 역임하고, 38년 형조판서, 42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뒤에 돈령부판사에 이르렀다. 45년(헌종 11) 흉언죄인(凶言罪人)의 처리와 조선에 온 영국군함의 처리방침 및 죄인을 타도로 정배하는 일을 형조에서 관장하지 못하게 하고, 서원을 함부로 건립하는 것을 금하였다. 51년 실록총재관이 되어 《헌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김두량(金斗樑 / 1696~1763)

      조선 후기의 화가. 자 도경(道卿). 호 남리(南里)·운천(芸泉). 화원으로 도화서(圖畵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산수·인물·풍속에 능하였고 신장(神將) 그림에도 뛰어났다. 전통적인 북종화법을 따르면서도 남종화법과 서양화법을 수용한 화가로 대표작에 《월야산수도》가 있으며, 이 밖에도 《춘하도리원호흥도(春夏桃李園豪興圖)》 《월하계류도(月下溪流圖)》 《고사몽룡도(高士夢龍圖)》 《목우도(牧牛圖)》 《맹견도(猛犬圖)》 등이 있다.

    김 려(金 礪 / 1675~1728)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용여(用汝). 호 설재(雪齋). 1705년(숙종 3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좌랑·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경기도도사(都事)·수원부사·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언관(言官)으로 재직시에는 직언을 서슴지 않아, 23년(경종 3) 전라도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25년(영조 1)에 풀려났다. 수원부사로 재임시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하자, 백성의 굶주림을 구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나라의 봉납을 유예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시문을 모은 《설재집》 1권이 전한다.

    김만균(金萬鈞 / ?~1549)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중임(仲任). 직제학(直提學) 천령(千齡)의 아들. 1528년(중종 2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자시강원의 정6품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 31년 홍문관의 수찬(修撰)으로 전직하여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심정(沈貞)의 무리로 몰려 탄핵을 당하고 사직되었다. 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고 그의 일당이 축출된 뒤 재기용되어 시독관(侍讀官)·교리·부응교(副應敎)·장령(章令)·사간(司諫) 등을 지내고, 이어 당상관에 올라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이 되었다. 43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이듬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종2품 예조참판에 승진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고 이어 중추부의 동지사(同知事)로 재임중 죽었다. 부친·본인·아들 3대가 장원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명원(金命元 / 1534~1602)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응순(應順). 호 주은(酒隱). 시호 충익(忠翼). 승지 만균(萬鈞)의 아들. 이황(李滉)의 문인.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 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69년(선조 2) 종성부사가 되고, 내외직을 거쳐 87년 좌참찬으로 의금부지사를 겸임하였다. 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순검사(巡檢使)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로서 임진강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의 침공을 지연시켰다. 평양이 함락된 뒤 순안에 주둔, 행재소(行在所) 경비에 힘썼다. 이듬해 명나라 원병이 오자 장수들의 자문에 응하였고, 그 뒤 신병으로 원수직을 사직, 호조·예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97년 정유재란 때 병조판서로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고 좌찬성·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병서(兵書)·궁마(弓馬)에도 능하였다.

    김명희(金命喜 / 1788~?)

      조선 후기의 서예가. 자 성원(性源). 호 산천(山泉). 노경(魯敬)의 아들이고, 추사(秋史) 정희(正喜)의 아우이며, 형과 더불어 글씨가 뛰어났다. 1810년(순조 10) 진사에 합격, 벼슬은 현령(縣令)에 그쳤다. 22년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일행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저자인 유희해(劉喜海) 및 진남숙(陳南淑) 등과 교분을 맺었다.

    김사목(金思穆 / 1740~1829)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백심(伯深). 호 운소(雲巢). 시호 경헌(敬獻). 음보(蔭補)로 기용된 뒤, 특지(特旨)로 김제군수가 되었다. 1772년(영조 4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부승지를 거쳐, 74년 승지가 되었다. 83년(정조 7)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총융사를 지냈다. 88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우택(雨澤)에 대한 장계를 늦게 올려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고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부사에 제수되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뒤 병조·예조의 판서, 한성부판윤, 의금부판사 등을 거쳐 1808년 우의정, 19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28년 중추부영사 겸 군자감도제조를 역임하였다. 천부적으로 영민·성실하여 낮은 관직이라도 성심껏 봉사하였다. 공직생활 70년 동안 영조·정조·순조 세 임금을 섬겼으며, 원로정승이 되어 회방(回榜:登科回甲)으로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검약을 생활신조로 삼았으며 안일한 생활을 구하지 않는 교훈을 실천에 옮겼다.

