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사람은 어디서나 집착을 버리고
쾌락을 찾아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만나거나 괴로움을 만나거나
지혜로운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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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김장경 원심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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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수행자들이 여름 우기 동안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수행을 하는 안거(安居)제도가 있었다. 지금도 한국은 선원(禪院)에서 여름과 겨울의 3개월간 산문(山門)을 나오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결제와 해제 기간이 바로 이 안거에 해당된다. 부처님 제자들이 여름 3개월간 안거를 하도록 정해진 이유는 여름 우기동안에 번식이 왕성한 곤충이나 풀벌레까지도 비구들의 오고가는 발걸음에 밟혀서 죽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안거가 시행되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1천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시고 한곳에서 여름 안거를 하시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초기 승가는 일정한 주처(住處) 없이 주로 나무 밑이나 숲 속, 동굴, 묘지 등에 머물면서 무소유(無所有)의 생활로 수행하는 것이 기본 이었다. 승가의 모든 구성원은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 최고의 미덕을 삼았다. 먹는 것은 항상 걸식(乞食)에 의해서 그날 얻어진 음식으로 만족하였고, 거처하는 곳은 비바람을 겨우 피할 수 있는 나무 밑(樹下座)에 머물렀다. 몸에 걸친 가사는 길거리에서 주은 헌 헝겊누더기(糞掃衣)였고, 몸이 불편할 때 먹는 약 또한 소의 배설물을 발효시킨 진기약(陳棄藥)을 복용하는 정도의 검소한 삶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오늘날 물질의 풍요로움에 익숙해진 우리들 자신이 3천년 전의 부처님의 승가처럼 무소유에 근접한 최소한의 삶으로 되돌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세계는 부처님 당시처럼 질박한 삶을 지향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물질의 풍요로 잃어버렸던 많은 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삶이 최고의 미덕
부처님은 어느 여름 안거에 5백 명의 비구와 함께 한 브라흐만의 요청을 받고서 네란쟈 지방에 안거지를 결정하셨다. 그러나 마침 그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브라흐만은 부처님 승가를 보살피지 못했다. 음식을 얻는 것이 어렵게 되어 심지어는 말에게 먹이려던 곡식의 쭉정이로 한때의 끼니를 채우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제자들은 본래 현상적인 물질에 대해서는 초탈한 마음으로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이나 동요됨이 없이 여름 안거를 잘 마칠 수 있었다. 희로애락의 근원을 간파한 수행자들에게는 외적인 어떠한 불행에도 동요됨이 없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이미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생스러웠던 여름 안거가 끝나고 부처님은 브라흐만과 작별을 고하고 고향과 같은 기원정사에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왓티의 주민들은 부처님이 돌아오신 것을 환영하여 맛있는 음식과 좋은 생활품을 구비하여 공양을 올렸다. 부처님 제자 비구들은 풍요로운 물질을 대하고서도 조금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지난여름 말먹이의 음식을 먹을 때나 지금 눈앞에 산처럼 가득한 맛있는 음식을 대하고서도 수행자는 절대 평정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구들을 도우기 위하여 함께 안거에 임했던 일반인들은 궁색한 생활 끝에 찾아온 음식의 풍요를 대하고서는 밤을 새워서 먹고 마시며 기쁨에 빠져 열광하였다.
이처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말씀하셨다. ‘현명한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 처해서도 자신을 잘 가다듬어서 쾌락을 찾아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즐거움을 만나거나 괴로움을 만나거나 지혜로운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칭찬의 말씀을 시로서 읊으신 것이다.
이러한 동요되지 않는 마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중아함경』에는 「소공경」과「대공경」이 있다. 초기경전의 아주 소박한 형태의 공(空)에 대한 관찰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공에 대한 마음가짐으로서 공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현재 함께 앉아 있는 이 녹자모 강당을 살펴보라고 하신다. 부처님과 아난존자가 앉아 있는 강당 안이 텅 비어서 코끼리·말·소·염소·재물·곡식·일을 도우는 사람들까지도 아무것도 없다. 이 것은 바로 공한 모습이다. 그런데 공 아닌 것이 있으니 오직 수행하는 모습으로 몰두해 있는 비구들은 있다. 그러므로 녹자모 강당 안에 이 모든 것이 없다면 그것을 바로 ‘공’이라 볼 것이고, 수행하는 비구가 있다면 그것은 있는 것으로 관찰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공의 실천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보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절대 평정의 마음을 간직하는 일이라고 가르치신다.
동요되지 않는 마음의 힘 길러야
이처럼 초기 경전에서의 진리의 가르침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없는 것은 없다고 보는 공의 진리로서 깨닫고, 있는 것은 있다고 보는 진리로서 받아들이면 이미 있고 없는 현상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참다운 공의 현상을 체득하면 고락(苦樂)에 동요됨이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948호 [2008-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