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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이동인, 김법린, 백성욱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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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이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크게 위축되면서 산중불교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법을 구하고자 인도·중국 등 해외 유학 길에 나서는 스님들의 발길도 크게 줄어들었고, 결국 이 시대 유학승에 대한 자취를 언급한 기록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해외 유학승에 대한 기록은 조선의 국운이 다해 쇠망의 길을 걷게 되는 한말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유학은 조선침략의 전략에 따라 접근한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일본으로의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불교가 500년 가까운 세월 침체를 면치 못하는 사이에 서구문물과 서양의 교육체계까지 받아들인 일본불교가 크게 성장해 있었던 이유도 있었다.
기록으로 볼 때 한말 가장 먼저 일본으로 건너간 스님은 이동인이다. 이동인은 1879년 6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배우고 문물을 익히면서 일본사회의 이모저모를 배웠다. 그러나 실제 학교를 다니거나 법을 구했다는 기록이 없어 유학승으로 보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동인은 1879년 최초로 일본행
그러나 이동인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회고록에서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이끌어주었고 우리는 그러한 책(이동인이 일본에서 들여온 물리·화학·지리·역사 등)을 읽어 그 사상을 몸에 익혔으니 봉원사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인 것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개화파 젊은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이동인에 대해서는 조선을 문명국가로 만들려고 한 노력에 대해 긍정적 평가가 따르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동인이 부산에 별원을 세운 일본 혼간사(本願寺)의 승려 오쿠무라의 알선으로 일본에 가고 일본에서 정치가들을 접촉하는 등 일본인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이유를 들어 일본의 조선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한 전형적인 친일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동인이 기록에 나타난 인물 중 한말 일본으로 건너간 최초의 스님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는 근대에 접어들어 스님들의 해외 진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동인에 이어 일본으로 간 인물은 1881년 5월 유점사 스님 묵암 등 4인이다. 『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50年誌)』에 “1881년 5월 3일 유점사승 묵암외 3인이 일본 경도로 유학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식 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 유학은 만해 스님이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인도에 가 배워서 부처님과 조사들의 참다운 발자취를 찾게 하며… 또 중국에 유학해… 그리고 구미의 여러 문명국에 유학하여 그 종교의 연혁·현황과 기타의 여러 가지 일을 배워서 우리의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유학이 적절히 행해진다면 불가사의한 이익이 예사로 많을 것이 아닐 것이니 뜻 있는 이라면 마땅히 심사숙고할 문제인 줄 안다”며 승려의 유학 필요성을 강조한 이후 점차 확대됐다. 물론 이 시기 한국 불교계는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교단의 중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불교의 근대화를 이끌 인재 양성이 절실했던 때이기도 하다. 때문에 만해 스님의 유학 필요성 강조가 스님들의 유학 확산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 이후 확대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록상 유학으로 인정할 수 있는 근대 첫 번째 유학승은 누구일까.
재일조선불교청년회 기관지인 「금강저(金剛杵)」에 따르면 일제시대 최초의 일본 유학생은 1910년 말 유학해 경도 화원중학에 입학한 보현사 출신의 김법룡과 김승법이다. 이후 1913년 12명, 1914년 14명 등 유학생 수는 점차 늘어났고, 이들은 대부분 임제종과 조동종 등 선종계열의 중학이나 대학 등에 입학했다.
근대에 들어 첫 번째 유학승이 일본으로 유학한 보현사 김법룡과 김승법이라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첫 번째 유학승은 1918년 여름 조동종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건봉사 이지광, 용주사 김정해, 유점사 이혼성 등 3명이다. 이때 국내 불교계는 이들의 귀국을 축하하는 대대적인 환영회를 열 정도로 유학승들에 대한 기대가 높기도 했다.
이후 선진화된 일본불교를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일본 유학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각 교구본사에서 공비 유학생을 선발해 파견한 경우가 늘어났다. 그리고 조선의 대표적 친일파들이 참여해 구성된 조선불교단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했으며, 이도 저도 아닌 경우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스님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생들은 귀국할 때 결혼해서 돌아오거나, 돌아와서는 자신을 후원해 준 은사 등 주지들을 축출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불교에 대한 학식까지 부족한 상황이 적지 않게 발생하면서 기성 세대들과의 갈등이 빈번해졌다. 이에 따라 문제가 심각해지자 유학생 선발과 관리규정에 관한 세부사항을 만들어 유학승을 관리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28세 요절 이영재 ‘혁신론’주장
그렇다고 근대 들어 불기 시작한 스님들의 유학 열풍이 부정적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하고,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에 진학해 공부했던 이영재는 안팎의 상황을 살핀 후 조선일보에 총 22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조선불교혁신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재일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금강저」 발행에 헌신하기도 했던 이영재는 이후 1925년 인도 유학 길에 올랐으나 구법순례를 하던 중 1927년 스리랑카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영재와 함께 활동했던 일본 유학승들 가운데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해 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본 유학승의 증가는 한국불교 근대화의 주춧돌을 견고하게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이들 가운데 일제와 타협하면서 중생들의 삶에 고통을 더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는 부정적 측면이 교차하고 있다.
조계종 교육원이 1998년 발간한 『승가교육 2집』에 「일제시대 불교 유학생의 동향」을 발표한 이경순 씨는 “대다수 일본 유학을 경험한 승려들은 한국 승단의 왜색화를 촉진한 측면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승려의 유학은 승려의 신분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제고시켰으며 교단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근대 유학승의 대다수가 일본을 택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로 향했던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 인물이 1919년 중앙학림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한 김법린이다. 김법린은 경상북도 영천 출생으로 14세에 출가해 1915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파리로 유학해 파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가 1930년 일본 고마자와 대학교에서 불교를 연구하기도 했다. 이어 1933년부터 다솔사, 범어사, 해인사 등에서 불교를 강의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여러 해 복역을 하기도 했다. 김법린은 8·15광복 후 불교중앙총무원장으로 불교혁신운동에 앞장섰고 동국학원 이사장과 총장을 역임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김법린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불교 밖에서도 문교부장관, 원자력원장, 3대 민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근대 유학승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에게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김법린 파리-백성욱 독일 유학
그리고 김법린과 함께 1919년 중앙학림을 졸업한 백성욱은 1922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같은 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한 백성욱 역시 동국대 총장과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승 신분으로 배운 바를 후학들에게 전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이외에 중국으로 유학한 스님들이 있으나, 이들이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것인지 정치적 망명 차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백제 발정과 겸익으로 시작한 한국불교 유학승 관련 기록은 조선시대 긴 세월 그 종적을 찾을 길이 없다가 이렇게 근대에 접어든 한말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시대 일본에 편중됐던 유학승의 발길은 현재 세계 각국으로 향하고 있으며 다양한 학문과 문화를 배워 한국불교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61호 [2008-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