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의 조상은 흉노족 김일제 ?
근거 자료 1 ; 문무대왕비(文武大王碑) 내용
문무왕비는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는데,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에 1796년(정조 20) 비편 발견 사실을 처음 전하고 있으며, 耳溪 선생이 발견할 당시에도 비(碑)는 벌써 세 조각으로 동강 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후 비편의 실물들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으나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 소편(小片) 1개가 따로 일제기에 오사카 긴따로(大坂 金太郞)씨에 의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2글자뿐으로 "口基"로 판독되고 있으며, 이 비편에는 묵서로써 "四天王寺址 文武王 碑片 昭和? 六.一一"이라 하였습니다.
사천왕사지 남향 우측 귀부의 비대공(碑臺孔 귀부의 등에 비를 꼿도록 파 둔 홈)이 동부동에서 발견한 비 하단부 촉과 일치함으로서 이 비가 사천왕사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1817년과 1824년 두 차례에 걸쳐 경주를 방문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에 의해 다시 탁본되고, 추사 선생은 1817년에 이를 “再發見”이란 글로 표현한 것을 보면 耳溪 선생은 발견한 碑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 모양입니다.
그 碑는 추사에 의해선지 그렇지 않으면 어느 다른 분에 의해선지 알 수 없지만 慶州府의 바로 뒤에 위치 한 府尹 사택으로 옮겨졌던 모양입니다. 지금의 동부동 경주문화원(구 박물관이며 그 전에는 경주부 동헌) 바로 뒤 가정집에서 두 개의 비편이 모두 발견 되었으니까요.
이계 선생의 탁본인지, 추사 선생의 탁본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당시 우리나라의 탁본이 명, 청나라로 가는 사신에 의해 중국 관리들에게 선물로 주는 관행대로 文武王碑文의 탁본도 청으로 전해 졌고 이 탁본이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 : 1793~1853)의 손에 들어가 그의 저서 『海東金石苑』에 내용이 실렸습니다
이 碑文(비문)은 漢唐流(한당류)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古事成語(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일부의 파편만 발견된 상태에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新羅金氏의 내력, 太宗武烈王과 文武王의 治績, 백제 평정 사실 등이며 문무왕의 유언, 장례, 碑銘 등이 적혀 있습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의 屍身(시신)은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뒤 동해에 散骨(산골)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四天王寺(사천왕사) 근방에 擬陵(의릉· 가짜 무덤)을 만들었거나, 문무왕이 창건한 이 절에 陵碑만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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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前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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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 國新羅文武王陵之碑 及飱國學少卿臣金▨▨奉 敎撰」
2행 通三▨兵殊▨▨▨匡▨配天統物畵野經( )積德 匡時濟難應神 靈命」
3행 派鯨津氏映三山之( )東拒開梧之境南鄰▨桂之 接黃龍駕朱蒙 承白武仰」
4행 問盡善其能名實兩濟德位兼隆地跨八夤勲超三 巍蕩蕩不可得而稱者 我新」
5행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 )侯祭天之胤傳七葉以」
6행 焉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7행 大王思術深長風姿英拔量同江海威若雷霆▨地 方卷跡停烽罷候萬里澄氣克勤開」
8행 簡▨之德內平外成光大之風邇安遠肅▨功盛 於將來疊粹凝貞垂裕於後裔」
9행 ▨▨舍誨乃聖哲之奇容恩以憮人寬以御物 知其際承德者咸識其隣聲溢閒河」
10행 ▨▨▨峯而▨幹契半千而誕命居得一以 照惟幾於丹府義符性興洞精鑒」
11행 恬▨輔質情源湛湛呑納▨於襟▨ 握話言成範容止加觀學綜古」
12행 詩禮之訓姬室拜橋梓之 大唐太宗文武聖皇帝應鴻社」
13행 宮車晏駕遏密在辰以」
14행 舜海而霑有截懸堯景以燭無垠」
15행 著▨▨▨而光九列掌天府以」
16행 感通天使息其眚蘋安然利涉」
17행 ▨違鄰好頻行首鼠之謀外信」
18행 熊津道行軍大總管以 君王」
19행 列陣黃山蝟聚( )張欲申距」
20행 至賊都元惡泥首轅門佐吏」
21행 三年而已至龍朔元年」
22행 所寶惟賢爲善最樂▨仁」
23행 朝野懽娛縱以無爲▨」
24행 貺更興秦伯之基德」
25행 之風北接挹婁蜂▨」
26행 詔君王使持節」
27행 軍落於天上旌」
28행 之謀出如反手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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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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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 … 국 신라 문무왕릉의 비이다. 급찬(及飱)인 국학소경(國學少卿) 김▨▨(金▨▨)가 교(敎)를 받들어 찬하다.
