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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덕승총림의 선맥을 잇고 있는 수좌 설정 스님은 불신은 진실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만큼 정치든 뭐든 자기소임에 충실하고 남을 속이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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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덕사 능인선원에는 만공 선사가 쓴 덕숭청규가 남겨져 있다. △신명을 아끼지 말고 용맹으로 정진하라. △금번 산림(山林)에 참학(參學) 요필(了畢)하기를 동맹할 사 △선원 내에 묵언을 엄중히 할 사 △선정 중 수마(睡魔)를 엄금할 사 △산림 중 출타를 불허할 사 △청규를 한 가지로 위반할 시엔 축출(逐出)할 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선불교 중흥의 모태가 되었던 덕숭총림 수덕사. 이곳은 선의 종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 수많은 납자들이 생사를 건 치열한 정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중심에는 바로 능인선원 수좌(首座) 설정 스님이 있다. 13세에 출가해 방장 원담 스님을 은사로 덕숭총림의 선맥을 잇고 있는 스님은 이판과 사판을 회통하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대승불교의 길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하안거 해제를 하루 앞둔 8월 7일 수덕사 황학루에서 스님을 만났다.
▷수덕사 능인선원 편액에 ‘禪之宗刹(선지종찰)’ ‘東方第一禪院(동방제일선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곳 선원은 어떤 곳입니까?
“능인선원은 구한말 경허 선사가 다 끊어져가던 선풍을 일으키고 수월, 혜월, 만공, 벽초, 혜암, 원담 스님 등이 그 뒤를 이어 선을 중흥시킨 곳입니다. 전국 사찰의 방장, 조실 스님 치고 이곳 선원을 안 거친 이가 없을 만큼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곳이라 할 수 있지요.”
▷선원 운영에 있어 다른 곳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모든 선원이 비슷합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다른 어느 선방보다도 자유로운 게 특징입니다. 여기 오는 스님들은 10~30년씩 화두를 들고 수행해 온 분들이라 죽비를 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공부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채소 기르고 풀 베는 등 노동을 강조하는 것이 여기의 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하안거 때 선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몇 가지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자유롭되 기본적인 규율은 엄격합니다. 크게 웃고 떠드는 것이 금지돼 있고 죽을 상황이 아니면 절대 밖에 못나갑니다. 말을 많이 해서도 안되고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휴대폰도 금합니다.
이번 하안거에 25분이 동참했는데 딱 한분, 세르비아 출신 외국인 스님이 장이 흘러내리는 큰 탈이 생겨 중도에 빠졌습니다. 그 스님은 병을 감춘 채 정진하다 좌복에 피가 흥건히 고인 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선방에서는 그 분이 병원으로 실려 가자 좌복을 빼버렸습니다. 선방의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토록 치열하게 수행을 하는 걸까요?
“선(禪)은 모든 번뇌와 망상을 단번에 잘라버리는 지혜의 칼입니다. 자신의 생사를 뛰어넘을 때 참다운 중생제도도 할 수 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안거를 하고 또 정진하는 기간은 세상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혜의 칼을 제련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지요.”
▷흔히 1700 공안이라고 할 정도로 화두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화두를 드는 것이 좋고 또 자신에게 맞지 않는 화두일 경우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화두는 눈 밝은 선지식으로부터 받아 참구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일단 화두를 받으면 아주 철저한 마음으로 이번 생에 안 되면 다음 생까지라도 하겠다는 각오로 공부해야 합니다. 화두를 바꾸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화두 하나를 확철대오하면 나머지 공안들은 절로 풀리는 것이니까요.”
▷옛 조사들의 어록에 보면 ‘이번 한 생 안 태어난 셈 치고 공부하라’고 할 정도로 참선수행이 대단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선은 승속과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분들이 해야 할 일이며 인간의 지혜를 개발하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그런데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해야 할 가치도 있는 것이겠지요. 선사들께서 늘 경책하시던 것이 방일(放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편리함을 좇지 않고 묵묵히 정진하다보면 처음에는 앉아 있을 때만 화두가 잡히다가 나중에는 일하고 움직이는 가운데에서도 화두를 놓치지 않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단계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 진척되면 앉으나 서나 오로지 화두만 붙잡게 되는 오매일여(寤寐一如), 나아가 깊은 숙면의 상태에서도 화두가 성성한 숙면일여(熟眠一如)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쉽고 편하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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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설정 스님이 하안거 해제를 맞아 만행을 떠나는 스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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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에서 최근 선의 대중화를 위해 간화선 입문프로그램 지도인력 양성 과정을 운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고정된 틀을 부수는 선을 프로그램화 해 지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 않습니다.
“선은 정신적 치료에도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누구든 참선을 하게 되면 참다운 행복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이렇게 좋은 선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지도인력 양성과정을 만든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간화선 인문 지도인력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치원 선생이나 보모와 같이 선의 기초단계를 보급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얼마 전 태풍과 장마로 많은 분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한반도 긴장 상황이 고조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거 기간에는 TV와 신문을 멀리 하지만 이곳을 찾은 바깥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수해현장에는 찾아가지 못했지만 주머니를 털어 수해성금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형제마저 떠난 수행자이기에 지혜를 밝혀 중생을 구제하는 게 첫 번째일 수밖에 없겠지요. 또 사회적 갈등은 불신에서 오고, 그 불신은 진실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만큼 정치든 뭐든 자기소임에 충실하고 남을 속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대중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철수개화(鐵樹開花), 화중생연(火中生蓮). 쇠 나무에서 꽃이 피고, 불 속에서 연꽃이 자라난다. 이런 도리가 바로 선(禪)이자, 불법(佛法)의 요체입니다.”
수덕사=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864호 [2006-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