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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의 이마에 빨간 점이 생겨 버렸다

淸潭 2016. 9. 5. 15:48

김자점 부친-지네

 

인조반정 때 김자점의 아버지가 어떤 고을로 가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그런데 그 고을로 가는 사람마다 알 수 없는 일로 죽었었지만 왕명이기에 가게 되었다.

그 곳에 있는 육방거족들이 새 사또가 오는 것을 보고

똑똑하게 생겼는데 죽겠구나.’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고을에 도착한 사또(김자점 부친)는 아주 독한 담배 삼십 발을 구해다 놓고, 명주실을 많이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사또는 저녁에 그 명주실을 잡아당기면 잘 나가도록 길게 풀어 놓았다. 그리고 독한 담배를 방에다 태우고 화롯불을 켜놓고 방에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가 하도 지독하여 견딜 수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담배 연기는 악귀를 몰아낸다고 하여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담배 연기가 가득한 방에 앉아 있었다.

얼마 뒤에 쿵쿵쿵하는 소리가 났다.

 

새 사또는 역대 원님들이 새로 부임 받은 그날 저녁에 죽은 것을 알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쿵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더니 어느 순간 문이 슬그머니 열리는 것이었다. 새 사또는 연기가 하도 자욱하여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버스럭 버스럭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들어오더니 다시 후퇴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들어와 있다가 나가고, 들어와 있다가 나가는 것이었다.

 

새 사또는 점잖은 체 하며 험험험하였다. 몇 번씩 들어왔다 나가더니, “스르르 스샤샥샥하며 어딜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새자 아전육방이 문을 열어보니 새 사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살아 계시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육방거족들이 들어와서는 문안 인사를 드렸다. 사또는 그 사람들에게 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게 하니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사또는 그 지붕위로 올라가 보고는 용마루 사이에 봉긋한 것을 보고 창으로 찌르라고 하였다.

 

무사들이 달려들어 그것을 찌르자 무엇인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사또는 그것을 들고 부순 다음 기와장을 끌어당기라고 하였다. 무사들이 그렇게 하니 큰 지네가 동헌 마당에 툭 떨어졌다. 사또는 그 지네를 가져다 큰 가마솥에 넣고 찌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명을 받아 가마솥에 지네를 넣으려는데, 사또의 이마에 빨간 점이 생겨 버렸다.

사또는 그 붉은 점이 아무리 해도 닦아지지 않자 지네를 삶는 것을 일단 중지시키고 상감에게 보고를 하였다. 사또는 처음 부임할 때에 자신이 죽을지도 몰라서 식솔들을 데려오지 않았는데 죽음이 면해지자 상경해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 부인이 이마의 빨간 점을 보고 무슨 점이냐고 하였다. 사또는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고 그냥 자연히 생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인과 동침을 하자 그 점이 없어졌다. 그 뒤에 사또의 부인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는데 사또는 붉은 점이 없어지며 낳은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붉을 자자와 점이라는 점 점자를 써서 자점이라고 지었다.

사또가 자점을 낳고 보자 그 아이를 잘 가르치면 나중에 틀림없이 좋지 않을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는 명석하여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는 데서 배워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자점은 영의정까지 지내다가 결국 역적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자점 부친-지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설화 인물유형),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김자점[金自點;1588 ~ 1651]

본관 안동. 자 성지(成之). 호 낙서(洛西). 성혼(成渾)의 문인.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해바친 김질(金礩)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이다.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나아가 광해군대()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반정을 기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자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적보다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상당한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귀의 딸과 김자점의 동생이 혼인을 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김자점의 동생이 병약하여 일찍 죽는 바람에 이귀의 딸 이예순은 궁중의 무수리가 되었다. 이예순이 무수리로 있으면서 김상궁의 눈에 들자 연줄을 대었던 것이다.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급한 성격과 다혈질의 기질로 순검사(巡檢使) ·한성판윤 등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고 강직하다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1625(인조 3) 윤인발의 딸을 동궁비로 간택하려는데 역적의 자손이라 불가하다고 간언하자 삭탈관직시켜 버렸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병권에 적임자가 없어 다시 등용되었다. 정묘호란 때 왕실을 호종한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고 서북쪽을 방어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들의 비난 속에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에 처해졌으나, 1년 만에 해배(解配)되었다. 1640(인조 18) 1월 강화유수로 제수되었고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하였다.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 이후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고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부인인 강빈이 역모죄에 몰리게 되었다. 김자점은 강빈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인조의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은 급속하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사림(士林)의 세력이었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인조가 죽은 지 6일 만에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뒤에 아들 김익(金釴)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자점 [金自點]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