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慶州金氏

경주 성덕왕릉 (聖德王陵)

淸潭 2017. 6. 18. 14:32

 

 

신라왕조 통일 대위업 이후 최고 전성기 때의 왕릉으로, 봉분 높이 4,5 m, 직경 14.7 m의 원형 봉토분이며, 내부 구조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삼국사기, 동경 잡기 등의 기록도 현재의 경주시 조양동 도지리(道只里)의 왕릉 위치와 일치하며, 사적28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


외부에는 삼각형으로 가공한 받침석 33개를 탱석에 기대어 호석을 보강하고 있으며, 호석 앞에는 환조(丸彫)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삼각형 받침석 사이의 공간에 고유한 방위(方位)에 최대한 맞게 선택하여 배치하였으며, 회랑(回廊)에는 박석(薄石)을 깔고, 그 가장자리에는 난간 석주(欄干石柱) 33개를 두고 있으며, 난간 석주 사이에는 상하 2개씩의 관석(貫石)을 끼워 사람과 짐승들의 출입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3개의 난간석주는 인도의 스투파인 산치대탑에서 볼 수 있는 조형물로, 십이지신상과 함께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닭 신상

국립경주박물관에 별도 보관 원숭이 신상


릉의 남쪽 동서 양쪽에는 2구의 석인상(石人像)이 배치되어 있고, 주변 사방에 4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고 있으며, 석인상과 석사자는 중국의 당(唐)나라 황제릉에 나타나는 조형물로, 그 양식을 신라가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이처럼 성덕왕릉에는 인도의 불탑과 중국 황제릉의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새로운 신라왕릉 양식이 집대성 된 왕릉으로,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의 왕릉 양식에 까지 영향을 끼친 한국 왕릉의 고전을 보여주고 있답니다.

 

릉 전면 100 m 쯤에는 35대 경덕왕 13년에 세운 성덕왕릉의 비(碑)를 떠 받치던 귀부(龜趺)가 있으나,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귀부는 목이 부러지는 등 많이 파손되었으나 규모가 웅대하고 방형(方形)의 대좌위에 놓여 있으며, 몸체는 앞발에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4개의 발톱이 새겨져 있고, 등에는 6각의 무늬를 새겨 놓았고, 비신 홈 없이 비신을 귀부위에 그대로 얹어두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33대 성덕왕은 31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첫째 아들인 32대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귀족회의의 추대를 받아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됩니다.

왕위

왕 명

성씨

재위

시기

왕릉 위치

특기 사항

30

문 무 왕

21

661 ~ 681

봉길리 대왕암

통일(나당 연합), 안압지 축조

31

신 문 왕

12

681 ~ 692

배반동

국학 창설, 서원소경 설치

32

효 소 왕

11

692 ~ 702

도지리

醫學博士 제도 도입

33

성 덕 왕

36

702 ~ 737

도지리

通文博士 설치(외교문서전담)

34

효 성 왕

6

737 ~ 742

골분을 동해에

 

35

경 덕 왕

24

742 ~ 765

내남면 부지리

석굴암, 불국사 창건

36

혜 공 왕

16

765 ~ 780

 

왕당파와 귀족간의 갈등 계속

 

성덕왕 시대 (AD 702~737)는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누리던 때로서, 718년 처음으로 누각(樓閣)을 제작하여 비치한 것은 안정된 사회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또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한동안 서먹해진 당과의 외교관계가 전격적으로 복구된 시기이기도 하며, 이는 732년 발해(渤海)의 장문휴(張文休) 장군이 등주를 공격하여 등주자사(登州刺使)를 살해한 이듬해에 당이 발해를 공격할 때, 당의 요청을 받은 성덕왕이 발해 남쪽을 공격한데 따른 보답으로, 735년에는 당나라에서 패강(浿江 ; 대동강 옛명) 이남의 땅을 신라가 영유하는 것을 공식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일명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33대 성덕왕이 승하(昇遐)한 후 추모하기 위해 35대 경덕왕이 신종을 제작하게 하였으나, 완공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자 36대 혜공왕이 성덕왕에 대한 경덕왕의 효에 대한 뜻을 이어받아 계속 제작하게 하여 완성시켰으며, 국보 29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