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억천년이 지나도 수행자는 수행자다워야 한다

淸潭 2015. 10. 29. 18:56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

 

억천년이 지나도 수행자는 수행자다워야 한다

 

정리=임은호 기자  |  eunholic@beopbo.com

 

 

 

 

 

승인 2015.10.26  18:23:05
 

   
 
‘속고승전’에 동진(東晉) 혜원(慧遠·332~414)선사의 백련결사가 등장합니다. 아마도 결사의 효시라고 생각됩니다. 백련결사 당시 실질적인 통치자가 환현(桓玄·369~404)이라는 권력자였습니다. 황제는 아니지만 실질적 통치자로 나중에 스스로 왕이 됩니다. 환현은 혜원선사를 존경했습니다. 속고승전은 환현의 말을 빌려 이렇게 이르고 있습니다. 사문은 경전의 가르침을 받들고 그 뜻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경전의 가르침을 배워야 스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넘어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어야 스님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출가자라면 누구나 그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 스님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이 말에 부합되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 스님들은 소의경전을 비롯해 경전들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공부해서 그 뜻을 제대로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경전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리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마저 있습니다. 대단히 잘못됐다 생각합니다. 선방에서 수행을 하던지 율원에서 계율을 연구하던지 강사가 됐던지 법사가 됐던지 복지에 혹은 행정에 종사하던지 관계없이 출가사문은 경전의 가르침을 받들고 그 뜻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출가수행자의 기본입니다.

배움 넘어 가르침 베풀어야
출가자에 스님 자격 주어져

경전 다른이에 가르치려면
치열히 공부하고 뜻 새겨야

철저한 계행으로 중생 교화
향기로운 삶 살아야 스님

삼학 근본으로 혼탁함 극복
계율 깨끗하고 선정 맑아야
지혜의 달도 비출 수 있어


계율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율사들을 계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만으로도 존경하고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율사라고 하는 근본 종지에서 봤을 때 계율을 닦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닦음으로써 들어가는 향기로운 행동, 즉 철저한 계행으로 널리 중생을 교화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수행과 교화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수행만 제대로 하면 교화는 절로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각 분야에 따른 전문적인 교화행이 있겠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교화는 역시 스님들이 제대로 계율을 지키며 향기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관계없이 그 수행의 향기에 의해 교화는 이뤄지게 됩니다.