<2행> … 하늘을 짝하여 사물을 잘 다스리고, 땅의 경계를 구분하며, 덕을 쌓아 …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신에 응하여 …
<3행> …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 삼산(三山)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을 우러르며 …
<4행> … 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8방(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 그 훈공은 삼(한)(三(韓))에 뛰어나, 그 높고 넓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石紐)를 보고 금여(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
<7행> … 대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채가 뛰어났고, 도량은 하해와 같았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았다. … ▨은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는 파해지니, 만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 를 열었다. …
<8행> … 간▨(簡▨)의 덕에 내외가 평화로워지고, 광대한 기풍에 원근이 편안하고 깨끗해지니, ▨공(▨功) 성▨(盛▨)은 장래에 … 하고, 쌓이고 뭉친 순수함과 곧음은 후예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주었다. …
<9행> … ▨▨사회(▨▨舍誨)는 곧 성철(聖哲)의 뛰어난 모습이라, 은혜로써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움으로써 사물을 다스리니, … 한 자는 그 시기를 알고, 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모두 그 이웃을 알아보니, 그 명성이 한하(閒河)에까지 넘쳤다. …
<10행> … ▨봉(▨峯)을 ▨하여 ▨간(▨幹)하고, 5백년을 기약하여 큰 명을 내려주니, 거하면 모두 … 함을 얻었고, … 비춤은 단부(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의(義)는 성(性)에 부합하여 일어나고, 깊은 정은 … 을 살펴 …
<11행> … 바탕을 돕고, 정(情)의 근원은 맑디맑아, 삼키어 받아들임은 금▨(襟▨)에 ▨하였다. … 하시는 말씀은 규범을 이루고, 용모와 행동은 가히 볼 만하였으며, 학문은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 …
<12행>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에 … (하고), 주나라는 교재(橋梓)의 ▨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가 사직의 ▨에 응하여 …
<13행> … 임금이 돌아가시고 풍악은 멎었다. 무진 이후에 …
<14행> … 순(舜)임금은 바다와 같이 덕을 내려도 절현(截懸)이 있었고, 요(堯)임금은 해와 같이 밝게 비추어도 은▨(垠▨)이 없었다. …
<15행> … 빛나고, 구렬(九列)은 천부(天府)를 관장하여 …
<16행> … 천사(天使)도 감통(感通)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
<17행> …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자주 이쪽 저쪽으로 붙으려 하면서, 겉으로는 …을 믿는 척하니 …
<18행> … (소정방을) 웅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군왕(君王)을 …
<19행> …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
<20행> …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들도 …
<21행> … 삼년이었다. 용삭(龍朔) 원년(元年)에 이르러 …
<22행> … 보배로 여기는 바는 오직 어진 사람이니, 선(善)을 행함을 가장 즐거워하고, 인(仁)을 ▨함을 …
<23행> … 조야(朝野)가 모두 즐거워하니, 굳이 애써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
<24행> …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 …
<25행> … 교화가 북으로 읍루(挹婁)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26행> … 군왕에게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 으로 봉하였다. …
<27행> … 군(軍)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깃발이 …
<28행> … 꾀는 손을 뒤집는 일처럼 쉽게 나왔는데, 절묘하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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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面 )
1행 丸山有紀功之將以」
2행 直九合一匡東征西」
3행 ▨宮前寢時年五十六」
4행 牧哥其上狐ꟙ穴其傍」
5행 燒葬卽以其月十日火」
6행 妣 天皇大帝」
7행 王禮也 君王局量」
8행 國之方勤恤同於八政」
9행 實歸乃百代之賢王寔千」
10행 淸徽如士不假三言識駿」
11행 而開沼髣髴濠梁延錦石以」
12행 之( )聆嘉聲而霧集爲是朝多」
13행 卽入昴忘歸射熊莫返太子雞」
14행 丹靑洽於麟閣竹帛毀於芸臺」
15행 餘下拜之碣迺爲銘曰」
16행 侍星精 域千枝延照三山表色盛德遙傳」
17행 道德( )棲梧 允武允文多才多藝憂入呑蛭尊」
18행 九伐親命三軍 ▨威恩赫奕茫茫沮穢聿來充役蠢」
19행 欽風丹甑屢出黃▨鎭空 雄赤烏呈灾黃熊表崇俄隨風燭忽」
20행 命凝眞貴道賤身欽味釋典葬以積薪 滅粉骨鯨津嗣王允恭因心孝友冈」
21행 鴻名與天長兮地久」
22행 卄五日景辰建碑 大舍臣 韓訥儒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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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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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 … 환산(丸山)에 공(功)을 기(紀)한 장수가 있어 …
<2행> … 곧바로9주를 일광(一匡)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
<3행> …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
<4행> … 땔나무군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
<5행> … 화장(火葬)을 하라 하니, 그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6행> … 천황대제(天皇大帝)께서 …
<7행> … 왕례(王禮)에 맞았다. 군왕(君王)은 국량(局量)이 …
<8행> … 나라를 … 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8정(八政)의 ▨과 같았다. …
<9행> …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百代)의 현왕(賢王)이시요, 실로 천(千)(古의 성스러운 임금이셨다.) …
<10행> … 맑고 아름답기 선비 같으시고, 삼언(三言)을 빌지 않아도 준▨(駿▨)을 알았다. …
<11행> … 못을 여니 호량(濠梁)을 방불하였고, 비단과 돌을 펼쳐 …
<12행> …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들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
<13행> … 묘(昴)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웅(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태자 계(雞) …
<14행> … 단청(丹靑)은 기린각(麒麟閣)에 흡족하고, 서책은 운대(芸臺)에서 닳고 헤어졌다.
<15행> … 삼가 절을 드리고, 이만 그치며 명(銘)을 쓴다.
<16행> … 천 갈래의 가지가 되어, 삼산에까지 뻗어 비치네. 아름답고 성한 덕은 멀리 …에 전해져 …
<17행> … 진실로 무용(武勇)하시고 진실로 대덕(大德) 있으시고, 다재다예(多才多藝) 하였네.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거머리마저 삼키시고, …
<18행> … 아홉 번 정벌하고, 친히 삼군을 통솔하시어 … 위엄과 은혜는 혁혁히 빛나, 저 아득히 먼 옥저(沃沮)와 예(濊)까지 찾아와 역(役)을 청하였네. 잠동하던 …
<19행> … 풍교를 흠모하여, 단증(丹甑)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20행>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21행> …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
<22행> … 25일에 대사(大舍) 신(臣) 한눌유가 임금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쓰다.
