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스크랩] 수덕사 견성암

淸潭 2006. 9. 17. 21:17
[선원기행]  수덕사 견성암 선원

 

<경향신문 2004/8/27/금>

 

 

 

 

 

 

 

 

 

 

 

 

 

 

 

 

 

 

 

 

 

우리 선불교의 역사에서 여성이 주체가 된 예를 찾기란 쉽지 않다.

 

비구니 스님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 또한 ‘득도한 지 백년 된

 

비구니라 할지라도 모든 비구-당일 득도한 비구라 해도-

 

앞에서 공손히 합장하며 그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팔경계(八敬戒)의 첫 번째 계목을 떠올리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비구니 승가에 대한 이러한 몰이해가 타파될 때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전국선원수좌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올해 하안거 기간동안 전국 선원에서 정진에 들어간 비구니스님은 846명으로,

 

1,025명의 비구스님들과 숫자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선원도 비구선원이 57곳, 비구니선원이 34곳으로 별 차이가 없다.

 

이는 일반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로 비구니스님들의 치열한

 

구도행각에 새삼 주목하게 만든다.

 

 

덕숭총림 수덕사의 산내암자인 견성암은 창건될 때부터 선원으로 출발,

 

선원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 된 국내 최초의 비구니 전문 선원이다.

 

초가집에서부터 출발해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

 

1965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인도식 석조건물로 자리를 잡았다.

 

 

견성암이 대표적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는

 

만공스님과 법희스님, 그리고 일엽스님의 원력이 컸다.

 

만공스님은 28년 선원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방함록의 서문을 써

 

견성암이 비구니 선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법희, 일엽스님 등 한 획을 그은 비구니 상좌들에게

 

전법게를 내려 비구니 승가가 발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국내 비구니 선풍은 비구와 비구니, 출가자와 재가자를 차별하지 않는

 

 만공스님의 너른 품 안에서 출발이 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견성암 입구에 걸려 있는 편액도 만공스님의 친필이다.

 

 

법희스님은 피나는 정진 끝에 16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이때가 스님의 세속 나이 28세. 이로써 한국 비구니 법맥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

 

스님이 75년 입적했을 때 당시 한 불교계 신문에는

 

“만공 큰스님의 지도를 받아 일찍이 소안(心眼)을 열고,

 

한국 최초로 비구니 선맥을 일으켜 덕숭산 수덕사 비구니 총림선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었던 법희 비구니 스님이 4월20일 오후 2시 세수 89세로 금생사를 마치자,

 

전국 비구니스님들은 ‘전국비구니장’으로 법희의 장례를 거행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스님이 생전에 만공 문하에서 당대의 쟁쟁한

 

수좌 금오·춘성스님 등과 마주앉아 서슴없이 법거량을 했다고 전하고 있어

 

 법희스님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케 하고 있다.

 

 

법희스님이 비구니 승가의 기초를 닦았다면,

 

일엽스님은 여성 수행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당시 상황에서

 

여성도 뛰어난 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

 

대중적 관심을 촉발함은 물론 비구니 승가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최초의 여성 유학생,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주간 등을 거치며

 

나혜석과 함께 대표적 신여성으로 불렸던 일엽스님(본명 김원주)은

 

28년 만공스님을 만나 크게 발심한 이후 출가했고,

 

33년 견성암에 들어온 이후로는 25년간 산문을 나가지 않은 채 수행을 거듭했다.

 

시인이자 수필가였던 그녀는 이광수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한국 문단의 일엽(나뭇잎 하나)이 되라”는 고평을 들었지만 출가 이후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 된다”며 절필을 했다.

 

그녀의 대표적 저서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가

 

나온 것은 62년에 와서이다. “아무래도 청춘을 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은 없습니다”는 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구도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명문이다.

 

 

일엽스님은 속세에 있을 때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오자

 

 “나를 어머니로 부르지 말고 스님으로 불러라”라고 냉혹하게 대했다.

 

당시 14세였던 아들을 위로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혜석이었다.

 

나혜석은 당시 수덕사 입구 수덕여관에 머물며 일엽스님처럼 출가하려 했으나

 

만공스님이 “스님 될 사람이 아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최근 자신의 체험을 책으로 엮은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에 의해 알려졌다.

 

유명한 화가인 일당스님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다

 

67세에 불가에 귀의,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있다.

 

 

견성암 경내를 서성이다 보면 비구들의 참선도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어떤 지극함과 더불어 결벽에 가까운 구도의지가 절로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출가와 수행의 길 위에서 남성보다 몇 배 더 요구받았을

 

치열한 결단과 각오의 순간들이 경내 곳곳에 순금처럼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홍섭/문학평론가〉

 

출처 : 수덕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bany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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