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빈 바랑

경허.만공스님 법맥 이어 ‘선풍’진작한 천진도인

淸潭 2008. 3. 22. 15:54

경허.만공스님 법맥 이어 ‘선풍’진작한 천진도인

 

우리시대 큰 스승 원담대종사 원적

근현대 한국 선(禪)불교 중흥조로 존경받고 있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어 ‘선풍진작’을 화두로 한 평생 수행에 매진하다 지난 18일 열반에 든 원담당(圓潭堂) 진성(眞性) 대종사. 사부대중을 대할 때 언제나 자애로운 미소로 천진함을 잃지 않았다고 해 ‘덕숭산 천진불’로 널리 알려져 있는 원담 대종사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 준 큰 스승이자 선지식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비롯한 총무원 주요 소임자 스님들은 지난 19일 원담대종사 분향소가 마련된 예산 수덕사 염화실을 방문해 조문했다. 수덕사=이시영 충남지사장

일제 강점기인 지난 1926년 10월26일 전라북도 옥구군 옥구면 수산리 태어난 원담스님의 본관은 부안 김씨(扶安金氏), 속명은 몽술(夢述), 법명은 진성(眞性), 법호는 원담(圓潭)이다.

아버지 김낙관 선생과 어머니 나채봉 여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원담스님은 1933년 비구니 스님이었던 이모를 따라 덕숭산 수덕사를 찾아 불가와 첫 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당시 일곱 살의 어린나이였지만, 스님들의 정진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출가 사문의 길을 걷게 된다.

 

 

천진한 미소의 스님…‘덕숭산 천진불’로 알려져

국내 최고 선필로 유명…서예 통해 사회적 회향도

 

 

이후 7년 동안 출가자로서 기본적인 소양과 덕을 배운 후 1941년 구족계를 받으면서 경허스님 법맥을 이은 만공스님을 시봉하게 됐다. 만공스님을 모시고 덕숭산을 오르내리고, 경허.만공스님이 머물던 천장암을 오가며 원담스님은 자연스럽게 ‘수좌’의 길로 들어섰다. 때문에 원담스님은 만공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곁에서 성심을 다해 모시는 등 원담스님과 만공스님의 인연은 각별하고 다양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 가운데 만공스님이 ‘만법귀일(萬法歸一)’을 화두로 정진하던 원담스님의 머리를 주장자로 때리며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임 종 게

 

來無一物來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去無一物去

갈 때 한 물건도 없이 가는 것이로다.

去來本無事

가고 오는 것이 본래 일이 없어

靑山草自靑

청산과 풀은 스스로 푸름이로다.

 

어느 날 만공스님은 정혜사에서 채공소임을 보던 원담스님에게 살며시 다가와 주장자로 머리를 치며 “알겠느냐?”라고 물었다. 원담스님은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 만공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올리며 “네가 알기는 무엇을 알았느냐”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원담스님은 머뭇거림 없이 “‘딱 때리니까, 아픈 놈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당시 원담스님은 실제로는 잘 몰랐지만, 또 맞을까 겁이 나서 뱉어버린 말이었기 때문에 그 후 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장자로 얻어맞고 ‘아팠던 놈이 어떤 놈인가’ 열심히 참구를 했다고 한다.

이후 원담스님은 만공스님에게 “참 성품에는 본래 성품이 없고(眞性本無性) /참 나는 원래 내가 아닐세(眞我元非我) /성품도 없고 나도 아닌 법이(無性非我法) /총히 일체행을 섭했느니라(總攝一切行)”라는 전법게를 받고, 법을 인가받게 된다.

원담스님은 경허.만공선사의 선풍을 계승해 현대의 선농일여(禪農一如) 가풍을 새롭게 진작시켰다. 특히 ‘농선도인(農禪道人)’이란 불린 은사 벽초스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스님은 1970년대 초반까지 “신도의 시주에 의지하는 것은 무위도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인삼밭에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다.

또한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선지종가(禪之宗家)인 수덕사의 방장답게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 없이 천진한 도인의 모습을 보였다. 1960년대 서슬 퍼렇던 계엄시절, 박정희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송요찬 장군이 수덕사를 방문했을 때 원담스님은 수덕사의 총무일을 보고 있었다. 그때 송 장군의 수행원들이 앞마당에서 “송 장군이 오셨는데 내다보는 중도 없느냐?”고 소리치자 원담스님은 “너네 장군이지 우리 장군이냐? 절에 왔으면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해야지”하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송 장군은 슬며시 돌아갔다가 한 달 뒤 다시 찾아왔고, 그 후로 수덕사 신도가 되어 범종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을 보시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원담스님은 뛰어난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수덕사 대웅전 현판과 속리산 법주사 주련은 모두 원담스님의 휘호다. 1986년 일본의 산케이 신문 주최 국제 서예전에서 대상을 받고, 같은 해 독립기념관 건립 서예전을 열기도 한 원담스님의 글씨를 받아가려고 멀리 전국에서 찾아왔다. 1980년 양산 통도사에서 원담스님이 안거할 때 쓴 글씨를 보고 경봉스님이 “자네 글씨가 내 글씨보다 낫네!”라고 무릎을 칠 정도로 스님은 서예는 국내 최고의 선필로 알려져 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기금마련 전시회를 열고 글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건 없이 붓을 들었다. 2007년에는 평소 쓴 글씨를 모아 제자들이 <원담대종사선묵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한 원담스님은 덕숭총림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스님은 <경허법어>, <만공어록>을 발간하는 등 덕숭선맥의 선풍을 계승하기 위한 수행에 힘써오다 1986년 혜암.벽초 스님에 이어 덕숭총림 3대 방장에 추대돼 최근까지 후학을 제접해 왔다. 스님의 제자로는 2005년 입적한 법장 대종사를 비롯해 정혜사 수좌 설정스님,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 등 20여명에 이른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 분향소 이모저모

