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우리의옛것

경복궁 4. 건청궁

淸潭 2010. 2. 22. 13:02

조선의 법궁 경복궁 4. 건청궁 -아! 명성황후...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玉壺樓) - 을미사변, 명성황후가 시해된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비극의 현장이다.)

 

 

 

 

건청궁...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이곳 경복궁내의 건청궁 옥호루에서는 고종의 비 민씨가

일본인 낭인폭도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일본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던 조선정부의 친러시아 정책에 반발한 일본이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앞세워 민비 시해를 감행한다.

일본군은 낭인으로 가장한 무리들과 함께 건청궁 곤녕합에 난입하여 옥호루로 피신한 민비를 잔인하게 시해,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을 건청궁 동쪽의 소나무 숲에서 불태워 버린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적 비극인 이 사건이 소위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고

이후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변경, 칭제건원을 함으로써 독립성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민비가 명성황후로 추존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독립성은 더욱 훼손되어 갔고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본격적으로 일제의 식민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05년도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일본의 조선 주재 일등영사였던 우치다 사다쯔지(內田定槌) 의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장안당과 곤녕합사이의 뜰에서 시해됐으며

황후의 시신은 곤녕합의 동쪽 누각부분인 옥호루의 방안으로 잠시 옮겨 졌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시신을 불태워졌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많은 자료들에 명성황후의 시해장소가 옥호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건청궁이 경복궁 중건시에 대원군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니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즈음인 1873년에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황후의 거처가 황후의 안녕을 비는 뜻인 곤녕합으로 명명된 사실과

이곳이 황후가 시해당한 장소라는 사실이 대비가 되니 

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건청궁은 경복궁내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사대부가옥의 형식에 따라 지었다.

그러나 사대부 가옥의 경우 99칸까지 허용되던 것에 비해 건청궁은 250칸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곳 건청궁은 그 후 일제에 의해 철저히 철거되었고

최근인 200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복원에 착수, 2007년에 완성되기에 이른다.

 

(건청궁- 눈이 쌓인 북악을 배경으로...)

 

 

 

 

 

 

정문을 들어서면 중간 마당이 나온다..

 

 

 

 

이 함광문을 들어서면 바로 곤녕합, 옥호루이다.  

 

 

건물 전체의 이름이 곤령합(坤寧閤), 같은 건물의 동쪽 누각 부분이 옥호루이다.

 

 

 

 

 

그리고 옥호루의 현판은 남쪽으로 걸려 있는데  같은 누각의 동쪽으로는 또 하나의 현판이 붙어 있다.

사시향루(四時香樓)-사시 사철 향기를 풍기는 누각이니 황후의 처소다운 이름인 것 같다. 

 

 

 

 

그리고 사시향루를 돌아 뒷쪽을 보면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시합(正始閤)... 황후의 침소이다.

 

곤녕합이라는 한 건물에 네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곤녕합은 건물 전체의 이름이고 옥호루, 사시향루, 정시합은 각각의 부분에 대한 이름인 것이다.

 

 

 

건청궁 개략도...

 

 

 눈이 내렸던 2010년 설날 연휴 첫날 건청궁의 곤녕합, 옥호루를 본다.

역사의 비극, 을미사변을 상기하면서

다시는 이 나라를 그런 비극에 빠뜨리지 않을 국력을 갖추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극일(克日)...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건청궁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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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빌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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