向壁虛造(향벽허조)
《상서(尙書)》는 중국 최고의 역사서로서 서경(書經) 또는 서(書)라고도 하며, 춘추 시대 이전의 당우(唐虞), 하(夏), 상(商),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의 중요한 역사 기록이 실려있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이 책은 실전(失傳)되고 말았다. 진시황 때의 분서(焚書)로 인해 상서가 없어져 버렸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산동(山東) 제남(濟南)에 진(秦)나라 때 박사(博士)를 지낸 복생(伏生)이라는 사람이 상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들리자, 한 문제(文帝)는 조착(晁錯)을 보내 복생을 만나 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복생이 소장하고 있다는 책들은 진(秦) 한(漢) 간에 일어난 전란 때문에 역시 흩어지거나 없어져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을 다시 정리해보니, 상서는 원래 100편으로 되어있었지만 여기에서는 겨우 29편이 수습이 되었으며, 그것도 모두 죽간(竹簡)에 고문으로 쓴 것들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읽을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복생을 청하여 읽게 하였지만, 이미 90을 넘은 나이인지라, 그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에 복생의 딸을 불러 복생이 읽는 것을 받아 적도록 하였다.
조착은 이러한 방법으로 일일이 기록하여 마침내 한권의 책이 완성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금문상서(今文尙書)》였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유일한 판본이었다.
한나라 경제(景帝) 때, 산동지방의 곡부(曲阜)에서 다시 《상서》 한 권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옛날 공자가 강의하던 집의 벽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노(魯)나라 공왕(恭王; 경제의 아들)이 궁을 넓히기 위하여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한 무더기의 죽간으로 되있었는데, 그중 고문으로된 《상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이를 정리하였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복생의 것과 비교해 보면 29편 이외에도 16편이 더 많았는데, 사람들은 복생의 《금문상서》와 구별하기 위하여 공안국의 판본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부르게 되었다.
《상서》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논쟁이 있어 왔으며, 심지어는 가짜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서한(西漢) 말기의 장패(張覇)가 만들었다는 102편의 《상서》가 그러하다. 이 때문에 당(唐)나라에서는 공안국의 판본을 표준으로 규정하였으나, 훗날 청대(淸代) 학자 염약거(閻若거) 같은 이는 공안국의 판본도 가짜라고 주장하였다.
허신은 《설문해자(說文解字)》 <서(敍)>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 모두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래의 글자체를 이상하게 바꾸고, 벽을 향하여 알 수도 없는 글자를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詭更正文, 鄕壁虛造不可知之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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