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흥청망청(興淸亡淸)

淸潭 2016. 10. 16. 10:58

흥청망청
갑자사화(甲子士禍) 후 연산(燕山)의 광폭한 행동은 더 심해졌다.
전국에 채홍사(採紅使)를 보내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조금만 예쁘면 징발해 왕실 기생을 만들었는데
1급을 흥청(興淸) 2급은 운평(運平)이라 불렀으며 그 수가 1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이 거처할 시설, 음식 및 의복 창고, 화장품 공급소 등의 비용은 모두 백성들이 부담했으니
불만은 높을 수밖에 없었지만 험담하는 자들은 다 잡아들이고
기생들도 화장을 안 하면 부모까지 귀양 보냈으며 아이를 낳으면 어미와 함께 처형했다.
날마다 열리는 파티나 서울 근교로 놀러갈 때 따르는 흥청의 수가 천 명이나 되었다.
이에서 나온 말이 바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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