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천불만다라] 16. 인욕바라밀의 힘

淸潭 2008. 6. 23. 15:41
[천불만다라] 16. 인욕바라밀의 힘
‘참을 만한 세계’서 감정의 노예로 살 것인가
기사등록일 [2008년 04월 28일 월요일]
 

큰 바위가 그 어떤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비난에도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 『법구경』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김장경 원심회 회장

거해 스님이 풀어 쓴 『법구경』에 의하면 이 81번 게송은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정사에 계실 때, 밧디야 비구와 관련하여 읊으신 게송이라고 한다. 밧디야 비구는 키가 몹시 작아서 락꾼다까(난쟁이) 밧디야 비구라고 불렸다. 그러나 밧디야는 난쟁이 비구라고 놀림을 당하여도 천성이 온화하여 남에게 화를 내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내면세계가 충만하여 외적인 모습에 대해서 고민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밧디야 비구는 성냄과 불쾌함과 고민 따위를 모두 없애버린 경지에 머무는 참다운 수행자였다.

부처님 당시 제자들이 수행에 의하여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과였다. 아라한에 도달한 수행자는 이미 자신의 감정에서 벗어나 희로애락에 얽매이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사람들의 감당하기 어려운 가혹한 행위에도 참고 견디는 인욕바라밀을 완성한 성자이며, 내면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절대 평정의 경지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나 참고 견뎌야만 살아갈 수 있어서 부처님은 사바세계(Sabha-loka), 곧 참고 견디는 감인(堪忍)의 세계라고 이름을 붙이셨다. 이 감인의 세계는 참으로 많은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수행덕목인 육바라밀 중에 인욕바라밀이 있다고 생각된다. 참고 견뎌서 참고 견딘다는 생각까지 놓아 버린 상태가 바로 인욕바라밀을 완성한 경지일 것이다. 『금강경』의 인욕선인(忍辱仙人)이 포악한 왕에게 시험을 당할 때 사지를 끊어내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괴로움이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욕선인이며 참고 견디는 바라밀을 완성한 성자인 것이다. 그러나 참고 견디는 일을 억지로 하면 사람은 병들고 만다. 억지로 참을 수도 없거니와 결국은 사람이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원망없는 마음으로 아라한과 성취

그렇다면 불교에서의 참고 견디는 수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욕선인이 참고 견딘 경지는 자기 스스로는 ‘오온(五蘊)이 다 공(空)하여 이 몸이 한줌의 먼지라고 철두철미 깨달아 진리에 합일된 상태’일 것이며, 밖으로는 ‘다함없는 자비심으로 어리석은 폭군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는 성자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억지로 참는 범인(凡人)의 경지와는 다를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인욕선인과 같은 수준의 참고 견디기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팔풍(八風)에 동요되지 않도록 자신을 갈무리하라고 부처님은 타이르신다. 여덟 가지 바람이란, 우리의 눈앞에 끝없이 전개되어 자신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행복과 불행의 상황을 의미한다. 곧, 이익 얻는 일(利), 쇠약해 지는 일(衰), 훼손당하는 일(毁), 명예로운 일(譽), 칭찬 받는 일(稱), 조롱당하는 일(譏), 괴로운 일(苦), 즐거운 일(樂)등이다. 우리는 이 여덟 가지 상황에 따라서 울고 웃고 괴로워하고 기뻐하면서 감정의 노예가 되어 한세상을 살아가는 허술한 모습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러한 허접스러운 자신을 인욕으로서 가다듬어서 바라밀로서 완성한 분이 현재의 부처님이시고 과거의 인욕선인이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익을 좀 보면 입가에 웃음이 돌고 가세가 기울거나 몸이 쇠약해지면 울상을 하고 갖은 궁상을 다 떤다. 그런가하면 남에게 훼손당하는 일이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기려고 하고, 칭찬을 받으면 의기양양 홀로 높은 존재가 된다. 감정을 다스려서 지혜를 키우는 것이 불자의 본분임을 망각하고 감정의 노예가 되어 울고 웃는 중생의 어리석은 모습을 ‘팔풍에 동요되지 말라’고 경책하신 것이다.

행·불행에 동요되지 말아야

이제 밧디야 비구는 자신의 몸에 대한 조롱을 동요됨이 없는 지혜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몸은 참으로 공하여 영원함이 없는 무상(無常)의 총체적인 모습인 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의 지혜를 터득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굳이 남과 싸우고 겨룰 일이 그다지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의 법칙으로 인연이 모여서 형상을 이루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서 산하(山河)가 고요하고 마음이 평화롭다. 바로 밧디야 비구가 얻은 열반의 경지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삶이 우리들의 앞에도 전개되는 것이다. 불교의 진리는 누구 한사람에게 치우쳐 있지 않다. 진리에 눈뜬 사람은 모두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지혜인 것이다.

진리의 감로수를 마셔본 사람에게는 어떠한 동요도 없이 고요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자신의 세계에 내재(內在)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밧디야 비구가 되도록 노력하는 일 만이 우리의 몫이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947호 [2008-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