    김상리(金相리 / 1732~1806)

      조선 후기의 학자. 자 이흡(而洽). 호 송와(松窩). 함경도 출생.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자 경학의 본원(本源) 공부에 힘썼다. 1776년(영조 52)에 학행으로 천거받아 지릉별검(智陵別檢)이 되고, 이어 돈령부(敦寧府)·예빈시(禮賓寺)의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에 향숙(鄕塾)을 세우고 후진교육에 힘써 사풍(士風)을 진작시키고 북방에 문운을 불러일으켰다. 1830년(순조 30)에 함경도 쌍성영인(寧仁)의 상덕사(尙德祠)에 향사되었다. 문집에 《송와집》이 있다.

    김세민(金世敏 / 1401~1486)

      조선 전기의 문신. 자 백공(伯恭). 시호 양평(良平). 정종의 딸 숙신옹주(淑愼翁主)의 남편. 1418년(태종 18) 돈령부첨지사(僉知事)가 되고, 이어 통정대부·공조참의를 지냈다. 37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충주목사에 제수되고, 42년(세종 24) 한성부윤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48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뇌물수수 혐의로 탄핵을 받아 영광에 유배되었다. 문종 즉위 때 직첩·고신(告身)이 환급되었으며, 문종이 죽자 고부 겸 청시사(告訃兼請諡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57년(세조 3) 대사헌을 거쳐 중추원사·전라도관찰사를 지냈으며, 60년 숭정대부에 올랐고 돈령부판사에 이르렀다. 관직생활 70년 동안 7명의 왕을 차례로 섬겼다.

    김세필(金世弼 / 1473~15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공석(公碩). 호 십청헌(十淸軒)·지비옹(知非翁). 시호 문간(文簡). 1495년(연산군 1)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수찬(修撰)·지평(持平)에 올랐다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응교(應敎)로 기용되고, 부제학(副提學)·광주목사·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을 거쳐, 19년(중종 14)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겨울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가 사사(賜死)되자, 중종의 과오를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에 장배(杖配)되었다. 22년에 풀려났으나, 고향으로 내려가 십청헌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십청집》이 있다.

    김수렴(金守廉 / 1574~1651)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지혼(志渾). 호 야당(野堂). 좌의정 명원(命元)의 아들. 공신의 적자(嫡子)로서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에 초임되었다. 홍산현감으로 있을 때 광해군의 비(妃) 유씨(柳氏)의 오빠인 희발(希發)의 딸과의 결혼을 거절하여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한성부서윤(庶尹)에 복직되었다. 익산군수·안성현감·중추부경력(經歷)·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46년(인조 24) 절충장군(折衝將軍)·중추부첨지사에 오르고, 오성군(鰲城君)에 추봉되었다.

    김승경(金升卿 / 1430~1493)

      조선 전기의 문신. 자 현보(賢甫). 1453년(단종 1) 사마시를 거쳐, 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호조정랑을 지냈다. 성종 때 도승지·한성부우윤(右尹)을 역임하고, 예조참판·대사헌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벼슬길에 오르기 전부터 자질과 명성이 알려졌다. 승정원에 재직할 때 직무에 충실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나 왕으로부터 금띠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좌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추형(追刑)을 받았다.

    김시구(金蓍耉 / 1724~1795)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몽휴(夢休).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그해 보안도찰방(保安道察訪)으로 나갔다가 곧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 58년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으로 좌천되고, 62년 이후 장령(掌令)·돈령부동지사(敦寧府同知事)·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 등을 역임하였다. 67년 전사관(典祀官)이 되어 관북(關北)에 파견되었으며, 72년 승지를 지낸 뒤 주로 외직으로 나가, 80년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전라도관찰사 박우원(朴祐源)의 밀계로 파직되었다. 성리학에 밝았다.

