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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 (거짓말쟁이들이 하는짓)

淸潭 2013. 8. 3. 20:31

 

[월간조선] 李基澤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말하는 내가 만난 대통령들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입력 : 2013.08.01 14:39 | 수정 : 2013.08.03 10:24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DJ, 사람 보내 “다음에는 꼭 이 총재를 대통령으로”(97년 대선 전)

    민주당 총재 등을 지낸 이기택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최근 발매된 《월간조선》8월에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에 얽힌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다음은 이기택 전 수석부의장의 증언.

    3당 합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3당 합당 이틀 전이었다. 정동성(鄭東成) 민정당 원내총무가 3당 합당을 위한 청와대 회동에 관한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YS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다음날은 아침 상도동에 있는 YS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YS는 마치 백만대군이라도 만난 듯,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3당 합당을 한다는데, 사실이냐?”고 따졌다. 잠시 망설이던 YS는 나의 손을 덥썩 잡으며 “3당 합당은 우리가 사는 길이고, 나라가 사는 길”이라면서 “우리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가 평생 군사정권과 싸워 왔는데, 국민이 그걸 용납하겠습니까?”라며 “생각을 돌려주십시오”라고 했지만, YS는 “이미 다 결정된 일”이라면서 “우리 다 함께 가자”고 했다.
    
	1991년 9월 민주당과 DJ의 신민주연합당의 합당에는 김관석 목사(가운데)가 애를 많이 썼다.
    1991년 9월 민주당과 DJ의 신민주연합당의 합당에는 김관석 목사(가운데)가 애를 많이 썼다.

    1월25일 청와대에서 열린 3당 통합추진 15인 위원의 오찬에 참석한 것은 YS와의 인간적 의리 때문이었다. YS는 그의 계보도 아니었던 나를 부총재, 원내총무, 5공특위 위원장으로 중용해 주었다. 헤어지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해 주고 싶었다. 통합준비위 2차 모임부터는 아예 나가지 않았다.

    1992년 대선 다음날인 12월19일 아침, DJ는 전화로 자신의 정계은퇴 결심을 알려왔다. 그 순간 ‘DJ가 정말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이구나.YS의 정치보복을 피하려고 정계은퇴라는 선택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DJ는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 수천명의 환송객들 앞에서도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내게 정치를 하라, 대통령에 다시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동지로,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1993년 6월 20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DJ를 만났다. 귀국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 “국내 정국이 돌아가는 것이나 저희가 야당 하는 것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많으시죠?”라고 물었다. 그는 “나는 전혀 몰라요. 누가 얘기를 꺼내면 말도 못 하게 하고 있어요. 이 대표, 나는 정계에서 은퇴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로서는 정계복귀 의사를 에둘러 타진한 것인데, DJ는 딱 잡아뗀 것이다.

    1995년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DJ는 경기지사 후보로 이종찬(李鍾贊) 의원을 밀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종찬 카드를 고집하는 DJ를 보면서 비로소 ‘아, DJ가 정계에 복귀해 대선 4수에 도전하려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경기도 지사 경선에서는 장경우(張慶宇)  의원과 이종찬 의원의 대타로 나온 안동선(安東善) 의원이 맞붙었다. 개표에서 안동선 후보의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안 후보측 당원들이 마지막 남은 투표함 3~4개를 개표하지 못하도록 난동을 부렸다.

    DJ는 “이번 경선은 없었던 걸로 하고 후보를 다시 세우자”고 했다. 장경우, 안동선 후보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합의로 이종찬 의원을 후보로 세우자는 얘기였다. 나는 DJ의 제안을 거절하고 장 경우 의원이 후보로 선출되었다고 공표했다. 민주당의 공식적인 후보는 장경우 후보였음에도, 동교동계에서는 호남향우회를 통해 장 후보를 찍지 말라고 선동했다. DJ에게는 경우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남들보고는 민주주의를 하라고 그렇게 외쳤던 사람이 말이다.

    1997년 15대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DJ는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먼저 민주당에 잔류해 있던 강창성(姜昌成), 박은태(朴恩台) 의원을 통해 “도와 달라”는 요청이 왔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권노갑, 한광옥, 박지원 의원이 찾아왔다. 그들을 통해 전해 온 메시지는 한결같았다.“내가 대권 4수에 도전하는데, 한번만 도와주시오. 당선 되든 안 되든, 그 다음에는 꼭 이 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겠소.”

    하지만 나는 DJ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지지하는 길을 택했다. 1998년 8월 한나라당 총재로 복귀한 이회창 총재와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들을 메모해 가서 열심히 조언을 했다. 그도 내 의견을 많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2000년 2월18일 총선에서 나는 공천 탈락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신한국당과 통합할 때 딸려온 민주당 당사를 팔아 자기 선거빚을 같았다던 사람이…. 생각해 보니 1998년 8월 총재권한대행 시절에, 국회정상화와 국회부의장 지명 등을 놓고 내 주장을 관철했던 것이 원인(遠因)이었던 것 같았다. 이회창 총재는 내게 비례대표를 하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둔 그해 11월 말 후보 등록 며칠 전, 이회창 후보의 최측근인 서정우(徐廷友) 변호사가 모 신문사 정치부장을 앞세워 찾아왔다. 서 변호사는 “이회창 후보를 용서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회창 후보가 공천이라는 정치적 무기로 나를 학살한 경위를 아느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듣고 판단해 보라” 고 한 후,  합당 이후 공천탈락까지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물러갔다.

    12월1일쯤으로 기억하는데, 노무현 후보도 나를 찾아왔다. 김정길 의원 등이 중간에서 애를 많이 썼다. 노 후보는 “선배님, 제가 총재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서 충성을 다 하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직을)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며칠 후 나는 노무현 후보 지지를 결정했다. 내 사무실을 찾은 노 후보는 눈물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5월, 임기가 끝나가는 김민하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통해 그 자리를 맡을 생각이 있는지 타진해 왔지만, 거절했다.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MB)은 고려대 상대 후배로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특히 국회가 태평로에 있던 시절에는 현대건설 사옥도 무교동에 있어서 길에서 마주치면 안부를 묻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야당 의원이었고, 그는 대기업의 잘 나가는 임원이어서 친분을 쌓을 기회는 없었다. 2007년  MB가 후보가 된 후에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으로 선거를 도왔다. 국회의원과 민선 서울시장을 지냈음에도 MB는 정치를 싫어했다. 청와대에서 MB를 만났을 때 이렇게 조언 했다.

    “평생 정치를 하면서 보니, 대통령이 국정을 원만하게 수행하려면 국회와 정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대통령의 실질적인 힘은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에서 나옵니다.”

    MB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글쎄 말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요….”
    MB는 ‘정치’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고, 그 때문에 임기 내내 ‘소통부재(疏通不在)’니 ‘불통(不通)’이니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아쉽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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