- 『譯註 ;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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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秺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磾)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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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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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霍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서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漢書』金日磾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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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秺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 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秺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秺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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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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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磾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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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장)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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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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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秺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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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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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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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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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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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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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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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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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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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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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열도 쥬신(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쥬신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쥬신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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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 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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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은 쥬신의 선민족인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의『삼국지』에 나오는 쥬신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 쥬신의 활동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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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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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 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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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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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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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를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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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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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뫼의 불로그 중 『1328년전 문무왕 비석조각, 200년 만에 공개』, 『문무왕 비문의 미스터리 - 나는 흉노왕 후손』에서 일부 발췌 편집
근거 자료 2 ; 대당고김씨부인묘명 (大唐故金氏夫人墓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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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唐故金氏夫人墓銘 원문 전문
前知桂陽監將仕郞侍御史內供奉李璆夫人京兆金氏墓誌銘幷序
鄕貢進士崔希古撰 翰林待詔承奉郞守建州長史董咸書篆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
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衆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
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
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及漢不見
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文宣王立言言
忠信行篤敬雖之蠻貌其道亦行今復昌熾吾宗於遼東 夫人曾祖
諱原得皇贈工部尙書祖諱忠義皇翰林待詔檢校左散騎常侍少府
監內中尙使 父諱公亮皇翰林待詔將作監承充內作判官祖父文
武餘刃究平子觀象規模運公輸如神機技乃貢藝 金門共事六朝
有祿有位善始令終先夫人隴西李氏搢紳厚族夫人卽 判官次女
柔順利貞稟受自然女工婦道服勤求舊及歸李氏中外戚眷咸號賢
婦夫人無嗣撫訓前夫人男三人過人己子將期積善豊報豈謂天命
有筭脩短定分綿遘疾瘵巫扁不攻咸通五年五月貳拾玖日終于嶺
表享年卅三端公追昔平生尙存同體經山河視若平川不避艱儉堅
心臨 柩遂歸世域嗣子敬玄次子敬謨次子敬元並哀毁形容遠侍
靈櫬追號网極敬玄等支殘扶喘謹備禮文以咸通五年十二月七日
遷神于萬年縣滻川鄕上傅村歸世塋域夫人 親叔翰林待詔前昭
王傅 親兄守石淸道率府兵曹參軍聯仕 金門丞家嗣業希古與
夫人兄世舊追惻有作因以請銘 銘曰 天地不仁 先死陶鈞
孰是孰非 無踈無親 不饗積行 不永大命 豈伊令淑 亦罹
賢聖 遘此短辰 遊岱絶秦 大道已矣 萬化同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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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의 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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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1954년에 중국 섬서성 西安市 동쪽 교외에서 출토된 것으로, 재당 신라인 金公亮의 딸 김씨부인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이다.
