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세입춘(七歲立春)
[요약] (七:일곱 칠, 歲:해 세, 立:설 립, 春:봄 춘)
일곱 살에 입춘방을 쓰다는 말로. 즉,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섰다는 뜻.
글씨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서 유래함.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내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로서 역대 명필들의 글씨 중 장점을 모아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 즉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그는 벼슬을 이조참판까지 지냈고, 학문연구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유난히 호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추사(秋史), 완당(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써서 일곱 살 때 대문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입춘방을 써 붙였다. 그런데 마침 재상 채제공(蔡濟恭)이 지나다가 그 글씨를 보고 그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과는 사이가 좋지 못한데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노경은 의외인지라 놀라 물었다.
“대감이 어인 일이십니까?”
“아, 대문에 붙어 있는 글씨가 너무 좋아 누가 썼는지 궁금해서 들렸소이다. 대체 누구의 글씨입니까?”
김노경이 아들이 쓴 글씨라고 하자 채제공이 말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크게 될 것이오. 그러나 글씨의 대가가 되면 운명이 순조롭지 않을 터, 그러므로 글씨 공부는 그만두고 글공부에 힘스는 것이 좋은 것이오.”
그러나 그의 글씨 공부는 멈추지 않았고, 글공부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나중에 김정희는 윤상도(尹尙度)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오는 역경을 겪었다.
그는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막역하게 사귀면서 그들의 필체를 연구, 그들의 장점을 모아 자기만의 독특한 서체를 체계화시켰다.
그의 글씨는 패기가 충천하며 필력이 힘차 감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일가를 이루었다.
예서(隸書), 행서(行書) 외에 모든 서체에 뛰어났지만 그 중 예서와 행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내외의 격찬을 받았으며, 조선 후기의 서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채제공의 말대로 글씨 탓이었는지 그의 일생은 순탄치 못했다. 벼슬도 이조참판에 그쳤고, 자손 또한 없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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