    김시양(金時讓 / 1581~1643)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자중(子仲). 호 하담(荷潭). 초명 시언(時言). 시호 충익(忠翼).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사(司)·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벼슬을 지냈다. 10년(광해군 2)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전라도도사(都事)가 되어 향시(鄕試)를 주관할 때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시제(詩題)를 출제하였다 하여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 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고,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정묘호란 뒤 서북의 경비가 중요시되자, 평안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31년(인조 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도원수(都元帥)·사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41년 《선조실록》을 개수(改修)할 때 중추부판사 겸 춘추관판사로서 참여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전적(典籍)·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溪記聞)》 등이 있다.

    김시진(金始振 / 1618~1667)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백옥(伯玉). 호 반고(盤皐). 좌의정 명원(命元)의 증손. 1644년(인조 22)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47년 사헌부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문학·수찬(修撰)·교리·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59년(효종 10)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62년(현종 3) 승지에 오르고 이어 경기좌도균전사(京畿左道均田使)로 나갔으며, 6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그해 9월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수원부사(水原府使)를 거쳐 형조·예조·호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김여로(金汝老)

      조선 중기의 무신. 병자호란을 겪고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 두 왕자가 선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수행하였다. 청나라가 금주위(錦州衛)·산해관(山海關)을 칠 때 별시위(別侍衛)로 두 왕자를 호종하였다. 44년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하고 이듬해 두 왕자의 귀국이 허락되자, 그 소식을 앞질러 조정에 전달하였다. 그 공로로 별군직(別軍職)을 지내고, 자산(慈山)·덕천(德川)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김 연(金 演 / 1552~1592)

      임진왜란 때 의병장. 자 언홍(彦洪). 호 노암(魯庵). 영천 출생.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최인제(崔仁濟) 등 17의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경주를 수복하기 위해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로 그 자손의 공역이 면제되고, 밀양의 고천사(古川祠)에 배향되었다.

    김영유(金永濡 / 1418~1494)

      조선 전기의 문신. 자 택부(澤夫). 시호 공평(恭平).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正字)에 등용되고, 감찰(監察)·정언(正言) 등을 거쳐 57년(세조 3) 평양부소윤(少尹)이 되었다. 65년 승문원판사, 이듬해 대사성을 역임, 호조참의에 전직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75년(성종 6) 형조참판에 전직,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83년 한성부좌윤, 그 뒤 중추부행첨지사(行僉知事)·개성부유수(留守)·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87년 70세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소청했으나 왕이 불허하여, 형조참판·중추부수지사(守知事)를 지냈다.

    김영작(金永爵 / 1802~1868)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덕수(德). 호 소정(邵亭). 영의정 홍집(弘集)의 아버지. 1838년(헌종 4) 음보로 정릉참봉(靖陵參奉)이 되고, 4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호조·예조·병조의 참판(參判) 및 한성부우윤·대사헌·대사성·홍문관제학(提學)·목사(牧使) 등을 지내고, 고종 초기에 개성부유수(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지방민의 칭송을 받았다. 시문에도 능하여 《소정고》 《청묘의례(淸廟儀禮)》 등의 저서를 남겼다.

    김영제(金영濟 / 1883~1956)

      국악이론가, 가야금·피리의 명인. 호 괴정(槐庭). 충북 괴산(槐山) 출생. 순조 때의 가야금과 정재춤의 명인 김창하(金昌河)가 증조부, 초대 국악사장(國樂師長)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김종남(金宗南)이 양조부, 가야금의 명인 김종표(金宗杓)가 조부이다. 1897년(광무 1) 장례원(掌禮院) 전악(典樂)에 오르고, 1908년(융희 2)에는 궁내부의 국악사(國樂師), 11년에는 이왕직아악사, 28년에는 제4대 아악사장(雅樂師長)에 임명되었다. 가야금이 전공이었으나 편보(編譜)와 악기 개량에도 뛰어났으며, 국악자료의 수집, 악보 정리, 악률(樂律)의 개정 등에 공헌하였다. 또 아악부원양성소(雅樂部員養成所)를 개설하여 후진을 길러내는 한편 승무(僧舞)의 부활에도 힘썼다.