이 묘지석은 지석과 개석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모두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 지석은 가로 46.5cm 세로 45.5cm 크기의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誌文이 새겨진 아래쪽 네 면에는 12생초도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개석은 밑면이 가로 43.5cm 세로 44cm 크기로, 위쪽에 정사각형으로 다듬어 전서로 3행에 걸쳐 “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란 글을 새겼고, 아래쪽으로는 비스듬히 깎아내려 네 면에 사신도를 그려 넣었다. 이 묘지석은 현재 서안 碑林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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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서안시 三學街에 자리 잡고 있는 비림박물관은 당 멸망 후 각지에 방치, 훼손되고 있던 당대 금석문을 보호하기 위해 북송 元祐 2년(1087)에 <開成石經>과 <石台孝經>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보존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금 ․ 원 ․ 명 ․ 청대를 거치면서 서안 일대의 비석과 묘지석을 비롯한 각종 석각자료를 꾸준히 수집함으로써 유물의 양이 크게 증가하고 건물의 규모도 확대되었다.
비림박물관은 孔廟, 비림, 석각예술실 등의 3구역으로 구성되었는데, 현재 국보급 문물 19종 134건을 비롯한 1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단연 중심이 되는 유물은 금석문 자료이다. 현재 비림박물관에는 碑石 556종 1401점, 墓誌石 1153종 1654점, 造像石 70점, 經幢 63점 등의 금석문이 소장되어 있다. <大唐故金氏夫人墓銘>은 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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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唐故金氏夫人墓銘>은 총 23행에 각 행당 최대 27자씩 새길 수 있는 공간의 크기로, 거기에는 예서체의 글씨로 된 총 593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그 첫머리에는 “前知桂陽監將仕郞侍御史內供奉李璆夫人京兆金氏墓誌銘幷序”라 한 다음 鄕貢進士 崔希古가 짓고 翰林待詔承奉郞 守建州長史 董咸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어서 김씨 성의 유래, 김씨부인의 선조, 부인의 품행과 생활상, 죽음과 후사, 명문을 순서대로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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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墓誌銘은 글자의 대부분을 육안으로 쉽게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서두에 수록한 자료가 바로 <<서안비림전집>>에 실린 탁본이거니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탁본 상태가 양호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최선본으로 판단되는 <<서안비림전집>>의 탁본에 의거하여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을 아래와 같이 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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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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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냈으니, 이름하여 少昊氏金天이라 한다. 이는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갖게 된 世祖이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져 번창하고 빛나 온 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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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조상의 이름은 日磾인데 흉노의 조정[龍庭]에 몸담고 있다가 西漢에 귀순하여 무제 아래에서 벼슬하였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겼으므로 그를 발탁하여 侍中과 常侍에 임명하고 秺亭侯에 봉하였다. 투정후에 봉해진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京兆郡에 기대어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것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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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나라가 德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文宣王께서 말하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道를 역시 행하였는데,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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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증조 할아버지 이름은 原得으로 황실로부터 工部尙書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忠義로 翰林待詔 檢校左散騎常侍 少府監 內中尙使의 벼슬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公亮인데 翰林待詔 將作監丞 充內作判官을 역임하였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平子를 궁구하여 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였고, 公輸子를 궁리하여 神과 같은 기술을 갖추었다. 이에 기예로 천거를 받아 金門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작위를 가지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가 아름답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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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인은 隴西 李氏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딸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것이다. 이씨 집안에 시집을 감에 이르러 中外의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했는데, 자기 자식보다도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天命을 일일이 헤아려 그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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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扁鵲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咸通 5년(864) 5월 29일에 嶺表에서 죽으니 향년 33세이다. 