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책 속의 향기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淸潭 2011. 2. 6. 14:11

살인·근친상간… 40년간 감춰온 사건의 진실은?

범죄 목격한 시인 지망생, 어두운 비밀이 있는 남매…
'보이지 않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욕망을 밝혀내다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이종인 옮김|열린책들 | 336쪽|1만800원

살인사건 현장에 있다가 단 한 사람의 증인이 되어버린 시인 지망생, 근친상간의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남매 등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이야기꾼 폴 오스터의 탁월한 재능이 한껏 발휘된 흥미 만점의 작품이다. 그런데 작가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따라가다가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어리둥절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음모들과 위험한 섹스 이야기를 한참 전개하다가 명확한 결론이나 지향점 없이 갑자기 멈추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목인 '보이지 않는(invisible)'이란 단어에 그 돌연한 중단을 해석할 열쇠가 들어 있다.

뉴욕을 소설의 무대로 즐겨 택하는 소설가 폴 오스터. 이번 작품에서는 거대 도시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대도시의 뒷골목처럼 어두운 금지된 욕망과 사랑의 드라마를 펼친다. /게티 이미지 멀티비츠

폴 오스터는 우리의 삶이 남에게 보여주는 드러난 삶과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비밀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스파이의 삶과 유사하다고 보는 듯하다. 작가는 '세상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은 가시적인 것이고/ 또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미국 시인 조지 오펜의 시를 인용하지만, 소설이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그 가시적인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이 소설에서 '보이는' 부분인 살인사건과 근친상간의 범죄는 화자(話者)의 언술이란 형태로 제시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 다니는 스무살의 문학도 애덤 워커다. 작가는 1부에서 애덤을 '나'로 등장시킨 데 이어, 2부와 3부에서는 각각 2인칭과 3인칭 시점으로 애덤을 내세워 1967년 한 해 동안 그가 겪었던 일들을 서술한다.

소설은 불치병에 걸린 변호사 애덤 워커가 죽음을 앞두고 40년 전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들을 소설 형식으로 기록해 대학 시절 친구인 소설가 짐에게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1967년 시인 지망생인 '나'(애덤)는 프랑스에서 교환교수로 온 보른과 그의 동거녀 마고를 우연히 알게 된다. '나'는 거액을 주며 문학잡지 창간을 권하는 보른에게 감사하면서도 보른 몰래 마고와 동침함으로써 그를 배신한다. 그런데 보른과 산책하다 소년강도를 만났고, 보른이 그 소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한다. '나'가 신고를 하러 간 사이 보른과 소년은 사라졌고 소년은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된다. '나'는 보른이 소년을 죽였다고 의심하지만 명백한 증거는 없다. 1부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살인사건의 진범이 아니라 보른을 의심하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늦춘 자신을 혐오하는 애덤의 감정뿐이다.

이어지는 2부에서 애덤은 '너'라는 2인칭을 내세워 자신이 누나와 저지른 충격적인 근친상간을 고백한다. 짐은 '너'의 누나인 그윈의 간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원고를 보여주지만 원고를 읽은 그윈은 동생과의 사건을 전면부인한다. 남매의 충격적인 사랑이 읽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면, 이어지는 그윈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반박은 '너'의 고백이 지닌 진실성을 통째로 의심하게 만든다. 3부에서 '그'로 등장하는 애덤은 보른이 있는 프랑스로 건너가 보른의 새로운 약혼녀에게 그가 저지른 범죄를 폭로함으로써 결혼을 막으려 하지만 약혼녀 역시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애덤도 보른도 마고도 모두 죽은 40년 뒤, 짐은 애덤이 남긴 글을 읽는다. 사건 관계자들이 대부분 사라진 시점에서 짐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두운 과거사의 진위가 아니다. 짐이 본 것은 인간이 욕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그 욕망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에게 사실을 말하게도 하고 거짓을 꾸며내게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사실의 파편들 속에서 캐낼 수 있는 삶의 진면목이라고 소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