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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형제생각 / 김동길

淸潭 2019. 5. 11. 09:57

부모 생각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또는 수억 년 지치지 않고 사용해 온 '어버이' 라는 낱말은 이 나라 백성만이 쓰는 고유의 낱말인데 듣기가 우선 사랑스럽고 감동스럽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는 자식은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의 얼굴뿐 아니라 성도 이름도 모르고 자라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부모일 지라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간절할 것이다.

 

봉사의 문화가 한결같이 고아들을 매우 불쌍하게 여기는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억조창생이 모두 어버이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 사랑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산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님의 조상들은 본디 평안남도 강서 사람들이고, 어머님의 고향은 평안남도 맹산이다. 두 분이 결혼을 한 까닭에 나는 김 씨 가문에 아들로 태어날 수 있었다. 내 위로는 누님(옥길)과 형(도길) 두 사람이 있었고, 그 당시 나의 아버님은 맹산 원남면의 면장이셨음으로 나는 면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셈이다.

 

나의 아버님(김병두)은 강서에서 서당에 다니셨기 때문에  한문 지식은 상당하였지만 정식으로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독학으로 역사와 일본어를 익혔다고 들었다. 나의 어머니(방신근)는 맹산 고을의 낮은 벼슬을 했던 외할아버지의 따님으로 평양에 가서 숭현 학교에 3년쯤 다녔다고 한다. 두 분 모두 선량하고 남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그런 부모였고, 따라서 나의 어린 세월은 행복하기만 하였다.

 

90노인이 된 오늘 까닭 없이 아버님, 어머님이 그리워진다. 나이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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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생각

원남면 면장의 따님인 나의 누님 김옥길은 그 시골에서 보통학교를 마쳤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7년이나 있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없지만 그 누님은 나를 업어서 키웠다고 자랑하곤 했다. 

 

어느 해, 미국 뉴욕에서 우리 두 사람이 United Board 의 연중행사 만찬에 초대 받아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내 누님이 먼저 한마디 인사를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 하면서 내 동생이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업어서 키웠습니다라고 우수개 소리처럼 한마디 하니 그 뒤에 단위에 올라가 연설을 해야 했던 내가 얼마나 난처했겠는가?

 

나의 형은 무척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일제말기에 징병제가 강요 되면서 일본 군대에 끌려가 해방이 되기 얼마 전 22살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형이 돌이 될까 말까한 나를 안고 시골집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평양에서 월남하던 보따리에 끼어 서울까지 왔지만 6.25사변 때 그만 잃어버려서 나의 아름다운 나체를 과시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나의 아버님이 상자에 든 그 아들의 유골을 안고 어머님과 함께 소만 국경으로부터 평양역에 도착하셨을 때 평양역에는 굳은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 내가 어찌 그날을 잊을쏘냐. 해방이 되고 나의 어머니는 그 아들이 돌아 올 것으로 믿고 매일 기다리셨다. 돌아오지 못할 줄을 아시면서도.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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