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상 초상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인 이인상은 조선의 4대 명문가에 속하는 백강 이경여 가문의 후손으로 담백하고 격조있는 문인화를 그린 인물입니다. 서얼출신이면서도 사대부 벗들에게 지조와 절개있는 청렴한 선비로 존경받았습니다. 벗들과 함께 모임을 열고 경치 좋은 곳들을 유람하며, 평생 놓지 않았던 글씨와 그림은 수준 높은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山家圖(산속의 집) 현재까지 알려진 이인상 그림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아직 무르익은 화풍이 보이지 않는 화보풍의 작은 소품이다.
松溪樓亭圖(소나무 엽 계곡과 정자) 커다란 소나무 다섯 그루가 바위 위에 우람하게 서있고, 정자 안에는 선비가 한 명 앉아 있다. 계곡을 따라 물이 흐르고, 소나무가 너럭바위 위에 서 있는 경치는 매우 운치있다.
江南春意圖(강남지방의 봄) 위암 이최중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강남춘은 조선시대 문학과 그림의 단골 소재였다. 그림의 중심은 중간 쯤에 그려진 물가에 세워진 정자이다. 그 안에 두 사람이 정답게 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듯하다.
江峽船遊圖(협곡을 따라 가는 뱃놀이) 취설 유후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구불구불한 필선으로 그렸다. 절벽과 협곡, 우람한 여러 그루의 나무들 사이로 주인공 2명은 배를 타고 선유 중이다. 배에는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책이 두 권 있으며, 노를 젓는 시동이 함께 타고 있다.
劍仙圖(칼을 든 신선) 취설 유휴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이 그림은 교차하는 두 그루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바람에 날리는 수염에 파란색 유건을 쓴 도인의 형상을 한 인물을 그렸다. 칼은 오른쪽 아래에 손잡이 부분만 살짝 보인다. 이 인물은 일반적으로 검선으로 불린 중국 당나라때 여동빈으로 보고 있는데, 그림을 그린 이인상과 그림을 받은 취설 유후가 모두 서얼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서얼으로서 자으식이 반영된 자화상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無人有雲圖(사람 없는 곳에 구름이 있고) 윤곽선을 위주로 하여 각진 바위와 산의 형태를 그렸다.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한 풍경이다. 이인상은 그림에 있어서 근육과 뼈대의 기세를 중시하였고, 외형적인 것은 중요하게 생갹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적절하게 맞는 그림이다.
"사람 없는 곳에 구름이 있고, 구름 없는 곳에 사람이 있네 바람 잦아드니 물 맑고 뭇 봉우리가 첩첩이며, 무지개 사라지고 달은 반쯤 이지러졌는데 방안에 들어 앉아 정신을 기르네, 회도인의 시의를 재미삼아 그리다"
樹石圖(나무와 바위) 추위에 놓인 나무의 모습에서 빼어남을 찾아내고, 무늬가 있어 멋있는 바위의 모습에서 거침을 보았다. 추위에 놓인 모습과 빼어남, 무늬가 있는 멋스러움과 거침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이인사은 그 속에서 서로 공존하는 천연의 경지를 보고 있다. 이 그림의 묘미는 들여다볼수록 점점 드러나는 바위의 윤곽이다. 물기가 많은 엷은 바림으로 그려진 바위는 마치 그림차처럼 보일듯 말듯 하다.
일막장강도(저물녘 긴 강) 넓은 강을 사이에 둔 구도에 갈필로 그렸다. 전경에 배를 탄 인물이 있고 강 건너에 건물이 보인다. 전경에는 X자로 교차하는 나무가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위와 나무 등은 끊어질듯 이어지는 갈필의 선묘로 윤곽을 잡고 옅은 먹으로 선염을 가하였다.
한유시의도(한유 시를 그림) 중국 당나라때 시인 한유의 시의 뜻을 담은 시의도다. 이인상이 사촌형 이준상에게 그려준 것으로 ㄱ자 모양의 기와지붕 정자와 나지막한 초가지붕 건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산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평평한 곳에 그림의 중심이 위치하고 있다. 기와 지붕 정자 안에는 2명의 사람이 앉아 있다.
漁樵問答圖(어부와 나무꾼의 대화) 어부와 나무꾼이 서로 묻고 대답하는 내용인 어초문답은 그림의 전통적인 소재이다. 소식의 '어초한화록' 등 중국의 고전에 근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은거를 꿈꾸는 사대부들의 지향점을 내포한다. 일반적으로는 어부와 나무꾼이 일을 마치고 걸어서 귀가하는 장면을 그리는데, 이인상은 물기가 많은 습윤한 먹으로 강변을 배경으로 하여 배를 탄 어부와 나무꾼이 마주 앉아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松下觀瀑圖(소나무 아래에서 폭포 감상) 바위 위에 소나무가 화면을 가로지른 과감한 구도이다. 폭포 아래에서 시원한 폭포 소리를 듣고 있는 인물과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으로 구성되었다. 끊어질 듯 똑똑 끊긴 윤곽선과 담담한 선염으로 묘사된 바위, 그리고 누워있는 소나무는 이인상의 대표작품으로서의 위상을 말해준다. <설송도> ( 117*53 종이에 먹 ) <사진출처 : 장길산(김제)님>
1710(숙종 36)~1760(영조 36).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고조부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경여(敬輿)이나 증조부 민계(敏啓)가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 없었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음보(蔭補)로 한양의 북부참봉(北部參奉)을 지낸 후에는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와 경상도 사근역(沙斤驛) 찰방(察訪)을 거쳐 1750년 음죽현감이 되었다. 1752년 관찰사와의 불화로 현감직을 사퇴한 후 음죽현 설성(雪城)에 종강모루(鍾崗茅樓)를 짓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가정 형편이 궁핍하고 몸은 병약했으나 성격이 고결하고 강직했으며,
노론의 입장에서 숭명배청사상(崇明排淸思想)을 끝까지 고수했다. 당대의 많은 명유(名儒)들과 교유했으며, 그중에서 이윤영(李胤永)·송문흠(宋文欽)·김무택(金茂澤) 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널리 추앙받았으며, 그림 이외에도 전서(篆書)와 전각(篆刻)을 잘했다. 20대 초기에는 남종화법에 의거한 화보(畵譜)나 조영석(趙榮祏) 등의 화풍을 주로 따랐고, 30대 중기에는 금강산 등지의 진경산수(眞景山水)와 문인들의 아취가 넘치는 청유(淸遊) 또는 시회(詩會)의 장면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40대 후기에는 은일자(隱逸者)의 심회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었다. 메마른 갈필선(渴筆線)과 차갑고 깔끔한 담채와 선염(渲染)이 자아내는 문기(文氣) 어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이윤영과 윤제홍(尹濟弘) 등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 문인화의 일맥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60여 점의 유작이 전하는데 대표작으로 〈수하한담도 樹下閑談圖〉(개인 소장)·〈송하관폭도 松下觀瀑圖〉(국립중앙박물관)· 〈설송도 雪松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있다. 문집으로 〈능호집〉 2권이 전한다.
* 서예세상 명작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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