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은 이정(1554~1626)은 세종대왕의 현손으로 태어나 선조-인조년간에 활동한
종실 출신 문인화가이다
그는 조선 고유의 미감을 반영한 묵죽화풍을 정립하여 명실공히 한국회화 상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 받는 인물임
수은 유덕장(1675~1756)은 탄은 이정의 묵죽법을 이어 받아 82세의 긴 생애동안 묵죽에만 전념하여 진경시대 화단에서 묵죽으로 일세를 올린 문인화가이다. 수운의 묵죽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늘 탄은과 비교되었다. "탄은은 세로써 뛰어나고 수운은 운으로써 뛰어나다"라는 혜환 이용휴의 간단 명쾌한 평이 탄은과 수운이 살았던 시대와 그 두사람의 기질 차이를 모두 포괄하는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월헌 임희지(1765~?)는 역관 출신으로 조선후기 말엽의 대표적인 여항화가 중 한명이다. 난죽을 잘했는데, 조희룡의 호산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대나무는 강세황과 더불어 이름을 나한해 했고 난초는 그를 지나쳤다"조희룡의 이러한 평가는 임희지의 묵란화와 묵죽화가 자신의 미적 취향과 기준에 부합되었기 때문이계지만, 여기 소개된(풍죽) 묵죽화는 그의 화명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하 신위(1769~1847)는 10여세 무렵 부터 시서화 삼절의 명성을 얻었을 만큼 천부의 자질을 타고난 문인이었다. 문예 다방면에 걸쳐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일세를 풍미했던 그가 가장 실혈을 기울인 것은 다름 아닌 묵화였다고 전함
묵죽화로 일세를 풍미했던 신위의 화명에 가려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지만, 동시기에 묵죽화에 능했던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소산 송상래(1773~1843)도 르런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학문이 남달리 뛰어났거나 혼로에서 크게 및를 보지는 못했지만, 묵죽화를 비롯한 서화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와 친분이 깊었던 신위는 "그대의 묘한 먹은 세상을 가질만한체, 하늘의 뜻을 그대가 늙을수록 더욱 궁색하게 하려는 것인가 보다"라면 안타까움을 피력할 정도라함.
글씨와 그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해강 김규진(1868~1933)의 묵죽이다. 각 글씨체에 두루 통하고 또(해강난죽보)를 펴낼 만큼 난죽에도 일가를 이룬 해강은 사찰의 많은 현판 글씨를 비롯하여 대폭의 묵죽병풍들을 남기고 있다.
죽농 서동균(1902~1978) 호는 죽농 본관은 달성 대구인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 하였으면 석재 서병오의 제자이다 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대나무 그림에 능했다.
우봉 조희룡(1797`1866)은 조선 말기 문화 혁신을 주도하여 추사체를 창안하고 일격의 문인화를 제창하여 예원을 주도하였던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서 추사의 학예를 계승하고 후학들에 이어준 인물이다.
운미 민영익(1860~1914)은 고종년간 민씨세도를 담당했던 정치가이자, 난,죽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문인화가였다. 그는 비록 추사 김정희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지 못했지만 가학으로 후사 학예의 정수를 체험하고 또 자신의 학예 기반으로 삼고 이었다. 그의 생부 민태호 숙부 민규호가 추사의 제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미는 이와 같은 가학 전통의 토대위에 일찍부터 문예에 눈을 떠 이미 15세 무렵부터 서화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는데, 추사의 학예를 계승한 문인답게 묵란화에 유독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묵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천부의 재능과 조응하면서 독창적인 자가 난법으로 열매를 맺기 된며, 대나무 또한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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