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갤러리

모네의 겨울풍경

淸潭 2006. 12. 22. 09:51
 

모네의 겨울풍경..

Cart on the Road to Honfleur

 

파리 서북쪽, 센강둑에 위치한 베티유의 경관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마을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숲이 우거진 섬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센느강의 만곡부가 훤히 내려다 보입니다. 모네는 이곳에서 교회를 둘러싸고 모여있는 집과 길부터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The Magpie

빛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동일한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하고자 끝없이 노력했던 것을 보면, 모네가 자신이 선택한 이 마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네는 베퇴유에서 이젤의 위치를 크게 바꾸지 않고서 빛과 새로운 구도를 끈질기게 탐구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된 작품들은 카유보트, 뒤레, 드 벨리오에게 속속 팔려 나갔습니다

 

Snow at Argenteuil

 

"내 그림들을 팔아 이곳 베퇴유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퇴유에서 모네와 그의 가족은 알리스, 에르네스 오슈데 부부와 그들의 여섯 아이들과 한집을 썼습니다. 생활비를 줄여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그 집에는 강까지 이어진 과수원이 하나 있었으며, 모네는 자신의 작업용 보트를 강에 정박시켜 두곤 했는데. 얼마 후인 1878년 12월, 두 가족은 좀더 안락한 집으로 이사하는 한편, 모네는 파리 몽세가에 있던 스튜디오를 처분하고 뱅탱유가 20번지에 새 스튜디오를 구했습니다.

 

 

 

The Train in the Snow

 

베퇴유의 새집에 온 모네는 도시생활의 혼잡함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파묻힌 채 전에 없이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고 인상파 친구들과 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제4회 인상파전에 29점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배신자란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동의했을 뿐"(1879년3월25일, 뒤레에게 보낸 편지)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모네에게 돈이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Boulevard de Pontoise, Argenteuil

 

집세와 이사비용으로 마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자 모네는 다시 한번 이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 자신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길 만한 사람을 달리 찾을 수 없는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깊은 근심에 휩싸여 있습니다.... 내 그림들을 팔아 이곳 베퇴유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비정한 현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떠나는 게 이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 자신은 이곳에서 꿈같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1879년 5월 14일 에르네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The Plain of Colombes, White Frost

 

모네의 아내 아내 까미유가 사망합니다"내게 너무도 소중했던 한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려 하는 사람의 마지막 이미지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그 특징을 잡아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저의 깊숙한 본능은 벌써 색채의 충격에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모네, 조르주 클레망소의 글(1928)에서 인용

 

 

Hoar-Frost

 

모네가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미셀을 출산한 후 극도로 쇠약해진 카미유의 건강을 염려하는 심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마침내 1879년 9월 5일,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가엾은 제 아내가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불쌍한  아이들과 홀로 남겨진 저 자신을 발견하고 저는 완전히 낙담해 있습니다. 당신께 또 하나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돈을 동봉해 드리겠으니 일전에 우리가 몽드 피에테에 저당잡힌 메달을 되찾아 주십시오. 그 메달은 카미유가 지녔던 유일한 기념품이라서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목에 걸어주고 싶습니다."

 

이 마지막 사랑의 표시를 보면 모네가 자신의 젊은 날의 동반자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Ice Breaking Up, Grey Weather

 

9월 26일, 넋이 나간 모네는 피사로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극도로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 두 아이를 데리고 내 삶을 어떻게 꾸릴 수 있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비통함이 뼈에 사무칩니다."

 

 

Floating Ice

 

그해 가을, 날씨가 나빴기 때문인지 모네는 야외작업을 포기하고 과일과 꽃 마침 사냥철인 탓에 찾아보기 쉬었던 죽은 사냥감을 소재로 정물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모네가 카미유 사망이후 곧바로 정물화를 그리게 된 것은 당시의 어려운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모네와 아들들은 퇴거당할 지경에 처해있었고 그때만 해도 그의 정물화는 풍경화보다 더 고가로 팔렸던 것입니다

 

 

Floating Ice

 

1879년에서 1880년 초에 이르는 겨울은 유난히 추웠는데. 모네는 갑작스레 센강의 정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강 대부분이 꽁꽁 얼어붙더니 해빙기로 접어들면서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물살을 타고 떠내려왔습니다. 자연의 장관에 매료된 모네는 점차 대기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모네는 보는 각도와 관찰한 시가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자아내는 장대한 구도를 갖춘 작품 대여섯 점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모네는 이젤의 위치를 옮기지 않거나 아주 약간만 변화시키고도, 작품과 무관한 다른 소재들을 차단하면서 빛의 움직임에 따른 형상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Sunset on the Seine in Winter

 

베퇴유에서 완성된 그림들은 특별한 감정의 차원을 보여줍니다. 차가운 색조로 처리된 풍경화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림 속의 하늘과 강물은 겨울이 주는 창백함과 정적, 그리고 황량함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당시 모네를 압박했던 경제적 근심과 정신적 방황을 반영하는데. 보들레르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연합적심상"'이 작용한 듯. 모네의 우울한 심정이 자연물에 결합된 것입니다.

 

 

Lavacourt

 

"부빙 (floating Ice)시리즈는 당시 모네가 처한 상황을 암시해준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깨진 얼음덩어리들이, 인상파 집단의 붕괴와 카미유의 사망으로 한 시절의 종말에 이른 한 화가의 개인적 삶의전환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Floating Ice at Bennecourt

 

"곧 베퇴유를 떠야 할 것 같아서 저는 센 강변에 위치한 멋진 곳을 찾고 있습니다. 푸아시가 어떨까 생각중입니다" (1881년5월24일 모네가 졸라에게 보낸 편지)

 

카미유 사망이후 모네의 가정과 오슈데의 가정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습니다. 에르네스는 아마도 사업상 파리에 머물러야 했던 모양이고, 알리스는 모네의 두 아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모네 곁에서 지냈습니다. 베퇴유 체재기는 아르장퇴유에서 지베르니로 넘어가는 중간 시기이며 중요한 이행기로 기록됩니다.

 

 

 

Floating Ice at Bennecourt

 

이 시점에서 모네의 생활과 경력은 그의 미래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첫째, 모네는 이제 원숙기에 접어들어 화가로서 체득한 지난날의 경험을 소화할 수 있게 된 동시에, 구인상파 집단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카미유가 죽은 후 장차 모네의 두 번째 아내(알리스 오슈데)가 될 여성의 비중이 점점 커짐으로써 모네의 사생활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뒤랑 뤼엘의 지속적인 후원은 이제 모네에게 곧 좋은 날이 오게 될 것이란 예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 모든 낙관적인 징조를 멋지게 담아낸 작품이, 모네가 베퇴유를 떠나기 몇 달 전에제작한"베튀유 화가의 정원"입니다. 1881년 12월, 고맙게도 뒤랑 뤼엘이 이사비용을 대준 덕분에 모네는 알리스 오슈데와 아이들을 데리고 베퇴유에서 동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푸아시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강변에 자리잡은 새 집은 생루이 별장이라 불렸습니다.

 

출처;시골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