    김원량(金元亮 / 1589~16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명숙(明叔). 호 미촌(村)·율촌(栗村). 시호 강민(剛愍).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3년 이시백(李時白)의 권유로 인조반정 모의에 참여하였으나, 거사 당일에는 가담하지 않고 인조를 맞이하는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논공행상에서 이후원(李厚源)과 함께 극력 사양하였으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호조좌랑을 역임하고, 김집(金集)과 함께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지평(持平)이 되었다. 24년(인조 2) 정찬(鄭燦)이 이괄(李适)의 모반에 대한 고변을 하자, 평소 이괄 부자와 교분이 두터웠던 그는 이괄의 무혐의를 극구 변호하였다. 이괄의 반란이 확실해지자 승지 김자점(金自點)의 주장으로 투옥, 참살되었다. 61년(현종 2) 훈작이 복구되고 호조판서에 추증,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김유경(金有慶 / 1669~1748)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덕유(德裕). 호 용주(龍洲)·용곡(龍谷). 시호 효정(孝貞). 1693년(숙종 19) 사마시를 거쳐, 17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정언(正言)·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숙천(肅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양이(量移)되었다. 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27년 정미환국 때 부사직(副司直)으로서 《숙종실록》 보수(補修)에 반대한다는 소론의 탄핵으로 제주도 대정(大靜)에 안치(安置)되었다. 29년 소론이 물러나자 석방되었으며,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앞서 소론 김일경(金一鏡)이 조작한 임인옥안(壬寅獄案)의 허구를 밝혀 사실(史實)을 다시 쓰라고 상소하였다. 이어 노론 4대신에 대한 무고를 추론(追論)하라고 하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는 극론이라 하여 상소문이 소각되었다. 44년 대사헌이 되어 탕평책을 반대하는 노론계열의 소장세력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46년 좌참찬으로 물러난 뒤, 48년 숭록대부에 특진되었다.

    김 익(金 瀷 / 1504~?)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재청(載淸). 호 북일(北逸).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44년 주서가 되었다. 45년(인종 1) 봉교(奉敎)로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을 겸직,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54년(명종 9) 지평이 되어 당시 민생고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실시되던 금주령 해제를 반대하며 더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57년 함경도암행어사가 되고, 63년 정론(正論)으로 표창받았으며, 66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가 되었다.

    김 인(金 寅 / ?~1592)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 언홍(彦洪). 호 노암(魯菴). 영천 출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카 대해(大海), 유생 최인제(崔仁濟)·이일장(李日將)·정세아(鄭世雅)·정의번(鄭宜蕃)·이영근(李榮根)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고향을 수복한 뒤 경주로 진군하여 다른 의병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벼슬이 추증되고, 밀양의 고천서원(古川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재현(金載顯 / 1627~1700)

      조선 후기의 문신. 자 회백(晦伯). 20세 전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예빈시(禮賓寺)에 전임되었다. 그 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자(正字)·지평(持平)·집의(執義) 등을 지냈다. 89년(숙종 15) 승지로서, 숙종이 희빈장씨(禧嬪張氏) 소생을 원자(元子)로 책봉한 것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출사건이 있자, 반대의 소(疏)를 올리고 두문불출하였다. 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호조참의로 기용된 뒤 좌승지(左承旨)·한성부우윤·호조참판·중추부동지사(同知事)·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留守) 등을 지냈다.

    김 정(金 淨 / 1486~1520)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원충(元?. 호 충암(요?. 시호 문간(文簡). 10세 전에 사서(四書)에 통하고,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순창군수 등을 지냈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고자 상소하였으나 각하되고 유배당하였다. 16년(중종 11)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副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미신타파·향약(鄕約) 시행 등에 힘썼으나 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에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시화(詩畵)에 능하였다. 문집에 《충암문집》, 저서에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다.

