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空 임을 알 때
꿈에서 깨어나는 것
불성 있음을 깨달으면
발심 저절로 이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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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환 스님은 1월 22일 경기불교문화원(원장 진철희)이 주최한 큰스님 초청 신년법회에서 ‘초발심시변정각’을 주제로 법문했다. 인환 스님은 이날 법문에서 “보주의 비유를 들며 우리에게도 불심이 있음”을 강조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환 스님의 법문을 요약 게재한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부처님과 인연 맺고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발심입니다. 발심이 바로 서야 수행이 잘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늘 말씀하시길 이 세상 온갖 일 우연한 것 없고 기적 없다고 했습니다. 종종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그 일의 원인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씨앗 안 뿌리고 열매 맺길 기다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는 말씀이시죠. 며칠 있으면 음력 정초가 되는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덕담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실 겁니다. 그런데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먼저 복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니 “복 많이 지으세요”하고 인사하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초발심입니다. 뚜렷하고 명확한 발심이 원인이 된다면 바른 수행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을 많이 지어야 복을 많이 받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 “초발심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을 수가 있습니다.
초발심이란 내 몸을 비롯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지 않다는 것.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 곧 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생멸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꿈에서 깨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꿈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해탈 할 수 없습니다. 꿈을 깨는 순간 바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 즐거움을 만끽하시고는 스물 하루만에 하신 첫 말씀이 “참으로 희한하구나. 깨닫고 보니 성불할 수 있는 이가 나 뿐이 아니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구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성이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하나의 컵을 본다고 했을 때, 내가 봐도 컵이고 여러분이 봐도 컵이고 부처가 봐도 컵인 것.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아는 것이 불성입니다. 누구나 그 가능성을 지니고 나온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는 게 거룩하고 대단해서 세속에서는 불가능하고 먼 세상에만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서 “나는 안돼.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수행은 무슨…”한다면 한없이 육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성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깨닫고 발심으로 수행한다면 그 누구도 생사해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법화경』에 ‘보주의 비유’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무명속에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의 좋은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이를 불쌍히 여긴 친구가 그 친구의 걸망에 보물을 담아 둡니다. 그 친구 모르게 말이죠. 그런데 이 가난한 친구는 보물이 든 걸망을 메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초라한 걸망에 보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채 계속 가난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수년이 지난 후 두 친구는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보물을 준 친구는 가난한 친구가 번듯한 집을 짓고 부유하게 살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보물이 있어도 있는줄 모른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불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를 뿐입니다. 견성한다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밝혀내는 것 뿐입니다. 불성을 깨닫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년만년 묵은 동굴의 어둠을 밝힐 때 천년만년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동굴 안에서 횃불을 켠 순간 밝아집니다. 어둠은 일 초도 안돼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일생을 통해서 발심에서부터 수행, 생사해탈을 몸소 보여준 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디 딴 나라 사람도 아니고 수백년 전 사람도 아니고 책속에 자주 나오는 사람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땅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다간 사람입니다.
번듯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시험 준비를 하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만 합격하면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라는 기대로 공부에 전념하던 청년은 어느날 종로 거리에서 당파싸움에 휘말려 효수를 당한 한 벼슬아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깨닫지요. 세상에 영원한 것, 진실인 것 없구나 하고 말이지요. 그 길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합니다. 바로 무용 스님 일화입니다.
무용 스님이 열반하시던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에서 ‘점안’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무용 스님이 세수 90이 넘어 어느 날 대중들을 모두 모아놓고는 “내가 오늘 가야 겠다. 뭐 못마땅한 것 있느냐?”하고는 입적하시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못마땅하다고 묻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잠잠한 가운데서 한 어린 시봉승이 말합니다. “스님 오늘은 안되겠습니다. 곧 있으면 설 다가오는데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라고 말이죠.
무용 스님은 이 시봉승 말을 듣고 기다렸다 며칠 후 다시 대중들을 불러모아 처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잠잠함을 깨고 그 시봉승이 한마디 합니다. “스님, 이번에도 안됩니다. 신도들이 식구들하고 명절 보내고 이제 스님 뵈러 절에 올텐데 참으신 김에 조금만 더 참아주시죠.” 무용 스님은 “그러마”하고는 또 한번 기다립니다. 그리고서는 또 며칠후 대중들을 불러 전과 같이 물었죠.
이번에도 또 그 시봉승이 일어나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 고맙습니다. 이젠 가셔도 되겠습니다.” 그러자 무용 스님이 한 마디 하십니다. “정진을 하는데 있어서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하고(知無生死), 생사가 없는 줄을 체험할 줄 알아야 하고(證無生死), 생사 없는 도리를 마음대로 쓸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 거기서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용 스님은 몸소 용무생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저 세속적 명예만을 위해 공부하던 한 청년이 무상함을 깨닫고 해탈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불성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발심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그 마음 변치 않고 정진한다면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박주미 기자 jumi@beopbo.com
* 바로 잡습니다
789호 명법문 명강의 지관 스님 약력에서 ‘선학사전’을 ‘가산불교대사림’으로 바로 잡습니다.
내가 본 큰스님
지행합일 실천한 큰 스승스님을 처음 뵌 것은 10여년 전 수원포교당 거사회에서 법문을 청해 듣던 때였다. 그 때 스님을 뵙고 법문을 들으면서 든 생각은 참으로 소탈하시고 꾸밈이 없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이었다. 스님의 법문도 스님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재미난, 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은 들을 때는 재미나지만 듣고나면 몇 번이고 되새기게 된다.
아직도 대중교통을 고집하시고 그 흔한 주지 소임 한 번 맡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스님은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좇지 않으신다. 평생을 수행과 학문에 몸바친 이상 그 외 다른 것을 탐할 경우 그것은 ‘외도’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는 것은 아는데서 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스님은 정진하시면서 터득한 바를 그대로 실천하며 사시는, 바로 선지식인 것이다.
경기불교문화원
진 철 희 원장
인환 스님은?1931년 원산에서 출생한 인환 스님은 1952년 부산 선암사 선원에서 입산 득도하여 참선 수행하다 1953년 원허 효선대종사를 은사로 석암 혜수율사에게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88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1990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명예 교수로 재직중이며 서울 경국사에 주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