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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나라는 한국사?

淸潭 2006. 12. 13. 21:21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공격하여 송을 회수 이남으로 밀어붙여 넓은 땅을 차지한 정복왕조 금(金)나라의 시조는 아골타이다. 당시 강력한 금나라는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고려는 금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사대의 예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금나라가 신라 또는 고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1.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

(1). [ 금사(金史) <세기>] * 금나라의 실록. 세기는 금태조와 그 이전 자료 수록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합부(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참고로 '함보'는 법명이다. 그리고 이 함보란 사람이 왕이 된게 아니라 함보의 7대손이 왕이 되었다.)

(2).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청나라 건륭제때 만들어진 북방민족을 다룬 역사서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3).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 남송 때 만들어진, 송과 거란, 여진의 역사 저자 서몽신(徐夢莘)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4). [고려사(高麗史)]

 

『고려사』 세가 예종 10년 정월 초의 기사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금의 태조인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 渤海 同本一家)" (금나라가 발해 유민들을 회유할 때)"

(5). [송막기문(松漠紀聞)] * 남송(南宋) 때 만들어진 금나라 견문록 저자 홍호(洪皓)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6). [동사강목(東史綱目)]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

2. 아골타(阿骨打)와 신라와의 관계는?

보면 알겠지만, 위의 자료에서는 금나라의 아골타는 분명하게 신라의 후손이라고 적혀져 있다. 그렇다면 아골타의 조상이 되는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은 신라와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1). 김행(金幸)혹은 김준(金俊)은 두가지의 이름의 상반된 기록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金傅)를 시조로 하는 부안김씨의 족보에는 김행(金幸)이 마의태자의 아들로 나오고, 형제를 둘 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김행은 두 형제를 고려에 놔두고 홀로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안정목의 동사강목에서는 '김준(金俊)이 여진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위에 적혀있듯이 형제가 셋으로 나온다. 적어도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아들인 이 둘 중, 김행(金幸)이냐 김준(金俊)하는 것은 이름의 차이일 뿐, 결국 마의태자의 아들이 만주로 건너갔으며, 그가 '아골타'의 조상이 된 것이다.

(2).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누구인가? 그리고 실존인물?

 마의태자에 관해서 흔히들 알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경순왕 김부(金傅)가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하자 홀로 분개하여 개골산으로 갔다고 한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머리를 깍고 해인사에 들어간 인물로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이 전설이라고 여기는 인물이다.

 하지만, 마의태자는 실존인물이다. 다만 한명이 아닌, 두명의 마의태자가 있었다. 신라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에 김부의 아들들이 태자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 두 명의 마의태자는 바로 '김일(金鎰)과 김분(金奮) 바로 이 두사람이다. 다만 김일(金鎰)은 부안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지만, 김분(金奮)와 다른 역사서 에도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일설에 '김일'이 마의태자로 알려진 것은, 부안김씨와 경주김씨의 족보에서 경순왕 김부와 첫째 석씨 부인사이에 난 아들(김분)을 넣지 않고, 둘째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김일'만을 넣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에서는 석씨, 박씨 부인이 모두 들어감)

이것은 조선시대에 나온 신라시대 박(朴)·석(昔)·김(金) 세사람의 족보를 적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인조 20년, 1642년)에 ''김일(金鎰)'과 '김분(金奮)' 이 두사람이 모두 나타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위로 종합해볼 때 마의태자는 두명이었고, 현존인물이었음이 확인이 된다.

(3).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유적

 또한 강원도 인제군 김부리는 '마의태자'의 자취가 묻어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아직까지 대동제를 통해 마의태자를 모시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마의태자의 위패가 봉안되 있는데, ‘김부대왕 제1자(金富大王 第一子)’’라고 명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는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출토되었다. 마의태자의 후손중에 한명이 이곳에다가 탑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맺음말..

이상으로 볼 때, 아골타의 조상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울 때 '신라의 얼'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국명으로 천명했다는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의 역사를 뒤은 것이라고 볼 때, 금나라도 당연히 고려와 함께 신라의 역사를 뒤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로 금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
글쓴이 : 이선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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