    김정집(金鼎集 / 1808~1859)

      조선 후기의 문신. 자 구여(九如). 호 석세(石世). 시호 문정(文貞). 좌의정 사목(思穆)의 손자. 1825년(순조 25) 생원이 되고, 2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가주서(假注書)·설서(說書) 등을 지냈다. 33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46년(헌종 12)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체포하였다. 철종 때 평안도관찰사로 있으면서, 횡포가 심한 온갖 잡세를 혁파하였다. 좌참찬(左參贊)·의금부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사학(史學)에 밝았으며, 충신과묵하여 지방관으로서의 치적이 많았다. 문집에 《석세유고》가 있다.

    김정현(金鼎鉉 / 1591~1675)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중길(重吉). 호 추곡(楸谷)·송림(松林). 1613년(광해군 5)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둔하였다. 인조반정 후 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모봉양을 위하여 외직(外職)을 택하여 다섯 고을을 다스렸다. 부모가 죽은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친구들과 기로계(耆老契)를 만들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중추부동지사·한성부우윤을 거쳐, 75년(숙종 1)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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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 2 >                 
        

    김종효(金從孝)
    김자간(金自幹)
    김장미(金長美)
    김천민(金天民)
    김천령(金千齡)
    김명해(金明海)
    김춘경(金春卿)
    김효정(金孝貞)
    김 함(金 緘)
    김광수(金光粹)
    김신민(金新民)
    김 확(金 確)
    김안민(金安民)
    김인손(金麟孫 / 1479 ~1552)
    김 임(金 任)
    김의동(金意同)
    김양보(金良輔)
    김 요(金 耀)
    김가원(金可遠)
    김성구(金成九)
    김세준(金世俊)
    김 선(金 琁)
    김치운(金致雲)
    김 홍(金 泓)
    김 저(1512 ~ 1547)
    김천우(金天宇)
    김 완(1546~1607)
    김용경(金龍慶 / 1678~1738)
    김한철(金漢喆)
    김한구(金漢耉 /? ~ 1769)
    김한록(金漢祿)

     

    김정희(金正喜 /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예산 출생.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김종순(金從舜 / 1405~1483)

      조선 전기의 문신. 시호 공호(恭胡). 1437년(세종 19) 문음(門蔭)으로 충훈부사승(忠勳府司丞)이 되고, 39년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거쳐 한성부중부령(中部令)·감찰 등을 지냈다. 그 뒤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부사직(副司直) 이보흠(李甫欽)을 사직(司直)에 잘못 승진시킨 사건에 연루되어 논죄되었으나, 공신자손이라 하여 파직에 그쳤다. 그 뒤 복직되어 승문원교리(承文院敎理)·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63년(세조 9)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올랐으며 이어 대사헌·중추부동지사·경상도관찰사·중추부지사를 역임하였다.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김종일(金宗一 / 1597~1675)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관지(貫之). 호 노암(魯庵). 1624년(인조 2) 생원시·진사시에 합격, 2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30년 진주목사, 35년 정언(正言), 36년 병자호란 때 순찰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듬해 10월 소현세자가 심양(潘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사서(司書)로서 수행하였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청(淸)나라 벼슬에 올라 조선에 대해 갖은 횡포를 부리던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의 죄상을 폭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환되어 영덕에 귀양갔다. 43년 풀려났으며, 57년 울산부사를 지냈다. 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에, 허목(許穆)과 함께 3년설을 주장하다가 평해(平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문집에 《노암문집》이 있다.

    김종표(金宗杓 / 1843~1937)

      조선 후기의 가야금의 명인. 자 영조(永朝). 초명 종한(宗漢). 철종·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인 창록(昌祿)의 셋째 아들이고, 고종 때의 가야금의 명수인 종남(宗南)의 아우이다. 1866년(고종 3) 전악(典樂)에 오른 기록이 있으며 특히 덕행을 겸비하고 지조가 굳어 모든 국악인들의 사표(師表)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그의 초상을 난계(蘭溪) 박연(朴堧)의 신실(神室)에 봉안하고 크게 제사지냈다.

    김주신(金柱臣 / 1661~1721)

      조선 후기의 문신. 자 하경(廈卿). 호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 시호 효간(孝簡). 숙종의 장인. 박세당(朴世堂)의 문인.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20년 순안현령으로,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都正), 이어 돈령부영사(領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저서에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차록(隨事箚錄)》 《산언(散言)》, 문집에 《수곡집》 등이 있다.

