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大雪) / 이색(李穡)
목은시고 제13권 / 시(詩)
동년(同年)인 원수(元帥) 정원재(鄭圓齋)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또 잘 지은 시를 외웠는데, 그 시에, “만년에 이름은 더욱 중해지고, 신년이라 예는 다시 번거롭구려. 세속 행태 따르긴 부끄러우나, 애써 일어나 후문을 배알하였네. 계곡의 눈은 흥을 일으킬 만하고, 산정은 시끄러움을 피할 만하니, 원컨대 공을 따라 도를 배우면서, 인사를 거문고와 술에 부치고 싶네.[晚歲名逾重 新年禮更煩 尙慚隨俗態 強起謁侯門 溪雪聊乘興 山亭可避喧 願從公學道 人事付琴尊]” 하였으니, 끝 구절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입장을 피력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사실적인 기록으로서 야박한 풍속을 일깨우고 후생(後生)을 개도(開導)할 만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의 비졸(鄙拙)함을 헤아리지 않고 문득 5수를 짓고, 또 그에게 재차 짓기를 요구하는 바이다.
목옹은 사는 것이 쓸쓸한지라 / 牧翁居索寞
원상이 자주로 예를 베푸네 / 圓相禮頻煩
왕자의 우레는 좌중을 놀래키는데 / 王子雷驚座
원생은 눈 속에 문을 꼭 닫았네 / 袁生雪擁門
강산엔 나는 새도 끊어졌는데 / 江山鳥飛絶
여항엔 말 울음소리 들레누나 / 閭巷馬來喧
백화가 만발하길 손꼽아 기다려서 / 屈指花如海
화려한 집에 또 주연을 베푸세나 / 華堂更置尊
설창이 뼈에 사무치게 청결하여 / 雪窓淸到骨
마음속의 번뇌를 깨끗이 씻었네 / 心地滌餘煩
더구나 공이 술을 가져왔거니 / 況有公携酒
어찌 내 문을 그대로 닫아둘쏜가 / 寧容我閉門
번화함은 똥을 쓸듯이 제거하고 / 繁華從糞掃
적막 속에 시끄러운 속진 피했으니 / 寂寞避塵喧
다시 기약하세나 밝은 달 맞아서 / 更約邀明月
술잔에 든 그림자 함께 보기로 / 相看影入尊
정초가 되면 방문이 분분하거늘 / 歲日紛投刺
남은 생에 감히 번거로움 꺼리랴 / 餘生敢憚煩
동년은 오래전에 벼슬을 버리고 / 同年久還笏
눈 속에 특별히 나를 찾아왔구려 / 踏雪特敲門
공은 깊이 숨은 용사와 같은데 / 公似龍蛇蟄
나는 떠들어 대는 참새와 같아라 / 吾如鳥雀喧
아득히 죽음으로 향하는 마당에 / 渺然乘化處
서로 마주해 술잔이나 기울이잔다 / 相對倒芳尊
담소하면서 어찌 썰렁함을 꺼리랴 / 笑語寧嫌冷
흉금은 이미 번거로움 떨쳐버렸네 / 襟懷已去煩
쇠잔한 나이에 자주 집을 옮기어 / 殘年頻徙室
밤이면 홀로 문을 닫지도 않건만 / 獨夜不關門
등불에 부딪치는 나방만 보일 뿐 / 但見燈蛾撲
말 들레는 소리는 듣기 어려운데 / 難聞櫪馬喧
원재가 나의 늙음을 애석히 여겨 / 圓齋惜吾老
눈 속에 또 술을 가지고 왔네그려 / 冒雪更携尊
시를 읊으면 기가 단촉함을 알겠고 / 吟詩知氣短
일을 만나면 문득 마음이 번거롭네 / 遇事便心煩
난세라 자주 거울만 들여다보고 / 亂世頻看鏡
남은 생은 홀로 문을 굳게 닫았네 / 殘生獨掩門
버들가지는 응당 싹이 트려 하고 / 柳絲應欲動
계곡물은 점차 소리를 들레리라 / 澗水漸成喧
정조에 조하하던 날을 회상하노니 / 回首朝正日
백수준에 향기가 어리었었지 / 香凝白獸尊
[주-D001] 원상(圓相) :
호가 원재(圓齋)인 정공권(鄭公權)이 재상 지위에 있다 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이다.
[주-D002] 왕자(王子)의 …… 놀래키는데 :
왕자는 곧 한(漢)나라 때의 직신(直臣)으로 자가 자공(子贛)인 왕준(王尊)을 가리킨다. 왕준이 일찍이 동평왕(東平王)의 재상이 되었을 때, 동평왕의 태부(太傅)가 왕 앞에서 《시경》 상서(相鼠) 시를 강설(講說)하자, 왕준이 태부에게 말하기를, “베로 메운 북[布鼓]을 가지고 뇌문(雷門)을 지나지 말라.”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뇌문은 곧 회계(會稽)의 성문(城門)을 가리키는데, 뇌문 위에 걸린 북은 소리가 커서 낙양(洛陽)까지 들릴 정도이므로, 소리가 나지 않는 포고(布鼓)를 가지고 그 앞을 지나다가는 오히려 조소와 모욕만 당할 뿐이기 때문에 그곳을 지나지 말라는 뜻이니, 즉 법도(法度)가 없는 동평왕에게는 그런 시를 강설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 말이다. 전하여 여기서는 다만 왕준의 뛰어난 기개를 찬양하여 정공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3] 원생(袁生)은 …… 닫았네 :
원생은 후한(後漢) 때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이다. 원안이 벼슬길에 나가지 전에 일찍이 낙양(洛陽)에 대설(大雪)이 내려서 낙양 영(洛陽令)이 몸소 나가 민가(民家)를 순행할 적에, 다른 집들은 다 눈을 치웠는데 원안의 집 문밖에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으므로, 그 집에는 사람이 이미 굶어 죽은 줄로 알고 사람을 시켜 눈을 치우고 문을 열고 살펴보게 한 결과, 원안이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4] 밝은 …… 보기로 :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시에, “꽃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가지고, 친구 하나 없이 홀로 술을 마시면서,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니, 그림자와 합하여 세 사람 되었네.[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 난세(亂世)라 …… 들여다보고 :
태평성대가 오기 전에 늙어버릴까 염려하는 뜻에서 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강상(江上)〉 시에, “훈업에 대해선 자주 거울을 보고, 행장에 대해선 홀로 누각 기대 생각하네.[勳業頻看鏡 行藏獨倚樓]” 하였다.
[주-D006] 백수준(白獸尊) :
백호준(白虎樽)으로, 뚜껑을 백호(白虎)로 장식한 술 그릇을 가리키는데, 당(唐)나라 때에 와서 태조(太祖)의 휘(諱)를 피해 이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진서(晉書)》 예지(禮志)에 의하면, 원단(元旦)의 조하(朝賀) 때에는 백수준을 전정(殿庭)에 베풀어놓고서 만일 직언(直言)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이 백수준의 술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