 

덕숭총림 방장 원담 대종사의 분향소가 마련된 예산 수덕사에는 스님의 원적을 안타까워하는 사부대중의 추모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조계종 법전 종정예하를 비롯해 조계총림 방장 보성스님, 고불총림 방장 지종스님, 영축총림 방장 원명스님 등은 수덕사를 찾아 원담대종사의 원적을 애도하며 조문했다. 원명스님은 지난 20일 “원담스님을 극락암에서 잠시 모시고 살았는데, 이 시대의 참 수행자이시고 보살 같은 분”이라고 회고했다.

원담대종사의 영정. 김형주 기자

이에 앞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19일 오후 총무부장 원학스님 등 총무원 부.실장 스님들과 함께 수덕사를 방문해 원담 대종사의 법구가 모셔져 있는 수덕사 염화실에서 분향했다.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이 자리에서 “종단에 어른스님들이 많이 계셔야 마음이 든든한데, 어른스님들이 한 분 한 분 떠나시어 애석하다”면서 “문중스님들이 열심히 준비하여 방장스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이 여법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문도대표 설정스님은 “종회가 회기 중이라 바쁘실 텐데 수덕사까지 와주셔서 감사드린다”며 “큰스님이 떠나시니 더 잘 모시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사부대중 추모행렬 ‘끝없는 물결’

총무원장.원로의원 등 조문행렬 줄이어

李대통령 수덕사 찾아 애도의 뜻 전해

 

 

이외에도 조계종 원로의원 성수.초우.혜정.고우스님을 비롯해 교육원장 청화스님, 전 포교원장 암도스님, 평창 월정사 회주 현해스님, 공주 마곡사 주지 법용스님, 화성 용주사 주지 정호스님, 순천 송광사 주지 영조스님, 봉화 축서사 무여스님 등 교구 본.말사 스님들이 수덕사를 방문해 원담스님의 원적을 애도했다. 계룡 무상사 주지 무심스님 등 외국인 스님 10여명도 조문행렬에 동참했다.

이와 함께 불교계 이외에도 사회각계 인사들의 조문도 줄을 이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이례적으로 원담스님의 분향소를 방문해 눈길을 끌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일 오후일정을 취소하고 수덕사를 방문해 주지 옹산스님에게 “원담 큰스님의 상좌인 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며 “입적소식을 듣고 애도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일정을 취소하고 수덕사를 찾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에 옹산스님은 “업무가 바쁜 와중에도 원담 큰스님을 위해 수덕사를 찾아 주셔서 고맙다”고 화답했다. 이날 오후3시 수덕사에 도착한 이명박 대통령은 옹산스님의 안내로 법당 참배 후 분양소가 마련된 황하정루에 들러 헌화와 헌향에 이어 합장반배로 예를 표했다. 이와 더불어 설정스님 등 상좌 스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이외에도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홍문표(한나라당).정의화 의원(한나라당), 이완구 충청남도지사, 김동민 충남지방경찰청장, 임광기 홍성교도소장, 정병하 대전지검 홍성지청장, 최병준 대전지법 홍성지원장 등 정관계 인사들이 잇달아 조문했다.

수덕사=이시영 충남지사장

 

 

● 원담대종사 행장

 

1926년 전북 옥구 출생.

1927년 충남 서산으로 이주.

1933년 비구니 스님인 이모를 따라 수덕사로 출가.

1937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수계.

1958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64년 중앙종회의원.

1967년 <만공어록> 간행.

1970년 예산 수덕사 주지 취임.

1980년 <경허법어> 간행. 서울 승가사.용인 화운사 조실.

1982년 수덕사 대웅전 휘호.

1983년 덕숭총림 설립. <만공법어>간행.

1984년 보은 법주사 주련 휘호.

1986년 덕숭총림 제3대 방장 취임. ‘일본산업경제신문’ 주최 제3회 국제서도전 대상 수상.

1994년 원로회의 부의장 취임.

2002년 용인 법륜사 조실.

2003년 법어집 <덕숭산 법향> 간행.

2004년 대종사 법계 품수. 금산 금락사.예산 향천사 천불선원.서산 개심사 조실.

2007년 <원담대종사선묵집> 간행.

2008년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독립기념관 소장 대종사 작품 13점 덕숭총림 선미술관에 기증.

2008년 3월18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 법납 76년, 세수 83세.

[불교신문 2412호/ 3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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