    김진수(金進洙 / 1797~1865)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치고(稚高). 호 연파(蓮坡)·벽로재(碧蘆齋).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하여 기대를 모았으며 자라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을 벗삼았다. 이러한 것들을 문장으로 표현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여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일찍이 북경(北京)에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접하는 인물·풍속·경치를 내용으로 한 《벽로집》 4권을 저술하였다. 문집에 《연파집》이 있다.

    김창일(金昌一 / 1548~16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 형길(亨吉). 호 사한(四寒). 김근공(金謹恭)의 문인. 1595년(선조 28) 유일(遺逸)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고 이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1601년 홍천현감(洪川縣監)으로 나간 뒤 고산(高山)·고창·금구(金溝)의 현감에 이어, 안락(安樂)·합천의 군수 등 외직을 지낸 뒤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낮출 때 정온(鄭蘊)과 함께 극력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16년 형장(刑杖)의 남용 혐의로 체포된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공술(供述) 초고를 이귀(李貴)와 함께 수정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청도군수(淸道郡守)로 재기용되고, 27년 정묘호란 때 원주에 돌아가 80의 나이에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난이 끝난 뒤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30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학문을 닦아 학식이 뛰어나고 서문에도 능하였다.

    김창하(金昌河 / ?~?)

      조선 후기의 가야금과 춤의 명인. 자 의선(義善). 서울 출신. 유명한 국악 가문 태생으로, 정조(正祖) 때의 국악사 김대건(金大建)의 아들이며, 철종·고종 때의 가야금 명인 김종남(金宗南)의 숙부이다. 정재(呈才)의 안무(按舞)에 뛰어났으며, 1827년 전악(典樂)이 된 뒤 순조의 세자 익종(翼宗)을 도와 악단 구후관(九官)을 조직하여 그 감관(監官)의 칭호를 받았고, 순조(純祖)의 망오(望五)에는 세자를 도와 축하진연(祝賀進宴)의 많은 정재를 지었다. 작품에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ont face="바탕체" size="2" color="navy">조선 후기의 문신. 자 자유(子有)·숙기(叔起). 호 급류정(急流亭). 시호 정헌(靖獻). 서산 출생.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檢閱)·주서(注書)·대사간 등을 지냈다. 경종 때 한성부우윤(右尹)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한성부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다. 탕평책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 30년 좌참찬에 복직되었다.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중추부판사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김종효(金從孝 / 1409~?)

      초명은 달효(達孝),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균()의 손자이며 공호공(恭胡公) 김종순(金從舜)의 아우이다. 태종(太宗) 때 출생하여 세종(世宗) 때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가 되어 세자익위사좌세마(世子翊衛司左洗馬)로 처은 관직에 나간 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오위사직(五衛司直),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세자시강원좌필선(世子侍講院左弼善), 훈련원도정겸군자감부정(訓練院都正兼軍資監副正), 군기시정(軍器寺正), 공조참의(工曹參議), 우림위장(羽林衛將)을 거쳐 문종(文宗) 때 병조참의(兵曹參議), 단종(端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왕위를 찬탈(簒奪)함에 반발하여 상왕(上王: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실패하자 관직을 버리고 뜻을 같이 하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이지대(李之帶) 및 제(弟) 진사(進士) 종우(從禹)와 함께 경주부(慶州府) 남중리(南中里)에 은거(隱居)하였다.

    김 수(金 需)

       고려 말 천서(天瑞)의 아들로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호공(靖胡公)

    김의열(金義烈)

       월성군 수(需)의 동생으로 효성이 지극했으며 참의(參議)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자온(金自溫)

       1401년 (태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냇다.

    김인찬(金仁贊)

       조선때 동지절제사(同知節制使)를 역임하고, 시호는 충밈(忠愍) 죽은ㄱ뒤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다.

    김 타(金 陀)

       1401년 (태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김덕재(金德載)

       조선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 은열공의 12세손으로 조선개국(朝鮮開國)의 보좌공신(補佐功臣)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다가 태조(太祖)를 따라 함흥(咸興)에 갔다가 중산(中山)에 은거하였다.