端公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靈柩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敬玄과 次子 敬謨 그리고 다음 아들 敬元은 모두 슬퍼하여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었고, 멀리서 靈櫬을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은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년 12월 7일에 영구를 萬年縣 滻川鄕 上傅村으로 옮겨 대대의 先塋 묘역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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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昭王傅를 지냈고 친형은 守右淸道率府兵曹參軍인데,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여 가문의 업을 이었다. 崔希古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銘文을 청하므로 이에 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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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陶鈞에 앞서 죽으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疎遠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을 누리지 못하고 大命을 길이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그 얼마나 아름답고 착했으며 또한 성스럽고 어질었도다.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秦嶺을 건너다녔네. 大道가 이미 끝났으니 우주만물의 변화를 쫓아 티끌같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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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시조관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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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사서와 신라 금석문에, 신라 왕족이 김씨를 칭하게 된 유래에 관하여 두 가지의 전승을 전한다. 하나는 閼智가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했다는 전승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상고시대 전설상의 인물인 少昊金天氏의 후예였기 때문에 金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라 왕실의 시조관념이랄까 출자의식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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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에 종전 연구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신라 왕족 김씨의 연원을 소호 금천씨로 인식하는 이른바 ‘소호금천씨 출자설’을 심도있게 다룬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태종 무열왕이 중대 왕실을 개창함과 더불어 자신의 왕실이 기존의 왕실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래의 ‘알지 출자설’을 부정하고 새로운 소호금천씨 출자설을 만들었으나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퇴조했다가 9세기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는 경문왕가가 기존의 왕실 내지 여타 김씨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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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금천씨를 신라 왕실의 시조로 인식한 관념이 7세기 후반과 9세기 후반에 무열왕과 경문왕의 정치적 의도로 말미암아 계기적으로 浮沈했다는 이 연구는 상당히 흥미롭다. 그런데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그러한 연구와 다소 배치되는 듯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하였듯이, 이 묘지명의 앞부분에 “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냈으니, 이름하여 少昊氏金天이라 한다. 이는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갖게 된 世祖이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누어져 번창하고 빛나 온 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라 하여, 이 묘지명이 작성된 함통 5년(864)에 김씨부인의 시조를 소호금천씨로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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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통 5년은 신라 경문왕 4년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만 보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내용은 경문왕대에 소호금천씨 출자설이 재등장했다는 종전의 연구결과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김씨부인 집안의 성씨가 소호금천씨에서 유래했다는 의식이 경문왕대에 해당하는 함통 5년경에 비로소 형성되었을까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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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지명은 崔希古가 김씨부인의 親兄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것이므로, 그 내용은 대부분 김씨부인의 친형으로부터 서면 혹은 구두로 전달받은 정보를 기초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守右淸道率府兵曹參軍의 관직을 가지고 있던 김씨부인의 친형은 재당 신라인 4세대로서, 이른바 신라계 당인이었다. 신라를 떠나 당에서 생활한지 4대째 되는 그가 경문왕대에 신라에서 김씨 출자의식을 변경한 사실을 알고 곧바로 그것을 수용했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무리이다. 그렇다고 하여 김씨부인 가문에서 그러한 시조관념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김씨부인의 친형은 입당 1세대라 할 수 있는 증조부 김원득를 거쳐 가문에 전승되던 소호금천씨 출자설을 할아버지 김충의 혹은 아버지 김공량으로부터 전해 듣고, 그것을 친구인 최희고에게 알려주며 누이의 묘지명 찬술을 부탁했을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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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득이 언제 신라를 떠나 당으로 이주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김씨부인의 증조부라는 점에서 대략 100년 전인 8세기 후반에 당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8세기후반은 신라 경덕왕과 혜공왕의 치세이다. 따라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나오는 소호금천씨 출자 관념은 경덕왕 혹은 혜공왕대 신라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라 왕족 김씨의 소호금천씨 출자설이 중대 초와 경문왕대에 계기적 출현했다는 학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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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유래와 관련하여 이 자료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金日磾에 관한 문제이다. 