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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발자국이 모든 짐승들의
발자국을 덮어버리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귀결.
이른 봄 찬 바람에
새 순 다치게 하지 않으려
죽어서도 서 있는 갈대.
그 苦는 苦가 아닌 행복.
‘나’라는 존재는
고통을 짓는 동시에
행복을 주는 좋은 도구.부처님께서 사왓티 기원정사에 계실 때 사리뿟따 존자가 비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코끼리 발자국이 모든 짐승들의 발자국을 덮어버리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국 사성제로 귀결됩니다. 사성제란 중생의 현실에는 고(苦)로 가득하다는 것이요, 모든 고는 원인들이 모여서 일어난다는 것이며, 중생이 직면하는 고는 없앨 수 있으며,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불교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를 알아야 정견 세워사실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법을 설하기 전에 우빠까라는 사람을 만나서 설법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걸어오는 모습을 본 우빠까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 공부를 많이 해 위대한 사람 같습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어떤 사상을 이어받았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스승을 두고 있지 않고 스스로 스승이 됐습니다. 내 스스로가 존귀한 자로서 우뚝 서있습니다.” 그러자 우빠까는 “존귀한 존재 같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다”며 부처님을 떠나 자신의 갈 길을 갑니다. 첫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우빠까는 그렇게 떠나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의 문제의식은 밖에서 누구로부터의 가르침을 통해서 바라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부처님이 독단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 있는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근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왜 苦만 말하는가따라서 코끼리 발자국이 모든 짐승들의 발자국을 덮어버리듯 여기서의 고는 단순하게 고통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 자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습니다. 즉, 누구로부터의 가르침을 통해서 문제를 바라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문제로부터 근본문제를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에 가서도 그 회향처는 자기 자신입니다. 사성제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행복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각성하게 합니다. 「잡아함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고(苦)의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과 노쇠함과 죽음, 슬픔, 후회, 고통, 비애, 절망이 고다. 가까운 것과 헤어짐이 고요, 달갑지 않은 것과 만나는 것이 고다. 요컨대 집착과 관계가 있는 이 존재의 다섯 쌓임이 모두 고다.”
왜 불교에서는 인생의 근본을 고라고 봤을까?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맛있고, 집이 없다가 집을 소유하면 굉장히 행복하지 않습니까? 왜 불교는 행복함을 말하지 않고 고만 강조하는가!
행복한 것을 얘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 냉철하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행복한 일이 있어도 이 행복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곧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엄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 역시 변해가는 존재이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에 집착하고 있으니 또한 고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뒤집으면 곧바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40대 초반에 이 세상을 떠난 자연주의 학자 데이빗 소로우는 폐병으로 고생할 때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휴식이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자기가 생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한 휴식이다.” 죽음을 휴식처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공부가 되어야 행복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어서도 서 있는 억새요즘 산에 가면 억새가 참 좋습니다. 억새나 갈대는 죽어가면서도, 아니 죽어서도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른 본 찬 바람에 새 순이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썩어 문들어져 가는 자신을 지켜보면서도 자식을 위해 한 평생을 버티고 서 있지 않습니까? 이 때 고는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얼마나 실현 됩니까? 진정한 내면의 나는 보지 않고 타인이라는 거울 속에 비춰지고 있는 자기의 가치에서 나를 보려만 합니다. 예를 들어 경제인들이 돈을 벌어서 회향하는 원력은 뒷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자신이 번 돈을 쓰면서 취하는 도취감과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까?
마약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마약을 취한 순간동안은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대 자유를 맛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속의 자유는 환각이지 진정한 자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두 경우가 다른 것이라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를 들여다보면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가 제일 큰 원인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만나고 싶고 느끼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어떤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만날 것이며 어떤 느낌을 취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명에 가려진 중생은 오온에 걸려든 욕망과 집착으로 점철된 것들을 취하며 자기 자신을 느끼고 만나려 합니다.
“무명으로 인해 중생은 무상, 무아라는 존재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중생은 세상 사물이 실재하며 지속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즐기려고만 합니다. 그 순간, 갈애를 만들고 그 갈애로 인해 중생은 어떤 것은 얻으려 하고, 어떤 것은 피하려 합니다. 이러다 보면 생존 투쟁의 염세 속으로 빠져들게 됨은 물론 다른 생에서도 이어집니다.
한 생 동안 지은 선행과 악행은 다음 생 육도(六道) 중 어디에 태어날 지, 어떤 심적 성향을 타고날지 그리고 그가 타고나는 업식 일체를 결정합니다. 삼법인이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입니다. 삼법인 중에서 일체개고를 빼고 열반적정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일체개고인 그것을 바로 뒤집어서 보면 종교를 통해 깨닫게 되면 그 삶 자체가 오히려 여기서 보면 열반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일체개고라고 하는 것은 곧 열반적정이라고 합니다. 「열반경」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하지 않을 때 고통을 주는데 항상하지 않음을 알고 항상하지 않게 살면 내가 항상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맛있는 음식도 같은 것만 매일 먹으면 지겹습니다. 즐거움 역시 궁극에서 보면 고통이지만 그것이 고통인 줄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그것이 바로 낙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이 육신이나 이 정신이 나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것을 알고 여기서 자유로워지면 낙으로 변합니다. 깨닫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고통-행복 다 갖고 있어따라서 이 ‘나’라는 존재는 고통을 짓는 것과 동시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도구인 것입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길로 가는 방법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 핵심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계, 정, 혜, 삼학입니다.
계정혜 삼학을 거울삼아 불법을 닦으면 부처님이 제시한 정도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penshoot@beopbo.com
이 법문은 부산 홍법사 주최로 10월 29일 열린 ‘홍법사 개원 2주년 기념 대중논강’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