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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라는 흉노족 후예라 밝혔나

淸潭 2016. 10. 18. 11:23

왜 신라는 흉노족 후예라 밝혔나

 !/EBS 방송 역사추적

 

신라의 왕은 박혁거세 석 탈해 김 알지의 후손들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 56명의 왕들이 천 년간을 지배한 국가다. 56명의 왕 중 압도적 다수가 김 씨다. 김 씨 왕의 시초는 13대왕 미추이사금이 시작이다

이전까지 12왕은 박씨가 7왕 석씨가5왕에 김 씨가 미추이사금에 오른 후 다시 석씨가 3명이 있다가 17대 내물마립간부터 이사금 칭호를 없애고 마립간이란 칭호를 쓴다. 이사금은 연장자라는 뜻으로 신라가 부족국가인 사로국에서 왕 중의 왕이란 뜻인 마립간이라 칭하며 왕조국가 다운 신라로 들어선 것이다.

 

마립은 머리, 간은 몽고어의 칸 왕이다. 머리 중의 머리 즉 왕 중의 왕이란 자신감으로 표현 한 것이다. 22대 지중왕부터 왕의 칭호를 쓰며 김 씨가 왕을 계속하다 53~55대왕이 박 씨고, 56대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 항복한다. 정리하면 신라 56왕의 성씨는 박씨왕 10. 석씨왕 8,김씨왕이 38위이다.

 

30대 문무왕(661~692)이 삼국을 통일하고 676년 당나라 20만 대군을 신라가 물리친 자존심을 대천왕사에 문무왕비를 세운다. 그리고 김 씨 왕조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자부심으로 선대의 역사를 알리려고 비문에 써 만천하에 공표하는 것이

김 씨 왕조의 시조는 秺候 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 7대를 전해 왔더라 기록한다(秺候祭天之胤傳七葉) 7대손 星漢王이 나의 15대조라 기록한다.

투후는 한 무제가 내린 제후의 명으로 한나라 자전에 나오길 흉노왕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라 적혀있다. 김일제는 내란에 공을 세워 투후의 작위를 받고 투국의 왕조가 지금의 산동성 하택시에 옛 투석유적이 있고 그 유적은 황하의 범람으로 땅에 매립되어 있다. 이 투국의 金城으로 신라 경주의 금성과 이름이 같다.

 

홀연히 문무왕이 비문에 적은 성한왕은 누구인가 그는 신라김씨의 족보로 보면 김알지의 아들 대다.

아들 이름은 勢漢이다. 은 같은 발음이라 세한이 성한과 동일인물 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200여 년 전,

류 득공이 쓴 古芸堂筆記(고운필당기)에 나타난다.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은 세대수를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신라김씨는 흉노의 자손이 아닌가? 라는 구절이 있다.

추사 김 정희는 자신의 선대 시조의 성한왕은 흉노의 후손임에 고민을 하다 海東碑文攷(해동비문고)에서 성한왕이 김 알지라 결론을 낸다.

이 비석이 탁본에 투후란 글이 박물관에 전하고 실물은 최근에 마모 되여 판독이 불가능하게 전한다. 아마 이 비석은 흉노의 자손임을 멸실하기 위해 경주 김 씨 어느 의혈남아가 흉노의 후손이 부끄러워 독단으로 추사 이후 어느 날 잘한다고 깨서 밭에 묻은 것이 농부가 밭을 갈다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파비가 과연 잘 한 것일까?

匈奴는 중국인이 칭하는 민족의 이름이지 흉한 노예 족이란 말은 아니다

Xiongnu와 유럽의 로마를 멸망시킨 훈족huns는 같은 종족이다

중국은 자기는 중원의 문명인이고 동쪽은 동이족 (우리나라), 서쪽은 서융 남쪽은 남만 북쪽은 북적 이라 칭하는 그들이 붙인 명사이다.

동이족은 공자와 맹자가 나온 종족이고 흉노는 당을 세운 이세민의 뿌리이다. 어찌 글자처럼 흉한 노예들의 족속이겠나? 다만 조선시대에 사대에 물든 일부 신라 김 씨 후손이 문명의 위대한 블랙박스를 일시적 미개한 흥분으로 인하여 비석을 깨부순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우를 범한 것이 아닐까?

 

흉노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민족이 부족형태로 북방에서 살다 중국을 침범하다

bc 221진시황이 통일 후 흉노를 방어키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를 시작한다.

bc 209년 위대한 군주 선우가 국가를 세운다.

bc 200년 한고조 유방은 200만 대군을 몰아 흉노족 위대한 선우대왕과 결전을 한다. 白登山에서 40만 기병의 선우에 포위돼 몰살을 한다. 유방은 간신히 항복을 하고 목숨을 구걸하며 치욕적인 조약을 맺는다. 한의 공주를 선우에 인질로 출가를 시킨다. 매년 공물을 바친다. 등이다. 이 조약은 잘 이행된다.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명인 왕 소군을 흉노 왕 선우에 보내 선우가 여색에 빠져 침범치 못하게 미인계를 쓴다, 왕 소군의 무덤이 백등산 근처에 있다.

