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11. 5. 목요일 >
금천교(錦川橋)는 길이 12.9m, 너비 12.5m로 1411년에 조성되어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진선문(進善門)-외행각 주출입문으로 태종대와 영조대에 신문고(申聞鼓) 혹은 등문고(登聞鼓)가 있었다고 전한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는 내병조, 호위청, 상서원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인정문 뜰과 조정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의식이 많이 치러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숙장문(肅章門)-선정전 및 내전지역(內殿地域)에 이르는 출입문
진선문과 인정문 사이의 정청(政廳)은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궐내각사로 행각에 편액만 걸린 채 열린 공간으로 복원되었다.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행각-원래 이곳은 여러 관청들이 자리하고 있던 닫힌 공간이었다.
호위청(扈衛廳)-인조 1년(1623) 궁궐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한 군대로 공신이나 척신 혹은 국구(國舅-왕의 장인)가 대장을 맡았다.
인정문(仁政門 보물 제813호)-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자 남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구성 되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인정전 조정(朝政)-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御道)와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품계석(品階石)
앞 쪽의 넓적한 '드므'는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고 뒤에 있는'부간주'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궁중제사 때 사용하는 축문을 쓰고 향을 관리 하던 향실(香室)
인정전에서 선정전으로 통하는 문
정면의 선정전에서 왼쪽 문을 통과하면 인정전이고,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희정당이다.
선정전 주위 마당 남·서쪽으로는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선정전 정면 중앙칸 앞에서 남쪽으로 정문인 선정문까지는 사방이 트인 천랑(穿廊)으로 연결되어 있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희정당 현관 앞에서 본 선정전과 인정전. 선정전은 순조 때에 이르러 그 옆의 희정당(熙政堂)이 편전으로 사용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창덕궁 희정당은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희정당은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한국 건축에 없던 밖으로 돌출한 현관이 부가되는 등 많이 바뀌었다.
현관은 순종의 자동차 진입을 위해 첨부한 서양식 시설이다.
희정당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인데, 정면 9칸, 측면 3칸 주위로 툇칸을 설치하여 통로로 사용토록 하였다.
이 건물은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접객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놓았다.
희정당 통로로 사용되는 툇칸
희정당과 대조전을 연결하는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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