    김위민(김爲民)

       1401년(태종)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다.

    김 작(金 綽)

       1414년 (태종 14) 문과(文科)에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여,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냇다.

    김자양(金自養)

      자(字)는 선군(善君). 호는 호연당(浩然堂), 정숙공(貞肅公) 인경(仁鏡)의 7세 손이다. 태종조에 문과(文科0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통천군수(通川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잇었음에 그 지방 백성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김계돈(金季敦)

      자양(自養)의 아들로 세종, 문종, 단종조에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역임햇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김종연(金宗連)

       1456년 (세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를 지냇다.

    김인령(金引齡 / 1462 - 1504)

       조선의 문신. 자는 수옹(壽翁). 봉상사정(奉常寺正) 치운(致運)의 아들. 1483년 (성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예조좌랑(禮曹佐郞). 문학(文學) 등을 역임, 1503년(연산군 9)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듬해 박은(朴誾)의 일파라하여 이자건(李自健). 박의영(朴義榮)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 당한 후 임실(任實)에 부처(付處)되어 죽었다.

    김장미(金長美)

      조선때 문신(文臣)으로 시호는 양신(良愼), 계돈(季敦)의 장남이다.    연산(燕山)의 혼정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후에ㅜ다시 부름을 받아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자간(金自幹 / 1439~?)

      초명은치간(致幹), 호는 우은(于隱), 세종(世宗) 때 출생하였으며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균()의 증손이다.그 부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종효(從孝)는 세조(世祖)의 찬탈(簒奪)에 반대하여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고 낙향, 은거(隱居)하다 죽었는데 후일 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세조의 찬탈을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신하들과 그 자손들을 사면(赦免)하면서 다시 관직에 등용하는 회유책(懷柔策)을 쓸 때 통훈대부(通訓大夫) 언양현감(彦陽縣監) 겸 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慶州鎭管兵馬節制都尉)의 벼슬을 받게 되자 은거지인 경주부(慶州府) 남중리(南中里)에서 언양현(彦陽縣) 명촌리(鳴村里)로 이주하여 본향(本鄕)으로 삼고 만정헌(晩定軒)을 건립하였다.

    김천민(金天民)

      1436년 (세종 18) 부사정(副司正)으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진사과로 급제하고,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 통정(通政)에 이르럿다.

    김천령(金千齡)

      조선 문신, 자는 인로(仁老), 통판(通判) 치세(致世)의 아들. 1489년 (성종 20)진사(進士)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전적(典籍).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498년 사가독서(賜假讀書)했다.
      부응교(副應敎)가 되면서부터 언사가 재상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 혹은 좌천 되었으며, 교감(校勘)으로 성절사(聖節使)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병사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앞서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정침(鄭沈)의 가자(加資)를 주장한 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김명해(金明海)

      자는 문관(文觀) 호는 관재, 자양(自養)의 7세손으로, 일찍이 전시에 응하여 을과(乙科)에 뽑혀 예빈시(禮賓寺) 주서(注書)가 되었다.

    김춘경(金春卿)

      자는 명중(明仲). 조선조 개국공신(開國功臣)계림군 균의 증손이며 승의랑(承義郞)으로서 추장문과(秋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럿다.

    김효정(金孝貞)

      1475년 (성종 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김 함(金 緘)

      자는 중묵(仲默), 호는 농은(農慇), 세종 무오(世宗戊午)년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출사(出仕)하여 세조 6년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다.

    김광수(金光粹)

      1423(세종5) 문과(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 )에 이르렀다.

    김신민(金新民)

      전옥부승(典獄副承)으로서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 균의 3세손.  1426(세종8)  문과(文科)에 진사과 (進士科)   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제학(提學) 동지중추 (同知中樞)가 되었다. 대사헌(大司憲) 승경(昇卿)의 부(父)

    김 확(金 確)

      1435년 (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진사과(進士科)에급제하고 감찰(監擦)을 지냈다.