성철 스님은 산문 밖을 나온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덕화와 수행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바로 승려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잘 산다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 계율을 닦아서 올곧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종단은 매우 어지럽습니다. 국민들 역시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출가자들이 뇌화부동하고 시류에 영합해서 본분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억천년이 지나도 소금은 짜야 그것이 소금입니다. 억천년이 지나도 수행자에게는 수행자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수행자다움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계율을 닦아서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요즘 계율을 전공하는 스님들을 제외하고는 계율을 경시하는 풍토가 한국불교에 만연돼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굉장히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계율, 참선, 수행하는 것을 굉장히 관념적이고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혜원선사는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라는 저술로 유명합니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인도와 달리 절대왕권에 귀속이 돼버립니다. 수당 이후로 모든 불교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인 동진 시대의 혜원선사는 ‘사문불경왕자론’을 통해 출가자와 왕권의 관계를 명확히 했습니다. 출가사문은 권력을 구하는 집단이 아니며 모든 이익과 권력을 떨쳐버리고 오직 생사해탈을 위해서 열반을 위해서 수행하기 위한 집단이다. 따라서 왕권이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당하게 우리의 길을 가겠다. 출가사문은 부처님 외에 누구에게도 절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왕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당당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의 종교들은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혜원선사의 당당함은 출가수행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혜원선사는 출가수행자는 이익을 따라가선 안 된다며 명예와 권력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당당하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지키며 해탈을 구해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권력 꽁무니를 따르는 것은 사문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당당한 주장은 스스로 제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문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계정혜 삼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대단히 혼탁합니다. 그 혼탁함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삼학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계정혜 삼학을 설명하자면 계를 지킴으로 인해 선정이 생기고 선정으로 인해서 지혜가 발휘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른다면 삼학 중에서 계율을 가장 먼저 닦아야 합니다. 그 계율의 바탕 위에서 선정이 생기고, 그 선정으로 인해 지혜가 열립니다. 서산 스님은 ‘선가귀감’에서 계율의 그릇이 깨끗해야 선정의 물이 맑을 수 있고 선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비출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삼학을 우리는 등지(等指)한다고 합니다. 이를 삼학등지(三學等指)라고 하는데 계정혜를 차별없이 균등하고 평등하게 닦는다는 말입니다. 삼학등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계를 닦아 선정에 들고 다음에 지혜가 발현되는 이런 방식을 차제등지(次第等指)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계율을 닦고 다음에 선정을 닦고 그 다음에 지혜를 닦아나가는 순서에 따라 차례로 평등하게 닦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종의 전통에서는 일체등지(一切等指)를 말합니다. 근현대사 한국불교의 등불이셨던 용성 스님은 선사면서 율사셨습니다. 그리고 강사이기도 했습니다. 용성 스님은 계정혜 삼학은 차제등지가 아니라 함께 닦는 일체등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를 말하면 선정과 지혜가 포함되고, 선정을 말하면 계율과 지혜가 따라오고, 지혜를 발현하게 되면 계율과 선정이 녹아들기 때문에 계정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국불교에서 율사 스님이다 그러면 율을 전공해서 율만을 잘 지키는 그런 율사가 아닙니다. 율사이면서 선사요 강사라는 말입니다. 선정을 주로 하는 스님을 선사라고 하는데, 선방에 앉아서 참선만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되는 게 아니라 선사라고 하면 자동으로 계율이 닦여지고 경전을 수승하는 그런 선사를 말합니다. 강사 혹은 법사 또한 경전만을 하는 게 아니라 율을 닦고 참선을 하는 그런 강사를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율사 따로 선사 따로 강사 따로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잘못된 수행풍토입니다.

선가귀감에서 서산 스님은 차제등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말미에 가면 계정혜 삼학은 셋이자 곧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차제등지와 일체등지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등지를 우리는 삼학원수(三學圓修)라고 합니다. 삼학을 같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어느 하나에 치중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수행풍토가 되어야 합니다. 초학에서는 차제등지를 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일체등지로 나가야 합니다. 중국불교를 종파불교라 그럽니다. 각 종파별로 종지를 가지고 그 종지에 의해서 수학과 교학을 펼쳐가는 것을 종파불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불교는 통불교입니다. 종파불교든 통불교든 장단점이 있습니다. 종파불교의 장점은 수행이 소프트화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문적인 수행을 할 수 있는 게 장점입니다. 각 종파가 내세우는 가르침이나 수행법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종파별로 나눠서 서로 싸운다는 점입니다. 종파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 통불교는 통합이 장점입니다. 원효 스님은 모든 격론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불교의 전통이 됐습니다. 조계종의 종명은 분명 선종이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은 선종에 한정돼 있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계율도 있고 화엄도 들어있고 천태도 들어있고 유식과 삼론, 심지어 정토와 진언도 녹아 있습니다. 통불교의 장점은 화해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대립하지 않고 함께 녹아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신도들이 헷갈린다고 말합니다. 너무 많은 것이 녹아있다 보니 입맛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됩니다. 나쁘게 말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점입니다. 율종이라면 칼 같이 계율을 지켜야 하고 선종은 치열한 수행이 생명이 돼야합니다. 그런데 통불교다보니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입니다. 이것이 한국불교에서 계율이 해이해지는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의 이런 장단점을 잘 파악해서 어떻게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최소화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정리=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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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이 10월14~16일 수원 봉녕사 금강율학원승가대학원에서 열린‘2015 제3차 계율과 수행의 관계’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월암 스님은
1973년 경주 중생사에서 출가해 도문 스님을 은사로, 동헌노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북경대 철학과에서 ‘돈오선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주동국대 선학과 등에서 강사로 활약했다. 현재 기본선원 교선사, 행복선 수행학교 교장,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이다. 저서로 ‘간화정로’ ‘돈오선’ ‘친절한 간화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