지난해 한국방송(KBS) 제1TV에서 "역사추적, 문무왕비문의 비밀"이란 제목의 프로그램을 2부작으로 방영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문무왕릉비문에 나오는 “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라는 구절을 단초로 삼아, 신라 왕실이 혈연적으로 흉노족인 김일제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여기서 새삼 방송의 내용을 문제 삼아 시비를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김일제의 후손이 실제 신라의 김씨와 관련된 것처럼 인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그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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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있듯이, 일제는 흉노 休屠王의 태자였으나 한 무제의 침략을 받게 되자 한 왕실에 투항하여 시중과 부마도위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무제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휴도왕이 흉노에 있을 때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기 때문에 무제는 일제에게 金氏 성을 하사하였다. 그 후 일제의 후손 역시 漢 왕실에 충실히 복무하였으므로, 후대인들은 일제를 오랑캐 출신이면서도 중원의 왕조에 투항해 성실히 협조한 인물의 전형으로 추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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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성이 ‘金’이고 또 중국 왕조에 충실히 복무한 이민족이었다는 두 가지 이유로 신라 왕실 역시 일제를 자신들의 선조로 인식하려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관념은 신문왕 초에 만들어진 <文武王陵碑文>에 나타난다. 문무왕릉비는 일찍이 파손되어 비문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런데 비문의 전반부에 ‘秺侯 곧 秺亭侯 김일제의 후손이 7대를 이어 내려와’ 운운한 후 문무왕의 15대조 星漢王의 출현을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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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비는 신라 왕족 김씨의 연원을 김일제에서 찾으려는 유일한 자료인데, 거기에서는 김일제에 관한 사실이 너무 간략하여 실제 조상 성한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 김일제와 신라 왕성 김씨와의 관계를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즉 김씨부인의 먼 조상은 日磾인데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에 귀순하여 무제 아래에서 벼슬하여 侍中과 常侍에 임명되고 秺亭侯에 봉해졌으며, 7대에 걸쳐 한나라 조정에서 벼슬함으로써 京兆郡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한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멀리 遼東에 피난하여 숨어살게 되면서 요동에서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이어서 김씨부인의 증조부 이하 가계를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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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지명에 따르면, 결국 요동지방으로 피난해 번성해진 김일제의 후손 중의 한 부류가 바로 김씨부인의 선조였다는 말이 된다. 일반적으로 당대의 遼東은 옛 고구려 땅을 지칭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 김씨부인묘지명에서 말하는 요동도 같은 의미였을 터인데, 김씨부인 가문은 원래 신라에 살았다. 그렇다면 요동에 정착한 김일제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신라에까지 남하하여 김씨 성을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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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금천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신라 왕실이 김일제를 자신의 선조로 받들었던 것은 다분히 관념적인 시조의식의 소산이다. 따라서 김일제 후손의 요동 이주와 신라로의 남하 문제 등을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이 묘지명은 문무왕릉비에서 少昊金天氏-金日磾-신라 왕족 김씨로 이어지는 시조관념의 패턴을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자료라 여겨진다. 어쨌든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중대 이후에 형성된 신라 왕실의 시조관념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당으로 이주한 후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시조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던 재당 신라인의 사고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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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이 묘지명에는 김일제의 후손이 언제쯤, 그리고 어떤 이유로 신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도 개략적이나마 언급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김일제에게서 7대가 내려와 중국이 전란으로 시끄러워지자, 그 후손들이 '요동'으로 피난해 거기에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통 요동이라면 고구려 영역이자 지금의 만주 일대를 말하지만, 묘지명의 문맥으로 보건대 신라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아가 그 시기는 묘지명에 정확한 언급이 없지만, 한서 김일제 열전에는 그의 7대 후손에 와서 왕망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이로써 본다면, 묘지명이 말하는 김일제 후손의 신라 도래 시기는 전한 말기, 혹은 왕망의 시대가 된다. 기원전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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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신라김씨가 정말 김일제 후손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들이 적어도 문무왕 시대 이후에는 한동안 소호금천씨와 김일제로 이어지는 뿌리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만은 더욱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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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의 『한국고대사학회 108회 정기총회에서의 발표(2009.5.9) 자료』 일부 발췌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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