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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복족(福手福足)

淸潭 2017. 2. 10. 11:26

복수복족(福手福足)

[요약] (: 복 복. : 손 수. : 복 복. : 발 족)

 

복스러운 손과 복스러운 발이라는 말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손과 발이 없는 것이 복이라는 뜻이다. ‘福手福足은 수() 나라 2대 황제인 양제(煬帝)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 불구의 몸이 되어, 징집과 노역동원을 면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 임.

 

[출전] 자치통감(資治通鑑) 196

[내용] 이 성어는 자치통감(資治通鑑) 196에 나오는데,

수나라의 부역이 심해 사람들이 왕왕 자신의 손. 발을 잘랐는데 이를 福手,福足라 했다(隋末賦役重數人往往自折支體謂之福手」、「福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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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을 위키백과에서 좀 더 자세히 보겠다.

수 명황제 양광(隋 明皇帝 楊廣, 569~ 618311)은 중국 수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문제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문헌황후 독고씨이다. 본래 수나라에서 올린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명()이나, 당나라에서 비하(타오르는 불길처럼 여색을 좋아하고 예의염치가 없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의 의미로 올린 양()을 대신 붙여 주로 양제(煬帝)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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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켰다. 만리장성을 새로이 쌓게 하였으며, 또는 아버지가 중단시킨 대운하 공사를 재개시켰다. 이 대운하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짓는 대공사였다. 이에 백성들의 불만이 컸다 하며, 그것도 모자라 양광은 수도 장안 대신 낙양에 동경(東京)을 쌓게 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운하는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를 연결시켜서, 남북 융합에 크게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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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은 낙양에 동경을 쌓는 데 매월 2백만 명의 백성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희귀한 석재와 목재를 수집하여 낙양으로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낙양의 서쪽에 서원(西苑)이라는 큰 정원을 건설하였고, 그 크기가 1.3 헥타르나 되었다. 그 안에 바다를 건설하고, 3개의 인공 섬을 지었으며, 여러 정자와 누각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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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의 북쪽에는 용린거라는 수로를 만들어서 물이 그 바다로 흘러서 들어가게 만들었고, 그 물줄기를 따라 16개의 정원을 또 만들었다. 정원에는 각종 희귀 동물을 사육하여 양광이 즐기도록 했고, 밤에는 미녀들과 같이 어마어마한 연회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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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은 대운하를 건설할 때, 40여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운하 건설에는 자그마치 15천만 명이나 동원되었고, 심지어는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양광은 관리 책임자와 인부 5만 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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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은 길이 2백척에 높이 4층이나 되는 용주(龍舟)를 타고, 거기에 황후와 후궁, 대소신료, 승려, 도사 등은 그 뒤를 잇는 화려한 배들에 탔는데 그 길이가 무려 2백여 리에 달했다. 또한, 운하 5백 리 이내에서 사는 백성들은 양광에게 음식을 갖다 바쳐야 했는데, 배가 떠날 때가 되면, 이 음식들을 그냥 구덩이에 묻고 가버렸다.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가산을 탕진하였다. 배는 백성들이 끌고 다녔는데, 그 인부들이 무려 8만여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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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은 북방에도 유람을 떠나 태행산에 굴을 뚫었는데, 이때 근처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굴을 뚫고 대로를 건설하였다. 백만여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0일 만에 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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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양광은 건축가에게 이동식 궁전을 지으라 했는데, 관풍행전(觀風行殿)이라 했다. 이 궁전을 언제든지 조립과 해체가 가능했으며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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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은 "토목공사나 전쟁(고구려 원정 등)에 동원되어 죽느니 불구로 산다 해도 노역이나 징집은 면하고 싶다"라고 하여 스스로 팔이나 다리를 잘라서 복수복족(福手福足)”이란 말이 생겨났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은 노역이나 징집에서 면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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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體髮膚 受之父母(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다. 소중한 몸의 일부를 자르는 것이 복일 수는 없다.

당시에는 노역이나 전쟁에 끌려 나가 죽느니 불편한 몸을 이끌고라도 살아남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폭군 양제의 학정을 짐작게 하는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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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네이버 지식백과] 수나라 (세상의 모든 지식, 2007. 6. 25.,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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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광, 즉 양제(煬帝)는 그 시호로 인해 우리에게 잊히지 않는 기억을 새겨 놓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임금의 능력이나 품성이 아무리 부족하고 폭군이었다 해도 시호에 그러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는다. 우리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중국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양제는 달랐다. ()은 지도자에게 붙이기 어려운 글자인데, 뜻만 놓고 보면 구워 말리다, 불이 활활 붙다, 녹이다와 같은 애매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황제에게 이 글자를 붙인다는 것은 그의 품성이 불같다거나 세상을 불태워 버리는 무서운 황제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가 망할 때, 또는 치세 기간에 슬픈 일을 겪거나 비명에 간 황제에게 붙여 주는 애제(哀帝)란 시호 외에는 가장 좋지 않은 시호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애제는 역사적으로 꽤 많았지만 양제(煬帝)는 유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그의 품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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