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올해 예순여섯인 K씨가 소주잔을 기울이다 뱉은 말이다. 그의 집은 행세깨나 하는 가문이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가세가 좀 기울긴 했지만 여전히 지방 명문가였다. K씨는 서울로 유학 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다니던 중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그것도 중매로. 스물넷의 아내는 학업을 마치고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내의 부모님은 좋은 혼처자리가 났다며 떼밀듯이 딸을 결혼시켰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K씨는 서울 하숙집으로 복귀하고 아내는 시댁이 있는 시골로 내려갔다. 가문의 위세에 눌려 감히 내려간다 못 간다 말할 엄두도 못 낸 채. 그때까지 단 하루도 같이 살아본 적이 없던 여덟 식구(시부모와 시누이 다섯, 시동생 하나)를 건사하는 고단한 삶이 시작됐다. 아내는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엄격한 시집살이를 강요당했다. 농사일과 길쌈은 물론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다. 덩그러니 큰 집은 밤이 되면 괴괴하고 무서웠다. 어둠과 적막 속에 홀로 앉은 그녀는 네온사인 환한 서울의 밤거리를 그리워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오던 남편은 고도성장기 조국의 수출역군이 되어 나중엔 한 달에 한 번 오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내는 대소변을 받아 내며 3년을 병구완했다. 법도대로 3년 상을 치르고 나자 이번엔 시어머니가 자리보전을 했다. 또다시 3년을 수발했다. 그녀의 청춘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시어머니 상까지 치르고 부부가 합류했을 때는 여자 나이 서른다섯을 지나고 있었다. “꽃다운 청춘은 흔적도 없고 영락없는 시골 아낙 하나가 낯설어진 서울의 어느 모퉁이를 서성이고 있더라”고 아내가 자신을 묘사했을 때 K씨도 함께 울었노라고 했다. “가문의 법도가 다 뭔가? 우리는 쓸데없는 이데올로기(유교)에 청춘과 시간 그리고 부부의 사랑까지 제물로 갖다 바쳤네.” 그 긴 세월 낯선 땅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산 그의 아내가 몇 년 전 쓰러졌다. 붉디붉은 청춘을 고옥(古屋)에 갇혀 삭혀버린 그녀. 아이들 시집 장가 보낸 뒤로는 인생이 허망하다며 숱한 날밤을 괴로워했다. 그러다 젊은 시절 못 했던 걸 하겠다며 문학강좌를 나간다, 꽃꽂이를 배운다, 동창들과 해외여행을 간다, 조금은 인생을 즐기나 싶었는데 저리되고 만 것이다. 그 아내를 남편은 지금 지극정성으로 병구완하고 있다. 은퇴 후 조그마한 자영업을 하는 그는 하루 서너 번씩 어김없이 아내의 병실을 찾는다. 갈 때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이야깃거리를 준비한다. 옛날 사진도 가져가고 주고받은 편지도 가져가 읽어준다. 하염없이 흐르는 아내의 눈물에 K씨의 가슴도 녹아내린다. “자식들 출가했으니 이제 맘껏 여행도 다니고 재미있게 살아보자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그의 말에 미안함과 애틋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요즘 그는 친구들과의 왁자한 모임을 자제한다. 진짜로 인생을 즐겨야 할 아내가 저러고 있는데 혼자 웃고 떠드는 건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걸 아내에 대한 의리라고 그는 말했다. 아내에 대한 ‘의리’라…. 말은 맞는지 몰라도 어쩐지 씁쓸하다. 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두 사람은 피 끓던 시절 알콩달콩 사랑을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어쩌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원초적 사랑이 아예 저축되어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남녀는 처음엔 사랑으로 산다. 사랑이 식으면 정으로 산다. 운우(雲雨)가 고갈돼 고목처럼 무덤덤해지면 그땐 의리로 산다. 가문과 부모에게 청춘을 바친 아내에 대한 의리일지언정 부부에겐 의리보다 사랑이 낫다. 그 말을 듣는 나의 가슴도 아프고 시렸다. 주간국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68호(07.30~08.05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상업적 등)] ▒☞[출처] 매일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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