 

그러나 중국은 얼마나 그들은 괴롭히고 침범하여 재물과 인명을 약탈하는 강자 무리가 미웠으면 흉노란 악한 이름을 붙였을까 역지사지하면 이해가 가는 강한 민족이다

bc 133년 한 무제는 조약을 파기 흉노를 7차에 걸쳐 정벌하고 북쪽으로 내쫓는다.(한서 위헌전)이로 인해

bc 91년 남흉노와 북 흉노가 분리되어 기타 소종족처럼 불린다. 516국 시대가 4~5세기까지 등장한다. 5호는 흉노 갈, , , 선비로 이들이 세운 13왕조와 한족이 세운 3왕조의 합 그리고 흉노는 마지막 불꽃을 피우다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bc 86년 사기는 휴도왕이 3~5만 유민을 이끌고 중국 산동성 하택시에 투국을 건설한다.

투후는 4대가 계속된다. 김당이 투후일 때

전한이 왕망의 쿠데타로 망하고 왕망은 국호를 신으로 자칭하여 20년 통치를 한다. 후한의 황제 유수가 등장 진압하여 왕망을 멸하는데 공교롭게 왕망의 모친과 김당의 모친은 형제로 역적의 이종인 김당과 후손은 숙청을 피해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變姓도 한다. 산동성에서 한반도로 도래한 지류가 김일제 자손인 것이다.

 

bc 23년에 김 씨는 산동성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들이 배를 타고 온 증거는 20년 종속한 왕망의 신나라 화폐인 貨天이 수로를 타고 우리나라 해안 여러 곳에서 출토 되는 것이 증거다. 나주 해남 거제 제주 김해둥지에서 화천이 발견됐다. 김일제의 후손은 배로 그들의 무역거점으로 이주를 한다,

 

경주에서 황남대총의 발굴로 신라는 이질문명임이 발견된다. 금옥의 금관, 적석목곽분의 묘제의 방식, 뿔잔 ,동북(동으로 만든 냄비용도 단지)등이 모두 흉노지배층의 유물과 유사하다. 유목민족은 재화의 보존을 금으로 하여 말에 싣고 이동을 한다. 농경민족은 땅으로 하고 중국은 옥을 숭상한다. 그러나 신라 황남대총의 순장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으로 도배를 한 것이다.

중국 삼국지 위지동이전 은 신라인은 스스로 중국에서 왔다 하는데 마한의 동쪽에 살았다 표기되어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백제와 다르다(其言語不與馬韓)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언어는 흉노족의 억앙 일 것이다. 우리나라 삼국의 억양이 다른 것은 부여족의 도래인 고구려 백제와, 흉노족의 도래인 신라가 이 한반도에 살다보니 어휘의 통일은 됐으나 억약은 각각 달리 내려온 것이 아닐까?

 

석탈해는 중국의 배로 온 이주민이란 기록이 있고 혁거 세와 알지는 알에서 나온 다른 곳에서 왔다는 표현이니 신라의 왕은 모두 다른 곳에서 온 이주민인 것이다.

성한왕은 原宮에서 와 祥林에서 金輿를 타고 있다. 즉 하늘에서 내려와 상서로운 숲에서 황금 수례에 앉아 있는 재력자란 말이고 김 알지의 하늘에서 내려온 나무에 걸린 금괴를 흰 닭이 보고 우는데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는 신비한 위장술과 일치한다. 勢漢은 아직 왕이 아니지 그리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7대 후손이 미추이사금 되고 다시 석씨에 빼앗기다 내물 마립간이 되어 김 씨가 마립간을 잇다 22대 지중왕 이후 성한왕으로 부르지 않았까 생각한다.

 

현재 전 세계에 현존하는 금관은 200개인데 신라의 금관이 6개로 상당수를 차지한다.

미약했던 김씨 세력을 보완키 위해 늦게 676년에 문무왕이 20만 당군을 신라가 물리치고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하며 신라의 호국의지를 대천왕사에 문무왕 비를 세우며 김 씨 왕조의 역사를 늦게나마 알린 것이 아닐까

즉 신라 김 씨 왕조는 (흉노) 투후 (김일제)7대 후손으로 성한왕이 나의 15대조다. 그것이 신라 문무왕 비문의 비밀이다

투후는 한나라 제후 김일제의 벼슬임을 중국 자전에서 바로 찾아 낼 수 있으니 비밀을 벗겨졌다.

 

우리는 중국 동북삼성의 대하 송하강과 흑용강가의 대 부여국에서 무리를 이끌고 도래한 왕자 주몽의 고구려와 주몽의 동모 이부의 왕자 온조 비루의 백제 후손과,

내몽고 알타이산 아래 아르치스 강가의 유목민족인 흉노의 후손이 김 알지로 신화화하여 도래하고, 그 전에 도래 인으로 기록된 신라의 석 탈해와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로 도래 인을 미화한 것이니 3대성의 후손이 상생하여 번성하고,

전북장수와 전남일부 경남의 터에 가야로 표현되어 바닷길로 들어온 세력인 도래 인들이 우리 땅에 살던 현지 토착민과 석인 민족임이 증명된 것이다. 부족국은 각기 언어와 관습 묘제방식 철학이 다르니 수년간 기후와 지형의 영향으로 언어의 통일은 이루었으나 억양과 사투리는 석이는데 많은 세월이 요구돼 오늘에 이르러도 현존하는 우리의 사투리들이다.

what is the relation between silla and huns

 

이상은 KBS에서 방영한 역사 스페설을 요약한 내용이다

2016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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