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를 해독하는 데에는 몇 가지 핵심 코드가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배신’이란 코드다. 올해 대선에서도 배신의 멍에를 벗지 못해 허덕였던 정치인이 수두룩하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이회창 무소속 후보, 이인제 민주당 후보도 그랬다. 탈당과 경선 불복은 정치적 배신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DJ 정권 말기에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씨를 공격했던 일, 또 노무현 정권에서 당 의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냈으면서도 노 대통령과 결별한 것 때문에 시달렸다. 이명박 당선자가 선거 막바지 정몽준 의원을 영입한 것도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과의 불화설을 누그러뜨리려 한 측면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순항 여부를 알려면 첫 단추를 잘 끼우는지 살펴볼 일이다. 당장 인수위 구성부터 시작해 초대 내각과 청와대 인선을 제대로 하는지가 중요하다. 정권에 대한 국민의 첫인상이 여기서 판가름 난다. 대통령에게는 용인술과 좋은 정책 못지않게 정치력도 중요하다. 정치권을 잘 다루지 못하면 사사건건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 시금석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잡음 없이 굴러간다면 이명박 정권의 초기 1∼2년은 순조롭다고 봐도 좋다. 이회창씨가 충청도를 지지 기반으로 당을 만들어도, 범여권이 똘똘 뭉친다 해도 오는 4월 18대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당선자는 눈에 보이는 권력을, 박 전 대표는 보이지 않는 힘을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금 범여권이 패배의 충격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당선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은 박근혜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당내 경선에서 1.5%포인트 차이로 졌지만 결과에 승복했고, 이회창씨 출마에 대해서는 “정도(正道)가 아니다”며 단호히 선을 그었으며, 이 후보로부터 ‘동반자 선언’을 얻어내는 정치력을 선보였고, ‘BBK 의혹’ 속에서도 끝까지 지원 유세를 함으로써 경선 승복 약속을 지켰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에 따르면 타인의 선행이나 명예로운 행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고양(高揚)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박근혜는 난장판 대선에서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물론 이 후보 캠프에서는 “박 전 대표 측이 뒤에서 우리를 흔들어댔고 흔쾌히 도와준 적이 없다”는 불만이 있다. 경선 과정에서 “도곡동 땅이 도대체 누구 것이냐”고 소리 높였던 박근혜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치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봐야 한다. 대선 과정을 거치면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에서 벗어나 정치적 지도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고난은 같이할 수 있어도 영화는 같이 누릴 수 없다고 했던가. 선거 때야 급한 마음에 박 전 대표에게 SOS를 보냈지만 이제 선거는 끝났다. 당선자 주변에는 그를 도와준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박근혜를 이명박 정권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총선 공천권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고 권력을 나누다가는 ‘내 몫’이 너무 작아지기 때문이다. 권력의 속성이 그런 것이다. ‘당·정 분리 재검토’ 발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바야흐로 ‘배신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이·박 사이에는 이제 인내의 겨룸이 시작됐다. 먼저 등 돌리는 쪽이 큰 손해를 보게 돼 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박근혜가 국민의 시선에서 벗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 기다리는 데에는 박 전 대표가 일가견이 있다. 아버지 서거 이후 19년간을 인내했던 그다. ‘경선 승복’ 약속은 지켜졌기에 이제 공은 당선자에게 넘어갔다.
이명박 당선자가 ‘동반자’ 약속을 지킨다면, 대선의 최대 공신으로 떠받들고 간다면, 박 전 대표의 인기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다. 반면 박근혜의 운신의 폭은 오히려 줄어든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 박근혜가 배신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순간 정치적 악몽이 시작된다. 배신은 이별에 명분을 준다. 그게 총선 전이라면 치명적이다. 대한민국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국민에게도 불행이다.
김두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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