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慶州金氏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괘릉(掛陵)〕

淸潭 2017. 8. 5. 10:01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괘릉(掛陵)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김경신,785~798)을 모신 곳으로, 밑 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이며, 능 둘레에 있는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 되어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괘릉(掛陵)이라 부르는 것은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어 그곳을 메우고 왕릉을 마련하였는데, 왕릉 내부 현실(玄室)에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설에 따른 것입니다.

 

왕릉 입구에는 남쪽으로부터 좌우에 화표석(華表石 ; 무덤 앞에 세우는 돌),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과 돌사자(石獅子)를 마주 보게 세웠으며, 이 중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통일신라가 서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쌍의 문인석도 그 늠름한 모습이 다른 능묘의 문인석에서 느껴지는 나약함과는 다르게 강건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2마리 씩 나누어 마주보고 있는 돌사자는 동 남쪽과 서 북쪽의 것이 정면을 지키고, 서 남쪽과 동 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하는 기발한 배치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으로, 둘레 돌, 십이지신상, 난간, 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가운데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조각수법 또한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치세(治世) 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 ; 귀족의 자재 중 경서(經書)에 능통한 사람을 뽑아 관리로 선발하던 과거제도의 전신)라는 제도로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碧骨堤 ; 전북 김제군 부당면에 있는 백제 비류왕 27년에 쌓은 저수지 둑)를 고치기도 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