    김안민(金安民)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  균의 3세손.  부(父)는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성(仲誠). 정랑(正郞)으로서 1447년 (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丁科) 3등으로  급제하고 통정(通政)에  판사제(判司帝) 감사(監事)가 되었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追贈)

    김인손(金麟孫 / 1479 ~1552)

      조선의 문신. 자는 정서(呈瑞), 1501 년(연산군 7)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509년(중종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1532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시 유배중인 이종익(李宗翼)의 상소문을 전달하여 파면된 일이 있으며, 예조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참찬(參贊)을 지냈다.

    김 임(金 任)

      자(字)는  중겸(重兼), 1480년(성종11) 무과(武科)에  급제하고1506년 (중종1)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동년(同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冊錄)되고  계성군(鷄成君)에  봉해지고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

    김의동(金意同)

      1428년 (성종13) 장사랑(將仕郞)으로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양보(金良輔)

      1502(연산군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수찬(修撰)을 지냈다.

    김 요(金 耀)

      1496년(연산군) 문과(文科)에 올라 을과(乙科)로 급제,군수를 지냈다.

    김가원(金可遠)

      자(字)는 공망(公望),1510년(중종5) 교수(敎授)로서 식년문과에 병과  (丙科)로 급제,전적(典籍)을 지냈다.

    김성구(金成九).

      자(字)는 기수(奇搜),1522(중종17)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정(學正)을 지냈다.

    김세준(金世俊)

      자(字)는군필(軍弼),1507년(중종2) 사용(司勇)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 선(金 琁)

      자(字) 는 온보(溫甫),1495 년(연산군 1) 진사(進士)가 되고 1507(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치운(金致雲)

      자(字)는 종용(從龍),1524년(중종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교리(校理) 등을역임,참판(參判)에 일르렀다.

    김 홍(金 泓)

      자(字)는 홍지(泓之), 1528년(중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 등을 역임, 통정(通政)에 이르렀다.

    김 저(1512 ~ 1547)

      .조선의 문신, 자는 학광(學光), 이조참판(吏曹參判) 세필(世弼)의 아들. 1539년 (중종 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심한 고문을 받고 삼수(三水)에 유배, 이듬해 사사(賜死)되엇다. 선조 초에 관작이 복구,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천우(金天宇)

      자(字)는 대용(大容),. 1538년(중종3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역임했다.

    김 완(1546~1607)

      자(字)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 자양(自養)의 현손(玄孫)인 공(公)은 일찍이 서경(書經)과 손오병서(孫吳兵書)에 통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올라 사도(蛇渡) 첨사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과 더불어 옥포(玉浦), 한산도(閑山島) 등지에서ㅜ대공(大功)을 세워 척후장(斥候將), 조방장(助防將) 정3품 절충(折衝)에 올랐다.
      1607년 (선조10) 향년 82세에 별세하여 어명(御命)으로 불조묘동인각(不眺廟東麟閣)을세워 봉안치제(奉安致祭)케 했다.

    김용경(金龍慶 / 1678~1738)

      조선의 문신, 자는 이견(而見), 두정(斗井)의 아들, 홍성(洪城)출신,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 유생으로 있다가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경종 초에 정언(正言)을 지내고 영조 초 노론(老論)으로 3사의 벼슬을 거쳐 대사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했다.

    김한철(金漢喆)

      자는 사적(士迪). 1731년 (영조 7) 참봉(參奉)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간(孝簡)

    김한구(金漢耉 /? ~ 1769)

      조선 영조의 장인.시호는 충헌(忠憲), 관찰사 홍욱(弘郁)의 아들, 1759년(영조35) 딸이 계비(繼妃: 정순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176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냇다.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김한록(金漢祿)

      조선 문신(文臣), 자는 여수(汝綏), 호는 한간(寒澗), 영조의 장인 한구(漢耉)의 종제(從第), 충남 서산(瑞山)출신, 한원진(韓元震)의 문인. 가난한집 출신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다가 종형인 한구가 귀한 신분이 되자, 발분하여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벼슬은 세마로 지냇다.
      동문(同門)인 홍양해(洪量海)와 함께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영수로서,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 정휘량(鄭輝良). 신만(申晩)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를 해치는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써 영조 부자간을 이간했다.
      또한 한구의 아들 말년에는 세손(世孫:정조)의 繼位(계위)를 방해하여 세손에게 위해를 입히려 하기까지 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